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좋은날 Apr 23. 2023

[독서일기]평온한 날, 김보희

그림이 마음에 들어오는 시간

격랑을 겪고 품은 바다는 평온하다. 그 바다를 나는 그린다.


아침 5시, 나는 눈을 뜬다. 오늘도 평온한 날이기를 꿈꾸면서. 조용한 출근 길에 마주하게 되는 파란 하늘, 그 끝자락에서 빼꼼이 눈웃음짓는 발그레한 태양, 그 커다란 캔버스 위를 천천히 지나가는 구름, 그리고 그 몽글몽글한 구름 위에 눈을 감고 두 팔 벌려 누워본다. FM89.7MHz의 주파수를 타고 기억할 수 없는 클래식 음악이 나를 감싸 안는다. 평온함을 느낄 수 있는 아주 찰나의 완벽한 시간, 그렇게 나는 오늘도 평온한 나이기를 꿈꾼다.


나이가 들면서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쉽사리 편승하지를 못하고, 가만가만 주춤주춤하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알레그로(Allegro, 빠르게)의 빠르기로 달리던 나에게도 모데라토(Moderato, 보통 빠르게)의 시간을 지나 자연스럽게 안단테(Andante, 느리게)의 속도가 필요해진 요즘이다. 지금의 일상이 변화한 나의 시간은 어떤 모습일까하는 행복한 상상을 하는 것이 좋다. 네모난 노트북과 눈싸움을 하면서 보고서를 쓰고 있는 내가 아닌, 커다란 창의 초록을 마주하고 가만히 보고, 듣고, 느끼면서 또 다른 나를 만나보는, 생각만으로도 웃음짓게 되는 기분 좋은 상상. 언젠가 현실로 다가올 그 날이 간절해진다.     


초록 그림이 많아진 것은 자연스러운 삶의 반영이다. 그 싱싱한 초록 속에 내가 살고 있다는 증거다. 큼지막한 초록잎을 시원하게 펼쳐 그릴때면, 작은 체구의 나도 활짝 몸을 펴는 느낌이다.


마음의 평온함이 간절해진다는 건, 마음의 소란스러움이 많아졌다는 것이리라. 그것을 버틸 힘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고, 휴대폰 배터리가 깜빡이듯이 주는 긴급한 신호일지도 모른다. 나이와 정비례해서 찾아오는 심난함은 많은 질문을 나에게 던져온다.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조직에서 나에게 요구되는 역할은 무엇인지, 물론 아주 가끔은 왜 이런 고민을 계속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도 있다.어쩌다 조직에서의 책임이 더 커진 지금, 2023년을 달리던 열차에서 잠시 내려 플랫폼 먼 곳을 가만히 응시해본다. 20년간 인사업무를 하면서 달려온 이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이 맞는 건지, 바른 길로 잘 가고 있는 건지 답이 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또 한번 던져본다. 내가 가야 할 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역시나 아직은 어렵다는 답을 가지면서.


그래, 어른이 되어가면서 나에게 켜켜이 쌓여가는 시간과 경험은 나를 알아가는 인생 공부이지 싶다. 그리고 분명 이번 생의 시험 문제는 쉽지가 않다. 언제쯤 일상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파동을 내가 잘 다스릴 수 있을까. 다름을 인정하는 사고의 유연함과 균형감을 언제쯤 가질 수 있을까. 내가 바라는 평온함은 마음의 동요가 없는 상태가 아닌 어떠한 상황에서도 내 마음의 파동을 끌어안고 감내해낼 수 있는 상태일 것이다. 켜켜이 쌓여가는 시간과 경험이 아직 완전하지 못한 나에게 여전히 필요한 까닭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매일 보는 바다의 색이 달랐다. 나무 색도 달랐다. 초록에도 차이가 있다. 짙푸른 초록, 노란빛이 감도는 초록, 강렬한 초록, 새초롬한 초록... 초록을 그리고 싶었다. 내가 보는 것, 내 마음에 와닿는 것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 한 장으로도 온전한 평온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묘하다. 그림 한 장이 내 마음에 들어와 자리잡는 이 시간이, 평온함이라는 단어를 떠올려볼 수 있어서 참 좋다.


2023.04.22.

매거진의 이전글 [독서일기]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고명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