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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목 Jan 31. 2021

금지된 것을 소망하는 여자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을 읽고

나는 소설을 좋아하는 학생이었지만 소설 속에서 몰입할만한 여성 캐릭터를 발견하는 데에 실패했다. 남성 캐릭터들이 온갖 역할을 도맡으며 종횡무진할 때 여성 캐릭터는 그 옆에 서 있거나 남성에게 이용당했다. 나는 책 속의 여성이 되기 싫었으면서도 그 역할을 비판 없이 수용했고 무의식 중에 여성에게 한계를 부여하고 있었다. 나는 여성임에도 여성 혐오를 내재한 여성으로 자랐다. 내가 규정한 여성에 대해 생각할 때, 나는 자주 멈춰 서야 했다. 저런(남성들의 전유물로 생각되어지는 것)것에 끌리는 나는 이상한 여성인가를 고민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학생 때 이런 소설을 읽을 기회가 많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확실한 건, 금지된 것을 소망하는 여성 캐릭터들이 많아질수록 우리에게 금지되었던 것들은 더 이상 금지된 것으로 남지 않을 것이다.
많은 소설 속에서 여성 캐릭터의 외모 묘사에는 찬사 혹은 조롱이 따라붙었다.
‘평생 자신의 외모를 가꾸며 살아가도록 태어나지 않고 평생 자신의 두뇌를 의지하며 살도록 태어난 것을 나는 하늘에 감사한다.’라고 말하는 여성 캐릭터를 나는 처음 보았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이 캐릭터에 몰입할 수밖에 없겠구나, 확신했다.

‘낮은 포복을 혐오하고 높이 기립해서 사는 여자, 물살을 거스르며 하류에서 강의 상류로 나아가는 여자, 그런 주인공이 필요했다. 현실에는 없지만, 소설에서는, 소설이므로, 강민주 정도는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357p
스스로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고 공감하게 만드는, 현실에 있을 법 한 여성 캐릭터들을 나는 수 없이 만나왔다. 강민주는 다르다. 스스로를 신에 비견할 정도로 강한 자의식을 가진 여성 캐릭터. 신선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강민주는 개인적인 동기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에게는 대의에 기반한 동기가 있다. 하지만 아주 거시적인 시야를 가졌던 강민주가 그저 그의 거대한 장기판 위의 장기짝에 불과했던 백승하를 한 사람으로 인지하고 교감하는 순간 그의 침몰은 시작되었다.

백승하의 죄목은 여성들에게 환상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여자들을 교란한 죄, 여자들로 하여금 남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게 한 죄, 자신이 택했던 남자가 나빴던 것은 자신의 숙명이라고 여기며 여자들을 운명주의에 빠뜨린 죄, 그것만으로도 나는 백승하를 용서할 수 없다.’ 47p
강민주는 백승하의 이미지를 망가뜨려서 세상에 ‘좋은’ 남자는 없음을 모든 여성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하지만 백승하는 대화가 통하는 상식적인 인간이다. 사실 경험해 본 바, 남자는 상식적인 인간일 확률도 극히 낮다. 그렇기 때문에 강민주가 백승하를 인간적인 감정으로 느끼기 시작한 게 아닐까. 강민주의 남성에 대한 극도의 불신이 있었기에 이 예외적인 남성은 목숨을 보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남성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기 때문에 아주 작은 상식적인 행동에도 그 남성이 정말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승하 역시 남성이다. 강민주의 주장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을 보면 정말 ‘괜찮은’ 남자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모자란 캐릭터는 점점 성장하고 완벽한 캐릭터는 점점 무너지기 마련이다. 인간의 모순적인 부분을 잘 포착해서 창조된 캐릭터일수록 정말 잘 만들어진 캐릭터이므로 어떤 부족한 부분이 있는 캐릭터만이 캐릭터로서는 완벽함에 가까운 캐릭터가 아닐까. 그런 부분에서 처음부터 완벽했던 강민주는 무너짐이 예견된 캐릭터였던 셈이다. 강민주가 백승하에게 마음을 열게 되는 것은 소설의 전개상 필연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강민주가 무너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남기가 든 칼은 작가, 혹은 독자의 칼이나 다름이 없다. 내게 황남기는 강민주를 세상에게 무결한 모습으로 남기려는 작가의 안배처럼 느껴졌다.
강민주에게 공감하고 강민주가 백승하에게 마음을 열지 않기를 바랐던, 끝까지 무결한 모습으로 남아주기를 바랐던 여성 독자들이라면 모두 강민주의 공범이고 금지된 것을 소망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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