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녕 높이있는가.
나는 정녕 높이 있는가
백석, 『사슴』 독후감상문
백석, 『사슴』, 더스토리, 2019, 160면.
『사슴』 : 1936년 1월 20일 자가본(自家本)으로 발행한 시집이다.
『사슴』 에는 총 33편의 시가 4부로 나뉘어 수록되어 있다.
1부 ‘얼럭소새끼의 영각’에 〈가즈랑집〉·〈여우난곬족(族)〉·〈고방〉·〈모닥불〉·〈고야〉(古夜)·〈오리 망아지 토끼〉 등 6편
2부 ‘돌덜구의 물’에 〈초동일〉(初冬日)·〈하답〉(夏畓)·〈주막〉(酒幕)·〈적경〉(寂境)·〈미명계〉·〈성외〉 등 9편
3부 ‘노루’에 〈산비〉·〈쓸쓸한 길〉·〈머루밤〉·〈노루〉 등 9편
4부 ‘국수당 너머’에 〈절간의 소이야기〉·〈오금덩이라는 곳〉·〈정주성〉(定州城)·〈통영〉(統營) 등 9편이 각각 실려 있다.
『사슴』 의 판권지 상단에는 ‘詩集(시집) 사슴 百部 限定版 定價 二圓(100부 한정판 정가 2원)’이라고 표시되어 있으며 그 하단에는 ‘著作兼 發行者 白石(저작 겸 발행자 백석)’이라고 되어 있다.
이 글에서 소개하는 시집은 2019년 <더 스토리>에서 발간한 것으로, 『사슴』 에 수록된 원래 시 외, 다양한 백석의 시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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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예술가의 뮤즈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흥미롭다. 모든 존재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과 닮아가는 법. 그러니 당신이 사랑하는 혹은 그러했던 것들의 별자리를 차근차근 따라가다보면 당신의 우주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테다.
영화 <동주>의 초반부에 윤동주 시인께서 백석 시인의 시집을 설렘 가득한 표정으로 읽는다. 그 시집이 아마 『사슴』의 필사본이었던 것 같다. 그 모습은 깜짝 선물을 받은 어린 아이처럼 순수해보였다.
이제는 예술가와는 조금 멀어져가는 나 역시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초판본과 자필 원고본 디자인을 구했을 때 그런 표정을 지었을 테다. 온기를 흡수하고자 오랫동안 껴안고 향기도 맡았다. 물론 공장에서 찍어낸 복제품들 중 하나였겠지만, 그땐 정말로 윤동주 시인의 땀내와 사랑내가 났다. 내가 사랑하는 시인이 사랑하는 시인, 백석. 시를 잊어갈 쯤에야 다시금 그의 시집을 읽는다. 시인다운 향기가 난다.
『사슴』 속 백석의 시들은 모두 고고했다. 낡은 사원처럼 포근하고 깊고 높고 편안했다. 다시금 깨닫는다, 시인의 숙명은 사랑하는 것들을 안아주는 것, 그들이 자신을 찢어내도록 기다리는 것, 그 피 중 가장 진한 방울만을 종이 위에 떨어뜨리는 것. 시가 죽어가는 세대 속에서 여전히 짙은 백석의 우주는 잠겨 죽어도 좋을 만큼 깊고 뜨거웠다. 동주와 비슷한 열기를 느꼈다고 생각하니 절로 슬픈 미소가 지어졌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그중 가장 뜨거웠던 구절이다. 안도현 시인의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라는 시작법 책에서도 인용했었는데, 그 전문을 읽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랑하는 존재와 보내는 처음은 언제나 절절한 법이다.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하다‘ 사이에 ’높고‘를 끼워 넣었다. 그 한 단어로 인해 세계가 확장되고, 차갑던 것이 따뜻해졌다. 아무나 갈 수 없고, 가지도 않는 길을 가는 나는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했다. 전공 수업은 따라가지도 못하겠고, 나와 같이 걷던 친구들도 하나 둘 침식되어갔다. 매일 외롭고 심심한 밤을 맞이하며, 뭐라도 먹어야 잠이 드는데, 가난하기에 하루에 한 끼만 먹어야 버텨낼 수 있었다.
백석은 그런 내가 높이 있는 것이라 말해주었다. 가장 거대한 위로를 건넨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러한 것은 하늘이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나조차 귀히 여기지 못하는 나를 하늘이 사랑한다는 말은 터무니 없지만 강력한 주문이 되었다. 한 줄 시로 높이 서게 된 나는 세상과 하늘과 나와 백석을 사랑하게 되었다.
얼마나 높고 뾰족한 삶을 살았길래 이런 시를 쓸 수 있던가. 자연스레 그의 생애를 찾아보았다. 백석이 다니던 오산햑교의 선생이었던 독립운동가 조만식은 그를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아는 백석은 성적이 반에서 3등 정도였으며
문학에 비범한 재주가 있었다.
특히 암기력이 뛰어나고 영어를 잘했다.
회화도 썩 잘해 선생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백석은 나이가 어렸지만 용모도 출중하고 재주가 비범했다
백석은 부친을 닮아 성격이 차분했고, 친구가 거의 없었다.
나와 비슷한 부분들이 보여 괜히 미소가 지어졌다.
6.25 전쟁 이후 고향과 가족들이 있는 북한으로 넘어간 백석은 "사상과 함께 문학적 요소도 중요하다"라고 주장하며, 북한 김일성 정권 아래 사상만을 중요시하는 문학에 저항하였다. 이로인해 숙청되며 이후에는 문단에 나타나지 않고, 산골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이를 보며 내가 사랑하는 그들과 참 많이 닮았다 생각했다. 시가 변질되는 것을 괴로워하면서도 취직이 잘 된다는 이과에 가고, 이제는 창업을 꿈꾸며, 자본주의의 최전선에 앞장서려는 내가 서글퍼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조금 다르다고, 예술의 영역에서 가치를 파는 일이라고- 변명도 해보았지만, 자기기만까지 하는 추악함이 피부를 뚫고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게 뭐가 나쁜 건데 되물을 깜냥도 생겨버렸다. 지원금을 빼돌리자고 제안했던 내 입에서 나온 악취가 아직도 생장중이다.
윤동주의 시가 거대한 원석이라면, 백석은 이를 정교하게 깎아낸 다이아몬드인데, 나는 무엇일까.
맑지도 크지도 않은 돌덩어리에 불과한 나는 매번 이런저런 질문들로 스스로를 도려내지만 그럼에도 다시 생장한다. 전보다 더 크게 생장한다. ’죽지 않을 만큼 자살 시도를 하는 일은 참으로 숭고하다‘고 썼던 나는 죽지 않을 만큼만 그래왔던 것이다. 이제는 도려내는 일도 거의 하지 않는다. 이렇게 글 쓸 때나 그런 척 하는 것이다. 지금 담배를 피며 무표정으로 글을 쓰고 있다. 뭐라 써야할까 한참 고민하다가 하던 대로 얼마전까지 달려온 관성대로 쓰는 것이다. 진심 어린 고뇌도 뭣도 없다.
돈독도 독과 같다. 나와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품었던 것인데, 어느새 나 역시 중독되고 말았다. 이런 내가 과연 높은 걸까- 다시금 물어본다.
추악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