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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은날 Sep 10. 2021

[독서일기]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 정명원

박수칠 때 떠나라.

나에게는 500명이 넘는 민원인이 있다. 부서를 좀 바꿔달라는 A, 인사팀에서 정한 기준 따윈 분명 꼼수가 있을 거라비꼬는 B, 학력 인정은 당연하지만 군 경력을 인정하는 건 불합리하다는 C와 D, 군 경력 인정은 당연하지만 학력 인정은 불합리하다는 E, 이들은 서로 뜻을 같이하며 때로는 동시에, 때로는 릴레이로, 흥분과 짜증 섞인 불만을 기회가 있을때마다 쏟아낸다. 그 중에서도 나를 가장 못 참게 하는 건 블라인드 앱에서 마음대로 손가락 연주를 하는 그 녀석이다.


블라인드 앱이 생기고 나는 하루 아침에 감정노동자가 되었다. 그 녀석은 연예인의 일상을 파헤치는 스토커처럼 우리 팀원의 일상을 감시했고, 휴식시간에 개인 시간을 보내는 것도, 정시퇴근을 하는 것도 빼놓지 않고 지적했다.(우리 회사는 주52시간 제도가 빠르게 정착되며 90프로 가까이가 정시퇴근을 한다.) 그 녀석의 의견에 동조하는 충성스러운 댓이 연이어 등록되면 그 녀석의 생각은 전 직원의 생각으로 둔갑되어 여기 저기 중계도 모자라 두고 두고 재방송까지 된다. 연예인은 소속사에서 입장 발표도 해주고, 유능한 변호사 고용해서 악성 댓글러들 고소도 하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오늘도 녹색창에 '블라인드 고소/고발'만 괜히 검색해본다.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이라는 제목에서 나는 지금 나의 시간을 연결해본다. 그리고 정말 참아낼 수 없는 나의 민원인들이 떠올랐다. 안타깝게도 더 이상 민원인들의 민원을 듣고 싶지 않은 나를 발견하는 건 당연했다. 이런 내가 인사담당자여도 정말 괜찮은걸까?라는 고민이 머리속을 계속 맴도는 요즘이다. 시험 문제지를 받아들고 뭐라도 끼적여보려고 애써보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문제지만 뚫어져라 들여다본다. 이제는 내 능력 밖의 일이 되어버린 것 같아 속상함이 쓰나미처럼 밀려온다.


평소 화를 잘 내지 않는 나는, 그 녀석의 글을 볼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오른다. 가슴이 답답해져 숨쉬는 것마저 불편해진다. 괜히 마스크 탓을 해보지만 사람에 대한 불안함이 엄습하며 초조해지는 것을 감당해보려고 자꾸만 숨을 크게 들이쉬게 된다. 정말, 런 내가 인사담당자여도 괜찮은걸까? 나는 왜 하필 회사에서 인사업무를 가장 오래한 담당자가 된 걸까. 책임감 없이 그만두는 것도 해답이 될 수 없음을 나는 너무나 잘 안다.


책을 읽는 내내 친애하는 민원인을 상대하는 작가의 모습에 다시 한번 나의 모습을 반추해본다. 검사의 캐비닛에 가득 쌓인 미결과제들은 내 트북 뒤 파티션에 덕지 덕지 붙여둔 포스트잇 업무 메모를 보는 것 같았다. 나에게도 아직 해결해야 할 난제들 산적해있다. 그리고 그 안에 밤새 내린 큰 비에 길을 잃은 새끼 오리처럼 헤엄쳐 나가야 할 방향을 찾지 못해 갈팡질팡하고 있는 내가 있었다.


퇴사가 절박했던 요즘, 민원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조차 굉장히 지치고, 그들과 마주하는 것조차 몹시 불편했다. 책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은 나에게 주어진 역할을 꾸역 꾸역 해내기 위해 나의 민원인에게 마음을 열어야 함을 상기시켜 다. 나는 나의 자리에서 해야 할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나는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도망갈 생각만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비겁하게 민원인들의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나는 여전히 A, B, C, D, E 다양해진 민원인들의 요구를 마주하는 것이 불편하다. 해결할 수 없는 과제가 적힌 포스트잇을 하나씩 떼어내 파쇄기에 넣어 버릴 수 있도록 조금 더 힘을 내 보고 싶어졌다.  


박수칠 때 떠날 수 있는 그 날을 기다리며, 아직까지도 잘 버티고 있는 나에게 박수를 보낸다.


세상이 설정한 표준 사이즈가 무엇이든, 중심이 무엇이든 사람들은 각자 자기만의 굽 높이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남들 하는 대로 맞추다 보면 내가 절뚝거리며 걷고 있는 것조차 모르는 것이다.


2021.09.09. 즐거운 일터를 만들고 싶은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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