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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의 Oct 01. 2023

오늘도 돌다리에 앉아 그리움 속에 발 담그시는…

이태준, 「돌다리」독후감상문


오늘도 돌다리에 앉아 그리움 속에 발 담그시는…
이태준, 「돌다리」독후감상문


이태준, 「돌다리」, 『돌다리』, 박문서관, 1943.12. (『돌다리 외 – 이태준 전집2』, 강진호 외 엮음, 소명출판, 2015, 270~280면)


전체 줄거리


창섭은 의사의 오진으로 누이가 죽자 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고,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울로 가 의사가 되었다.

창섭은 의사로서 성공했고, 좀 더 큰 병원을 만들고 싶어한다. 그러다가 든 생각이 고향에 있는 땅을 파는 것이다. 부모님도 나이가 많이 드시기도 했고, 서울에서 같이 살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말하려 고향에 내려갔다. 그때 아버지는 비로 인해 훼손된 돌다리를 보수하고 있었다.

창섭이는 자신의 뜻을 아버지한테 말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대대로 내려온 땅을 지키고 싶었고, 자신의 추억이 담긴 돌다리도 지키고 싶었다. 아버지는 창섭이에게 자신의 뜻을 이어받길 강요하진 않지만 본인은 갈 수 없다며 거절했다. 아버지는 창섭이에게 아쉬움을 느꼈고, 창섭이는 아버지를 존중하면서도, 다른 세계의 사람으로 인식하는 모순을 느낀다.

창섭은 서울로 돌아가고, 아버지는 돌다리로 가서 세수를 한다.

H의 독후감상문

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좋아한다. 그의 영화는 청명하고도 날카롭다. 「돌다리」를 읽으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걸어도 걸어도>라는 작품이 떠올랐다.


<걸어도 걸어도>는 부모와 자식 간의 이야기에 대해 다루는데, 흔히들 생각하는 신파와 감동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 반대다. 아주 평화로운 일본의 여름 일상을 비추지만, 그 심연은 폐 아플 정도로 서늘하다.


영화의 마지막, 어머니는 오랜만에 고향에서 하룻밤 묵은 아들을 떠나보내며 나지막이 속삭인다.


“설에야 다시 볼 수 있겠구만...”


떠나는 버스를 타며 아들은 이야기한다.


“이번 설에는 오지 않아도 되겠어. 1년에 한 번이면 되겠지.”


그러다 갑자기 전날 대화에 나왔던 스모 선수의 이름이 이제야 떠오른다. 그때 알려주지 못했던 것을 후회라도 하듯 뱉는다.


늘 그렇다니까, 꼭 한 발씩 늦어.


그리고 어머니는 아들을 다시 만나기 전 죽음의 암흑 속으로 잠기고 만다.



「돌다리」는 부모와 자식 간에 대해 다룬다는 점에서 <걸어도 걸어도>와 유사하다. 하지만 그 결은 다르다. 끝내 단절되는 <걸어도 걸어도>와 달리, 「돌다리」는 연결된다. 등장인물들과 그 관계는 투박하고 위태로운 표면을 지니지만, 그 속에 깊고 따뜻한 사려가 스미어 있다. 이태준 작가는 빼어난 글 솜씨 이상으로 따뜻한 사유와 시선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란 게 느껴졌다. 그것이 「돌다리」를 사랑스러운 작품으로 만드는 가장 큰 이유다.


농업을 잇길 바라는 아버지의 뜻과 달리 의사가 되어버린 아들, 서울이 더 풍족할지라도 아들을 따라 자신이 평생 일궈온 터전을 버리고 떠날 수 없는 아버지- 이 둘의 갈등 관계는 명확하고도, 각자의 삶 전체가 얽히어 있어 복합적이다. 작품 전반은 아들의 시선으로 전개되는데, 그의 시선 속 땅을 어떻게든 지키고 일구어가는 아버지는 구시대적이며, 미련해 보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는 둘의 대화가 시작되는 부분에서 전복되고 만다. 그 변위가 「돌다리」가 본격적으로 사랑스러워지는 지점이다.


자식의 젊은 욕망을 들어주지 못하는 게 애비 된 마음으로도 섭섭하다.
그러나 이 늙은이한테도 그만한 신념쯤 지켜 오는 게 있다는 걸
무시하지 말아다오.


아들은 아버지의 땅에 대한 마음을 미련 혹은 우둔함으로만 생각했을 테다. 하지만 땅이란 단순히 그런 것만이 아니었다. 땅은 하늘의 선물이며, 가족을 지탱해온 든든한 어깨였고, 감사와 보살핌의 대상이었다. 그런 땅을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늙어서도 져버릴 수 없는 아버지의 단단한 소명이었다. 아들이 의사가 된 이유도 그러한 소명 때문이며, 그것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조금 다를 뿐, 쉽게 무너질 수도 없고 무너뜨려서도 안 되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었고, 이렇게 얘기한다.


우리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십니다.


강한 소명을 지닌 두 사람은 그렇게 ‘결별의 심사’를 체험한다. 하지만 그건 결코 이별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화해다.




다리는 이쪽과 저쪽을 이어준다. 다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두 세계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 한 세계가 다른 세계에 흡수되어버린다면 다리는 더는 필요없을 테다. 즉,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 서로가 서로의 세계를 온전히 지켜가도록 하는 것- 그것이 현명한 관계일 테다. 둘의 결별은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선택이다.


아들이 떠나간 뒤, 아버지가 돌다리 주변에서 서성이는 것은 그리움 때문일 것이오, 그럼에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다시 돌아올 아들을 위해 다리를 관리하는 것- 그것은 사랑이 성숙한 덕일 테다. 그 성숙한 사랑을 통해 투박하고 미련해보이던 아버지가 단숨에 숭고한 존재가 되었다. 당신의 야트막한 뒷모습이 떠오르며 가슴이 절로 웅크러드는 것이 느껴졌다.



성숙은 희생과 같다. 숭고한 것이지만, 동시에 쓰고 쓰리고 쓸쓸한 것이다. 성숙이라는 그 슬픈 기다림이 너무 늦지는 않기를 바란다. 사랑은 무한할지라도 사람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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