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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목 Jan 31. 2021

유토피아의 레퍼런스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고

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만 해도 움을 여성의 모습으로 상상하는 것이 힘들었다. 움에게 자꾸만 남성의 형상을 대입하게 되었다. 남성이 저런 고민을 한다는 상상이 고소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꾸만 맨움에게 공감하게 되어서 씁쓸했다. 사실 이 책은 허구일 뿐 책 안에서 맨움들이 겪는 각종 차별이 현실에서는 여성에게로 향하는 차별이라는 것을 계속 상기하게 되어서 더 씁쓸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은 여성이 겪는 차별을 동일하게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차별의 대상이 남성이라는 것을 납득할 수밖에 없도록 치밀하게 재구성되어 있다. 이 책을 덮을 때쯤 되어서는 이 책 속의 세계가 진심으로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성을 이등시민으로 전제하는 지표가 너무나 넘쳐나는데 우리 사회를 이루고 있는 것들 중 아주 근본적인 것들이라 문제점을 느끼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들이 많았던 것 같다. 성별을 나타내는 단어만 살펴보아도 사회가 기본적으로 ‘기본형’으로 전제하는 인간이 어떤 성별인지 알 수 있다. 영어에서 여성은 woman, 남성은 man이다. man은 인간을 의미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어이자 남성을 의미한다. 여성을 의미하는 단어는 man이라는 단어에 접두사가 붙은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she, he 역시 마찬가지다. 서양의 책들을 번역하게 되면서 우리나라 역시 여성은 그녀, 남성은 그라고 지칭하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여성을 움, 남성을 맨움이라고 한다. 이런 디테일 하나하나가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장치인 것 같다. 다만 번역을 할 때 그와 그녀라는 대명사를 그대로 쓰지 말고 그남과 그 같은 단어로 바꾸었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녀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자꾸 현실로 돌아오게 되어 아쉬웠다.

움들의 논리가 이상하다, 합리적이지 않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현실을 지탱하는 고정관념의 시발점을 생각했다. 그러면 책 속에서의 불합리한 신화들이 이해가 가지 않을 것도 없었다. ‘하나님 아버지’는 다짜고짜 남자의 갈비뼈를 빼서 여성을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무슨 근거가 있는가. 모든 종교가 그런 식으로 말했고, 남자들의 주장은 온통 비약의 연속이었다. 신화는 기득권자들이 만든다. 얼토당토않은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며 문화의 근간이 되고 결국 모두에게 당연하게 여겨졌다. 오랜 시간 동안 그렇게 생각되어 왔다고 해서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냥 오랫동안 멍청했을 뿐 그 기간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이 책은 우리가 생물학적 특성이라고 여겼던 부분 역시 사회문화적으로 발생한 것이라는 것도 섬세하게 짚어준다.

그는 치마 틈새로 삐죽이 나와 있는 작은 물건을 응시했다. 이것으로 뭘 한단 말인가? 왜 거기에 있는 것일까? 결국, 이것은 완전한 무용지물이다. 소변을 보기 위해서라면 움들처럼 깨끗하고 작은 입구만 있어도 될 텐데. 그리고 성적 쾌락을 위해서라면 움들과 같은 작은 돌기만 있으면 되고. 어째서 맨움은 이렇게 우스꽝스럽게 생겼을까? 그리고 어째서 맨움이 우스꽝스럽게 생겼다는 사실이 늘 강조되는 것일까? 그렇게 혐오스럽게 보인다면 어째서 그 부분을 가리지도 못하는 걸까? (160P)

맨움은 스스로의 육체를 부끄럽게 여기게 된다. 현실 속의 여성들은 남성과 반대되는 신체적 특성을 극대화시키는 것을 동경해 점점 여성과 남성의 신체적 차이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하지만 탈코르셋을 한 여성들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사실 겉으로 봤을 때 그 정도로 유의미한 신체적 차이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책의 세상에서는 움의 신체 그 자체를 동경하는 것 같은 맨움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근육보다 지방이 많은 몸을, 작은 성기를 동경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성에게 브라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글쎄, 정말 그런가? 여성들은 사실 브라에 길들여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브라를 하지 않으면 가슴이 쳐진다고 겁주는 말에서부터 여성의 유두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이 아주 음란한 것처럼 여겨지는 문화까지 여성에게 브라를 착용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 나는 13살부터 22살 때까지 샤워할 때를 제외하고는 브라를 벗지 않고 살았다. 탈코르셋을 하면서 브라를 하지 않는 것을 시도해 봤는데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분명 브라를 하고 있는 게 더 편했다. 나는 브라에 완벽하게 길들여졌던 것이다. 지금은 답답하게 그때 그걸 어떻게 하고 살았나 싶다.
맨움에게는 페호가 있다. 페호는 역시나 아무 쓸모가 없어 보인다. 그저 나이가 차면 관성적으로 해야 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많은 사람이 이 책을 남자가 읽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여성들이 이 책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남성이 이 책을 읽어서 여성의 현실을 역지사지의 정신으로 이해하게 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남자들의 이해와 관용은 기득권의 특권이고 여성들의 현실을 바꾸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이 책은 여성들에게는 너무나 재미있는 간접경험을 제공해 준다. 그리고 스스로가 겪어왔던 것 중 많은 것이 차별이었다는 깨달음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여성들이 만들어 갈 유토피아의 레퍼런스를 제시해 준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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