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캄할 땐 당신 생각을 해도 되겠다
추운 겨울, 나는 고명재 시인의 첫 시집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을 만났다. 개나리색 표지를 슬며시 열어 만난 시들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 지금을 살아낸 시간의 기억들이 담겨있었다. 그것을 사랑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그 무언가의 감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운 사람에 대한, 그리고 소중한 사람에 대한 마음이 참 애틋하다고 느꼈다. 까만 겨울 밤 남몰래 내린 하얀 눈을, 뽀드득 뽀드득하고 조심스레 한 발 또 한 발 내딛는 것 같은 마음으로 책장을 넘긴 기억이 있다. 신간 리스트를 체크하던 어느 날 우연히 시인의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를 발견했다.
팔월의 한여름, 계속해서 기억한다.
어떤 기억은 발밑의 자갈, 하늘의 색채, 그날의 나뭇잎까지도 머리에 남는데
그게 의지에 의한 것인지 순전히 사랑 때문인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저 기억한다. 그날의 마디마디를.
참 신기하지. 글을 읽으면서 마음속에 하얀 눈이 내리는 순백의 그리움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사물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사소한 것 하나도 쉬이 놓치지 않는다. 일상에서 만나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던 단어들이 어떻게 아무렇지 않은 것이 아닐수도 있는 건지. '포로퐁 퐁퐁. 요정이 물에 떨어지는 소리. 예측할 수 없는 알알의 귀여운 리듬. 메추리알 장조림을 만드는 과정은 소리 때문에 귀가 귀엽게 간질거린다.', 아! 고작 메추리알 장조림을 만드는 그 찰나를, 어떻게 이렇게 표현해낼 수 있는건지. 어! 나는 메추리알 장조림을 만들면서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귀가 귀엽게 간질거리는 건 어떤 느낌일까? 자꾸만 고개만 갸웃거리게 된다. '오븐 속의 빛과 열이 반죽에 닿을 때 무성한 봄의 볕이 기억난 건 아닐까. 일어나야 해. 얼른 커서 푸르러야지. 그렇게 밀의 기억이 풍선처럼 부풀어올라서 온갖 빵은 노을빛으로 물드는 게 아닐까.' 동네 빵집 사장님이 오븐 앞에 서서 부풀어 오르는 빵을 들여다보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주말 아침, 나는 그 빵을 먹을 때가 참 행복하다는 걸 빵집 사장님도 눈치 채셨을지도 모른다. '가끔 바늘에 찔린 듯 눈이 아파서 그렇게 병간은 병을 돌보는 일이기도 하지만 솔잎 같은 한 사람의 끝을 눈에 담는 일.' 일상에서 누구나 마주하게 되는 경험, 그 시간을 표현해내는 작가의 문장이 참 좋았다. 그리고 잊고 있었던 기억. 나는 산문을 좋아한다.
참 시시하지. '인생은 '너무'와 '정말' 사이에서 춤추는 일이니까요. 우리는 부차적인 것들 때문에 울고 웃으니까요.' 어쩌면 너무 특별하지 않아서, 정말 예쁘게 쓰려고 꾸미지 않아서, 그래, 그래서 좋았다. 너무 사소한 일상이라서. 정말 작은 이야기여서. 가족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글의 곳곳에 따뜻한 색채로 드러난다. 서로에 대한 마음이 글을 읽는 나에게도 너무 잘 보인다. 정말 좋다. 나는 남들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만큼, 딱 그만큼만 가족에게도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당연함을 아주 당연하게 요구하고 있는 건 아닌지. 가장 가깝고, 고맙고, 소중한 존재이면서도 어쩌면 그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하지 못하는 대상의 이름이 바로 가족일지도. 작가의 작은 이야기들 사이에서 내 모습을,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참 이상하지. 책을 읽는 내내 누군가 건드리면 눈물이 툭 터질 것만 같았다. 진한 그리움의 노을이 내 앞에 펼쳐진 날, 윤슬을 마주하고 있으면 이런 기분이 들까. 작가의 글은 내가 짊어진 비즈니스 짐의 무게를 덜어내고, 지극히 평범한 한 사람으로의 모습을 그리게 한다. 잊고 있었던 지난 기억들에 대한 시간을 기어이 끄집어내게 한다. 내 기억속의 시계를 천천히, 조용히, 그리고 느리게 또각또각 되돌려 버린다. 시집을 읽을 때는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작가의 감성이 산문을 읽으면서 조금 더 알아차리게 된다. 어떤 마음으로 글을 쓰는지, 어떻게 이런 표현들을 끄집어내어 글을 쓰는 것인지, 글을 좀 잘 써보고 싶은 나는 몹시 궁금해진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글을 통해서 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를. 삶을 마주하는 시선이 이렇게 말갛게 빛날 수도 있구나 라는 울림이 내 마음까지 전해진다. 가만히 눈을 감고 가장 그리운 존재를 떠올려보게 되는 참 좋은 글을 만났다.
가장 그리운 존재가 안에서 부푼다. 볕을 쬐고 자란 밀이 금빛을 낸다. 나도 그랬어.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고 나 역시 기억으로 부풀고는 해. 그렇게 죽은 이들은 사라졌지만 함께한다. 존재는 폭죽이니까. 언제든 내 안에서 같이 살아가다가 유품이라도 보면 활짝 빵처럼 피지.
[추신] 책 속에는 '참 신기하지', '참 시시하지', '참 이상하지'라는 표현이 있다.
2023.06.30. 좋은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