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나아가야 할 방향
글이 나아가야 할 방향
이청준, 「자서전들 쓰십시다」 독후감상문
이청준, 「자서전들 쓰십시다 - 언어사회학서설 2」, 『문학과지성』, 1976.여름, (『서편제 – 이청준 전집 12 중단편집』, 이광호 펴냄, 초판 4쇄; 서울 : 문학과지성사, 2021, 114~170면)
이 작품은 남의 자서전을 대필해 주는 일을 하는 인물인 지욱을 통해 참된 글쓰기의 의미에 대해 탐색하고 있다.
지욱의 대필 행위는 말이나 글이 인간의 의도나 이념 실현과는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지욱은 자신의 과거 상처와 실패조차도 미화하고 싶어 하는 코미디언 피문오, 세상을 자신의 방법대로 외곬으로 이해하며 자신의 신념을 강요하는 최상윤에 대한 자서전 쓰기를 거부하고 있다.
이청준이 자신의 문학적 작업을 두고 '자기구제의 한 몸짓'이라고 표현하였듯이, 이 소설에서도 참된 자서전 쓰기는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대한 반성과 참회를 행하는 일이며, 그 속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찾아내는 일임을 강조하고 있다.
글이 사실과는 다른 독자적인 자아를 가지는 건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언어의 시작은 ‘정보 전달’이었으나, ‘허구’와 ‘신화’를 창조해내는 용도로도 변용되는 것, 그것은 결국 종교와 정치를 탄생시켰으며, 수많은 전쟁과 폭력과 학살을 일으켰다.
「자서전들 쓰십시다」에서의 지욱은 허구를 창조해야만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거짓을 사실로 포장해야만 하는 자서전 대필가이며, 그는 그 정당성에 대한 깊은 고뇌에 빠지게 된다. 자서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영웅담이나, 소설, 논설문이 아니다. 피문오씨의 말대로 완전한 ‘진실’을 담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진실에 가까워야만 한다. 진실을 살해하여 가식적인 허구로 존경을 낚아서는 안 된다. 최상윤씨처럼 자신의 강한 신념을 꾸역꾸역 주입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그저, 담백하고 진솔한 태도로 과거를 회상하고, 삶을 반성하고 성찰해야만 한다. 그러한 내면적 성숙의 과정이 끝내 짙은 잔향을 남길 수 있는 것이다, 젊은 윤동주의 시가 그러하였듯 말이다. 지욱이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자서전도 그런 방향이었을 테다.
나 살자고 하는 일이야.
구질구질하고 음산스런 옛날 기억들일랑 당신 말마따나 두꺼운 도배질로 싹 가려 덮어버리고 나도 이젠 그 책 덕분에 남들처럼 목에 힘도 좀 주고 내 나름대로 뜻도 좀 펴가면서 세상을 살아보고 싶어 시작한 일이었다니깐.
- 이청준, 「자서전들 쓰십시다 - 언어사회학서설 2」, 『서편제 – 이청준 전집 12 중단편집』, 이광호 펴냄, 초판 4쇄; 서울 : 문학과지성사, 2021, 160면.
피문오씨는 거짓말을 원했다. 그 이유는 ‘살기 위해서’라는 어리석고도 슬픈 이유였다. 거짓을 진실로 포장해서 얻는 힘이라니, 그 얼마나 허황된 꿈인가. 그렇게라도 자신을 영웅화하고 싶어하는 피문오씨가 조금은 안타깝게 느껴졌다.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아는 금세 자멸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을 영웅으로 만들어 줄 거짓 자서전이 아니라, 현재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태도다.
그럼 지욱이 최상윤의 자서전을 거절한 이유는 무엇인가. 최상윤은 너무도 강한 자신의 신념을 외부로도 설파하고 싶어하는 인물이다. 이는 진위 여부와 관계없이, 위험한 것이다. 신념과 가치관을 주입하는 일은 결국 개인을,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 바꾼다는 일은 기존의 것을 파괴한다는 의미이며, 그것은 예상치 못한 위험한 결과를 낼 수도 있다.
자기고백적인 성향으로, 인물의 내면적 성장과 성취를 담아내야 하는, 자연스레 독자들의 귀감이 되어야 하는 자서전에 인물의 강한 신념을 담아내야만 하는 것- 이는 나치즘, 제국주의, 파시즘 등의 사상글과 다를 것이 없을 테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 이와 같은 성격일 것이며, 지욱이 최상윤씨의 자서전마저 거절한 이유다.
「자서전들 쓰십시다」는 각 의뢰인들 사이 지욱의 고뇌를 통해 ‘글의 힘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허구를 통해 누군가를 찬양할 것인가, 신념 주입을 통해 세상을 변혁 혹은 파괴할 것인가. 그것들이 옳다고 말할 수 있는가. 작가가 자신의 주관을 잃고 그러한 글들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고장 난 시계나 라디오들 고칩시다아- 채권 삽니다아-
부서진 우산이나 빈 병 삽니다아-
자서전이나 회고록들 쓰십시다아-
- 이청준, 「자서전들 쓰십시다 - 언어사회학서설 2」, 『서편제 – 이청준 전집 12 중단편집』, 이광호 펴냄, 초판 4쇄; 서울 : 문학과지성사, 2021, 156면.
먹고 살겠노라 애걸애걸 일을 맡아간 건
마찬가지가 아니었나 말야.
- 위의 글, 156면.
피문오씨의 말을 듣고 무감각해진 지욱은 혼자 남아 되뇌인다.
자서전들 쓰십시다아. 자서전이요, 자서전, 자서전드을 써요…….
위의 글, 170면.
예술은 뜨거운 것이다. 글도 예술의 한 영역으로서, 그 성질을 타고난다. 연극 배우들도 뜨거운 공연이 끝난 후, 뒷풀이 자리에서 가난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돈 버는 방법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 음악가나 무용수, 다른 시인들도 그렇다고 한다.
시선은 뜨거운 태양을 바라볼 지라도, 발은 차가운 땅을 딛고 사는 것- 그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지욱 역시 그 부분도 고뇌할 테다. 단순히 의뢰인들과의 신뢰를 져버리는 것만이 문제가 아닌, 자서전 대필이 먹고 사는 일, 즉 돈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글, 쓰고 싶은 글을 쓰며 먹고 사는 건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먹고 살지 못하더라도 그러한 글을 써내려가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대부분은 먹고 살기 위해 옳지 못한 글을 쓴다. 옳지 못한 글이라 함은, 진실이어야 할 것을 거짓으로, 타인의 신념을 파괴하고 사상을 주입하는 피문오씨와 최상윤씨의 자서전 같은 글-이다.
지욱이 ‘자서전들 씁시다아-’하고 되뇌는 일은 암울한 암시라 느껴졌다, 골목골목 저 말을 외고 다니는 고물상들처럼 먹고 사는 일을 위해, 가치 판단을 내버리고 돈 버는 글쓰기의 길로 갈 것이라는……. 결국 한 명의 예술가가 살해되는 과정을 지켜보고 말았다.
하지만 왜일까, 나는 그런 지욱을 보며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어둠을 몰아내려 촛불같은 시를 쓰는 윤동주 시인의 형상이 그에게 겹쳐졌다. 옳지 못한 글을 쓰면 안 되는 이유를 찾기 위해 여정을 떠나고, 저항도 해보았지만, 끝내 감각이 무뎌지고, 부끄러운 글을 쓰게되는 지욱, 그의 이야기가 담긴 이 소설이야말로 진정한 자서전이란 생각이 든다.
예술가를 파괴함으로써 완성하는 예술-
나 역시 파괴되어도 좋으니, 나의 자서전도 예술로 떳떳할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