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함은 선물일까, 불행일까?
예전에 한 회식자리에서 '예민함'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이 주제가 나온 스토리에 대해 설명하자면 당시 우리 회사는 매월 지정석, 자율석 중 원하는 자리를 선택할 수 있었다. 나는 출근할 때마다 자리를 지정하는 것이 번거로웠기에 매번 지정석을 선택했다. 책상 위 물건을 옮길 필요가 없다는 것도 편했다. 자율석을 선택한 사람들은 매번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앉을 수 있어서 대부분의 직원들이 만족하는 제도였다. 선택좌석제의 단점은 단 하나. 팀원 간 실시간 소통의 어려움이었다.
일반적인 사무실을 떠올려보면 팀별로 좌석이 붙어있고 좌석 사이사이 파티션으로 개인 간 자리를 구분해 놓은 형태다. 그래서 실시간 대화가 자유롭다. 동료가 자리를 뜬 게 아니라면 자리에서 바로 이야기가 가능하다. 하지만 선택좌석제는 지정석과 자율석 구역이 다른 공간에 위치해 있는 경우가 많다. 팀원 A가 지정석에, 팀원 B가 자율석에 있다면 소통을 위해서는 누구 한 명이 다른 팀원의 자리로 가거나, 따로 미팅룸을 예약하거나, 메신저를 이용해야 한다. 방법은 많지만 내 옆에 바로 동료가 있는 것보단 불편하다. 그래서 우리 팀은 중요한 프로젝트를 함께 하거나 잦은 미팅이 필요할 때는 팀 지정석에 모여 일을 하곤 했다. 그러면 이전보다 분명 업무의 진전이 빨라짐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바로 옆에 있기에 동료의 기분이나 감정도 잘 느껴졌다.
출근 직후, 옆 자리 동료의 표정이 어둡거나 한숨을 쉬고 있으면 나에게도 고스란히 그 감정이 전해졌다. 동료에게 말을 건네면 어떠한 이유로 업무에 막힘이 생겨서일 때가 많았다.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땐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그러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유독 나는 편치 않음을 느꼈다.
그 회식자리에서 이러한 주제의 이야길 하다 나도 모르게 하소연 비슷한 말을 내뱉어 버렸다. 당시 나 또한 과중한 업무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할 일은 쌓였는데 성과는 뚜렷하지 않은 반복된 상황에 지쳐가고 있던 때였다. 이건 그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나로서는 스스로에게 책임을 돌리는 게 가장 간편하고 빠른 답이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힘들어지는 건 나였다.
"저 예민해서 그런 거 잘 느끼거든요.."
"야, 다 예민해"
누군가의 한마디가 나에게로 날아와 꽂혔다. 상대의 말에 나쁜 의도는 없었을 테지만, 다 예민하고 힘든데 '왜 너만 그런 것처럼 말하냐'는 것처럼 들렸다. 그땐 모두가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을 때여서 의도치 않게 서로를 향해 날 선 말이 튀어나왔다. 다음날 아침, 술기운에 취해 감정적이고 경솔한 표현을 해 버린 데에 후회했다. 어쩌면 상대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상황에서 내가 어떤 감정과 기류를 느꼈다면 상대도 비슷하게 느꼈을 확률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표현을 모두 하지 않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 이후로 '예민함'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성격을 표현하는 말 중 예민하다가 있다. '예민하다'는 무언가를 느끼는 능력이나 분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빠르고 뛰어나다, 자극에 대한 반응이나 감각이 지나치게 날카롭다, 어떤 문제의 성격이 여러 사람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중대하고 그 감각의 처리에 많은 갈등이 있는 상태에 있다 등을 뜻한다. 유의어로 민감하다, 까다롭다, 좋은 표현으로는 섬세하다 등이 있다.
감각에 대한 과민한 감지를 느끼는 이들은 본인 감각을 처리하느라 뇌가 분주하기 때문에, 상대를 배려한다거나 상황을 판단하거나 하는 시간이 때로 늦게 찾아오므로, 통상 얼핏 보면 쌀쌀맞아 보인다거나, 차가워보인다거나, 거리감을 두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어느 자리에 올라 나이가 있어도 예민한 감각을 다듬고 다듬어 보유한 분들을 생각해 보면, 설사 부드러워 보이는 분들도 상당히 까칠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일상 속에서 사람들이 흔히 예민하다고 말할 때는 대체로 좋은 의미로 쓰지 않는다. '너 좀 예민한 것 같아', '제가 좀 예민해서요.'와 같은 표현은 예민한 사람은 '보통의 사람과 다르게' 유난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선천적으로 '예민함'을 타고난 사람들은 자극에 대한 감각을 처리하는 와중에 의도치 않게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예민하다는 걸 알아차린 건 초등학교 고학년 때였다. 학교생활을 하면서, 내가 친구들보다 교실 환경이나 외부 자극에 더 강하고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느꼈다. 교실 뒷문에서 담임 선생님이 걸어오는 소리를 누구보다 먼저 들었다. 평소에도 온도나 습도, 공기의 맑고 탁한 정도 등 주변 환경의 변화에 빠르게 반응이 온다. 조금만 춥거나 더워도 옷을 껴입거나 벗고 한 여름에도 에어컨이 빵빵한 실내에 들어가면 금방 추워져 얇은 가디건을 가지고 다닌다. 누군가와 마주 앉아 대화를 할 때 상대의 표정과 무의식적인 반응이 빠르게 캐치되고 그에 맞게 대화를 이어가기도 한다.
하지만 나를 처음 보는 사람이거나 알게 된 지 오래되지 않은 사람들은 내가 예민한 편이라는 걸 거의 눈치채지 못한다. 왜냐하면 겉으로 보기에는 무던해 보이고 말과 행동도 그다지 민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나를 둘러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일일이 신경을 쓰고 민감하게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어떤 중요한 선택에 기로에 있다거나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오히려 둔감하다고 보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단지, 긴 호흡에 걸친 상황이 아닌 순간의 자극과 변화에 대한 감지는 빠른 것이다. 생활 속 많은 경우에 이러한 예민성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해 왔기 때문이기도 할 테다. 나의 예민함 때문에 혹시라도 상대에게 편치 않은 느낌을 전해주고 싶지 않았다. 가끔은 상대를 배려하느라 스스로에게는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길 조심하며 더욱 조여 맸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가장 예민함을 느끼는 건 '사람과의 관계'에서다. 내가 한 말이나 행동에 대해 상대가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한다거나, 반대로 상대의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된 새로운 자극에 대한 내 감각을 처리하느라 제때에 적절한 반응이나 답을 해주지 못했을 때 상대가 혹시나 무안함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불안해한다. 하지만 이미 적절한 타이밍은 지나간 이후다. 이럴 땐 나의 지나친 예민함과 재빠르지 못한 나의 반사신경을 원망한다.
일을 할 때 이러한 예민함은 종종 장점과 단점으로 작용한다. 주위를 감지하는 감각이 뛰어나다 보니 분위기의 흐름을 금세 파악하고 미리 필요한 문서를 준비한다거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적절한 도움을 줄 수 있다. 서류 작업을 할 때도 누락된 부분이나 논리적인 맥락에 맞지 않는 포인트를 금방 찾아내 실수를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간혹 이렇게 사소한 부분은 그냥 넘어가도 될 텐데 그대로 넘어가지 못하는 스스로가 피곤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정확한 일처리에는 분명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예민함이 단점으로 발현될 때는 확실히 더 피곤해진다. 업무 중 누군가가 내 자리 주변을 지나가며 모니터를 보고 간다거나 나를 향한 시선이 반복적으로 느껴질 때는 그 순간이 감지되어서 신경이 쓰이고 업무에 집중이 깨져버린다. 정작 상대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친 것이거나 본 것일 텐데 과민하게 느끼다 보니 그조차 달갑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타인의 감정과 반응에 따라 나의 말과 행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옆자리 동료나 상사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면 괜히 나도 기분이 다운되고 '나 때문은 아니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보고할 타이밍을 놓친다거나 하는 식이다. 사무실에서 항상 기분이 좋은 게 더 이상하고 상대의 기분은 개인적인 일에 영향을 받아서일지도 모르는데 그 감정과 분위기가 온전히 나에게 전이되는 것이다. 이럴 때는 정말이지 예민한 성격이 피곤하다고 느낀다.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예민함은 주위의 상황과 사람들에 영향을 많이 받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을 때는 나도 금세 좋은 영향을 받아 그들의 장점을 흡수하기 위해 애썼고 그렇지 못할 때는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스스로 그 막을 깨지 못하고 안주하고 있었던 과거가 떠올랐다. 그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는데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그랬다. 그때는 스스로 보이지 않는 막을 깨고 나갈 용기가 없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더 흐른 지금, 여전히 두렵고 아직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는 나지만 그래도 조금은 껍질을 깨고 나갈 용기가 더 생긴 것도 같다. 망설임 없이 그 막을 깨고 나갈 수 있을 때, 예민함을 '섬세함'이라는 장점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말한다. 예민함이란 자극을 더 많이 받고, 자극에 더 크게 반응한다는 특징일 뿐 좋고 나쁨, 옳고 그름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 스티브 잡스, 아이작 뉴턴, 윈스턴 처칠, 슈만, 타이거우즈 등도 예민한 성격을 가졌다고 한다.
예민함은 선물일 수도, 불행일 수도 있다. 상황에 따라서 혹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다르다. 나는 '단점'에서 '장점‘을 찾으려 애쓰고, 때때로 닥치는 곤경을 나만의 방식으로 조율해 나가는 중이다. 예민함에는 나름의 힘이 있다. 그건 예민한 사람이 가지는 독특함으로 발현될 수 있다. 예민함을 자신만의 선물이자 재능으로 여기고 활용해 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