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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목 Oct 04. 2020

정말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임신중지'를 읽고

내 몸을 생각해 보자. 내 몸은 자주 멈춰있었고 나는 내 몸이 부피를 줄이고 무해해지기를 원했다. 선택이라는 단어는 이 모든 게 정말 내가 원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했다. 나는 선택이라는 단어를 지우고 나서야 나를 둘러싼 강요들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선택이라는 단어는 여성이 여러 외부적 요인들을 인지하지 못하게 만든다. 사회적, 정치적 요인들이 흐릿해지고 온전히 여성의 ‘선택’만 남아 개인적인 차원의 일이 되는 것이다.

임신중지에 규제를 가하는 것은 국가가 여성들의 재생산을 관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임신중지를 통제당하는 범주의 여성이 있고, 또 한편으로는 출산을 통제당하는 범주의 여성도 존재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임신중지에 대해 말하면서도 후자의 여성에 대해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코르셋을 개인의 선택이라고 말하는 것이 위험하듯이, 임신중지를 선택이라고 말하는 것 역시 어느 범주의 여성에게는 위험할 수 있다. 재생산을 통제당하는 여성은 임신중지를 은연중에 강요당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식의 고정관념은 팽배하다. 중산층 기혼 여성이 임신중지를 한다고 하면 많은 사람이 의아해하며 반대할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한 상태의 어린 독신 여성이 임신중지를 한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납득할 것이다. 분명히 이 독신 여성이 출산을 하고 난 후의 미래를 염려하는 사람 역시 있겠지만 동시에 많은 사람들은 태어날 아이의 미래 역시 염려할 것이다. 어린 독신 여성의 임신중지는 태아의 미래를 생각한 결정으로 여겨진다. 임신중지마저 모성에 의한 선택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여성의 재생산을 관리하는 것은 오직 여성 자신의 의지여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국가는 여성이 출산과 임신중지를 같은 무게로 두고 고려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어야 한다.
왜 중산층 기혼 여성의 임신중지는 사람들을 납득시키지 못하는가. 임신중지가 정당화될 특별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특별한 이유 없이도 임신중지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나 또한 임신중지 여성을 생각했을 때, 무의식적으로 독신의 어린 여성을 생각하곤 했다. 이런 고정관념은 임신중지를 하는 것이 태아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상황의 여성들이 임신중지를 고려하기 더 어렵게 만든다.

임신중지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모성을 여성의 선험적 특성으로 규정짓고 임신중지를 겪은 여성들이 당연히 애통함을 느끼리라 짐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경우, 임신중지는 필요악으로 여겨졌다. 임신중지는 최악의 상황에서만 행해져야 하는 일이 되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임신중지 이후에 안도감을 느낀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이 그 감정을 입 밖으로 낼 수 없다. 보통 임신중지를 경험한 여성들은 애통함과 죄책감을 느낀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 외의 감정은 적절한 감정 각본을 벗어나는 감정이기 때문에 비난받는다. 임신중지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제외한 감정들은 전해지지 못하고 사라진다. 임신중지는 끔찍한 일이 되고, 이를 통해 애통함과 죄책감 등을 유발하는 요소라고 여겨지는 ‘모성애’에 대한 신화는 더욱 강력해진다.

남자들은 여성들을 어떻게든 사회가 만든 ‘여성성’의 틀 안에 가둬두고자 했다. 여성들은 외모와 행동, 더 나아가서 감정까지도 규제받았다. 하지만 사회가 규정하는 ‘여성성’을 벗어나도 우리는 여전히 여성이다. 틀을 벗어난 행동을 하는 것을, 틀을 벗어난 감정을 느끼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임신중지에 대한 긍정적인 경험담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 언젠가는 임신중지의 경험을 생각할 때 안도감과 행복 등 긍정적인 감정을 우선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서, 임신중지와 출산이 모든 여성에게 같은 무게의 선택지로 놓여 있을 때 비로소 여성들은 오직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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