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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원 Jun 30. 2024

20살, 그때 그 시절 함께했던 친구들

대낮에 소고기 굽는 모임

첫 계 모임을 했다.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 만난 과 동기 5명이 정기 멤버다. 어느덧 12년 전인 2012년 우린 풋풋한 20살이었고 고3 시절을 막 벗어나 새로 만난 세상이 그저 신기하고 즐겁기만 했다. 우린 '새내기배움터'라고 하는 새터에서 처음 만났다. 새터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 보통 2월 말 즈음에 2박 3일 동안 엠티를 가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단과대와 학과 동기, 선배를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기 때문에 그 당시 나도 새터를 가기 전 걱정과 설렘, 기대에 부풀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새터에서 만난 우리는 모두 다른 성격과 개성을 가졌지만 합이 잘 맞았다. 거의 대학생활 내내 함께 울고 웃었다. 때로는 별 것도 아닌 일로 얼굴을 붉히기도 하고 며칠이 지나고 또 화해하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몰려다녔다. 1학년 1학기 공강 시간에 막걸리와 파전을 먹고는 오후 수업을 들어가 꾸벅꾸벅 졸기도 했고 시험 기간에는 중앙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하자며 한 명이 학생증을 모두 들고 좋은 자리를 맡아 주었다. 그땐 공부할 마음도 별로 없었으면서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뭘 하든 즐거웠다.


공부를 하다가 잠깐 쉰다는 핑계로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1시간을 수다만 떨기도 했다. 또 어떤 날은 전공 공부가 너무 어려워서 안 되겠다며 책을 덮고 친구들을 모아 학교 앞 포차에서 술을 마시고 막차를 타고 집에 갔다. 그렇게 한 학기를 신나게 논 덕분에 처음 받아 든 성적표는 처참했다. 그래도 이때가 아니면 언제 또 마음 놓고 놀겠냐며 합리화했고 여름방학 때 더 열심히 놀았다. 그래서 2, 3학년 때 성적을 복구하느라 몇몇 수업은 다시 들어야 했지만 그 시절에 친구들과 다시없을 추억을 쌓은 건 지금도 후회되지 않는다.






우리를 더 끈끈하게 엮어준 건 무전여행 동아리 활동을 함께한 거였다. 신입생 동아리 가두모집 때 여러 동아리를 놀러 갔는데 그중 하나가 무전여행 동아리였다. 무전여행이라고? 진짜로 무전으로 여행을 하는 건가?라는 호기심이 일었고 나는 여행다운 여행을 해본 적도 없는 20살이었는데도 여행이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설렜다.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어 보이는 영어회화 동아리나 봉사 동아리와는 다르게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막상 경험해 보니 그야말로 사서 고생하는 동아리였는데 경험해 보기 전엔 그 사실을 몰랐다. 나는 친구들을 꼬드겨 저 동아리에 같이 가입하자고 했다.


"저기 재밌어 보이지 않아?"

"무전여행? 무전으로 여행이 가능해?"

"그야 모르지. 해볼까?"

"일단 오티를 가보자"


그렇게 우리는 동아리 오티에 갔고 다양한 과에서 우리처럼 호기심과 기대감에 부푼 신입생들이 모였다. 누가 봐도 인싸 같은 애, 엄청 똑똑해 보이는 애, 착하고 조용해 보이는 애, 신입생답지 않은 능청스러움을 가진 애.. 정말 다양했다. 어떤 과나 동아리, 조직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새로 들어오는 신입생을 기대하고 맞이하는 선배들은 특유의 친절함과 적극성을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신입생이나 대학교 2학년이나 다 어리고 비슷하다고 여겨지지만 그때는 1년 선배가 엄청 크게 느껴졌다. 그래도 1년 먼저 학교 생활했다고 1학년인 우리에게 이것저것 알려주려는 것도 많았고 잘 챙겨주려고 하는 선배들도 많았다. 가두모집을 위해서였거나 햇병아리 같은 신입생에게 흑심을 품고 그런 것이었을 수도 있지만 우린 사실 그때 진짜로 아무것도 몰랐다.


오티에서 동아리 소개와 활동 내용, 선배들의 인사를 듣고 뒤풀이를 갔다. 테이블을 돌아가며 서로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술을 조금씩 마시기 시작하자 자리는 더 무르익었다.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놀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귀가했다. 그렇다. 그날 하루가 너무 즐거웠다. 이후로 우리는 종종 동아리방에 갔고 동기, 선배들과 조금씩 친해졌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첫 MT를 갔다. 조별로 히치하이킹으로 MT 장소까지 가야 했다. 우리는 도로변에 서서 팔을 도로 쪽으로 뻗고 엄지손가락을 들어 힘차게 흔들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차는 쌩 지나치기 일쑤였다.


'이래서 언제 목적지까지 도착해?'


라는 생각으로 힘이 빠질 때쯤 한 승용차가 우리 앞에 섰다. 앞 좌석 창문을 내린 한 중년의 아저씨가 학생들 어디까지 가냐고 물었다. 우리는 청도로 간다고 말했고 자신도 그쪽 방향으로 가는데 그 중간까지 태워주시겠다는 거였다. 힘차게 감사하다고 인사한 후 뒷 좌석에 탔다. 아저씨는 젊은 학생들을 보니 자기 아들 또래로 보여 차를 세웠다고 했다. 알고 보니 중년의 남성은 다른 대학의 교수라고 했다. 난생처음 모르는 사람이 태워주는 차를 타는 호사스러움을 누리고 있으니 아직 세상엔 친절한 사람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감동과 감사의 감정이 찡 와닿았다. 감사하다고 연신 인사를 드리는 것 말고는 이를 달리 전할 방법이 없었다.


한 번 히치하이킹에 성공하고 나니 이것도 운과 흐름이라는 게 있는지 연이어 좋은 분들을 만났다. 한 번은 경찰차를 타고, 또 한 번은 작은 트럭 뒤 짐칸에 타고 숙소까지 도착했다.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기쁨과 '경찰차와 트럭을 다 타보다니?' 하는 우쭐함이 섞여 몸이 피곤한 줄도 몰랐다. 조금 힘들어도 동기들과 실없는 농담 몇 번이면 그저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새내기 시절의 8할은 이때 만난 친구들과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함께하면서 크고 작은 이야기들을 공유했고 많은 추억을 쌓았다. 이들을 떠올리면 20살, 풋풋함 같은 단어들이 같이 생각난다.






세월이 12여 년 가까이 흐르다 보니 자연스레 많은 것이 달라졌다. 취업 시기는 달랐지만 모두 어엿한 사회인이 되었다. 신기하게도 전공을 살려 일하는 친구는 1명뿐이고 나머지 4명은 모두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데 식품 회사, 영양사, 경찰, 물류 유통까지 분야도 직무도 다양하다. 자신에게 맞는 길은 있다더니 나와 너의 미래를 걱정하던 시절은 차츰 멀어졌고 이제 모두들 금요일이 제일 좋고 일요일이 가장 싫은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특히나 달라진 건 결혼여부와 라이프스타일이다. 5명 중 2명의 친구는 결혼을 했고 나머지 3명은 미혼이다. 결혼한 2명 중 1명은 몇 개월 전 임신 소식을 전했고 그녀는 이제 두 달 후면 예쁜 딸을 출산할 것이다. 언제까지나 철이 들지 않을 것만 같던 우리가 벌써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는다니. 새삼스럽게 낯설었다. 출산을 앞둔 친구는 예전 그 무전여행 동아리에서 만난 동기와 10년을 연애했고 작년 봄에 결혼했다. 친구의 장기 연애를 옆에서 지켜보며 어린 시절에 만나 한 번도 변치 않고 오래 마음을 나누고 신뢰를 쌓아온 그 시간이 참 애틋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 다 너무 좋은 사람들인 것을 잘 알기에 친구의 앞날을 진심으로 응원하게 되었다.


결혼한 나머지 한 명의 친구는 우리 중 가장 먼저 결혼을 했다. 야외 예식장에서 환하게 웃던 친구의 얼굴이 아직 눈에 선하다. 결혼을 했어도 아직 20살 그 시절에서 가장 안 변했다며 만나면 놀리기 바쁜 우리지만 기혼자와 미혼자는 많은 것이 달랐다.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결혼을 한 친구들은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무엇보다 1순위였고 전보다 조금 더 안정감이 느껴졌다. 막상 다르다고 느낄 줄은 몰랐는데 모이고 나니 그게 보였다. 나를 포함한 미혼들은 생활 전반에서 상대적으로 더 자유로웠고 그 대신에 연애나 결혼을 해치워야 할 숙제처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친구 중 한 명은 골프에 푹 빠져서 시간만 나면 스크린 골프장에 가거나 라운딩을 간다고 했다. 또 나머지 한 명은 친구들과 여행을 가거나 시간을 자주 보냈다. 물론 나도 일주일에 4번은 헬스장에 가고 2번은 필라테스를 하며 시간이 날 때마다 공연이나 연극, 영화를 본다. 금요일이나 토요일에는 친구를 집에 초대해 새벽까지 놀기도 하면서.


취미와 생활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대신에 어떤 공허함을 가지고도 있었다. 좋은 연애 상대를 찾는 데에 피로함을 느끼고 주말마다 지인들의 결혼식에 가다 보면 인생의 여정에 혼자만 뒤처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내 주변 친구들도 최근 하나둘씩 결혼 소식을 전했다. 우리라고 언제까지나 같이 놀 순 없겠지만 생각보다 혹은 나의 애꿎은 기대보다 일찍 결혼 소식을 전해 들으니 마음 한편이 허해졌다.


나는 결혼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앞으로 내 삶에서 결혼이나 육아라는 이벤트가 있을지도 잘 모르겠지만 친구들이 하나둘씩 울타리를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건 많은 생각과 감정을 들게 한다. 자연스럽게 변해가는 상황들이 다행스럽기도, 서운하기도, 낯설기도 하다. 그다음엔 출산과 육아의 길로 들어서냐 아니냐로 나눠질 것이다. 나는 연애나 결혼을 하지 않으면 대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루트에서 동떨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함 혹은 두려움보다는 조금씩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바뀜에 따라 친구와의 관계가 멀어질까 봐 더 두렵다. 이러고 내일 돼서 '나도 남들이 모두 가는 길로 가야 할 것 같아'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기에. 하지만 그 미래가 아직 그려지지 않는 지금의 나로서는 이 마음이 더 진심이다.






우린 12시에 한 소고기집에서 만나 대낮부터 한우 생갈비를 구웠다. 맥주와 콜라로 잔을 채우고 20살 때처럼 짠을 했다. 그간 모은 계비를 크게 쓸 심산이었다. 모두가 첫 잔을 호기롭게 비웠다. 육즙이 살아있는 소고기를 한 점 먹고 향긋한 맥주로 상큼하게 입 안을 적셨다. 오! 이 맛이군. 이런 게 지상낙원이지 싶었다. 왜 예전에 개그콘서트라는 프로그램에서 인기를 끌었던 한 코너의 대사가 떠올랐다.


'00(좋은 직장, 결혼 같은), 그거 다 필요 없는기라. 돈 많이 벌면 뭐하겠노, 기분 좋다고 소고기 사묵겠지"


이 대사가 무한반복되며 그저 모든 것을 소고기로만 생각하는 어르신이 나온다. 궤변처럼 들리지만 어쩌면 진리다. 열심히 일 해서 돈 많이 벌고 기분이 좋아져 소고기를 사 먹는 것.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한 몸 열심히 굴려서 소고기를 사 먹을 수 있다는 게 행복이 아니면 무엇이 행복일까. 그것도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장장 1시간 반 동안이나 서로의 근황과 안부를 전하며 식사를 한 우리는 부른 배를 두드리며 주변 카페를 검색했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하다 싶지만 그래서 더 즐거웠다. 언제 만나도 그때 그 시절처럼 철없이 굴 수 있으니까 말이다.


10분을 걸어 도착한 카페에서 수플레와 커피를 시켰다. 2차로 또 한 바탕 수다를 쏟아냈다. 집들이 투어를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고 보니 모두들 독립을 했고 자취를 하거나 올해 말에 입주 예정인 친구도 있었다. 게다가 우린 사는 곳도 모두 달라 집들이 투어만 해도 재밌겠다고 깔깔댔다. 어느덧 느지막한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자리가 파했다.


그렇게 헤어지는 길에 인생네컷을 찍었다. 평소라면 내가 먼저 가자고 제안하지 않을 곳이었지만 기껏해야 1년에 1, 2번 보는 우리이기에 이런 날은 사진으로 남겨두어야 했다. 사진을 예쁘게 찍는 법 따윈 모르는 사람들이어선지 포즈도 제각각. 망했다를 외치며 사진을 출력했다. 막상 보니 그래도 보정한 것처럼 나왔다며 한 장씩 받아 들었다.


돌아가면 우린 다시 저마다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시간은 흐르고 변화는 어떤 식으로든 계속된다. 다행스러운 건 어린 시절과 달리 이제 잔잔한 변화에 몸을 맡기고 조금은 유연하게 대처할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마음만은 20살일 수 있는 친구들이 함께라는 사실은 언제나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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