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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원 Jul 07. 2024

엄마는 역에 오면 슬프다고 했다

만남과 헤어짐에 대하여

기차역과 정류장, 전철 승강장, 공항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어딘가로 이동하기 위해 이동수단을 타는 플랫폼인 동시에 만남과 헤어짐의 장소다. 이곳은 항상 어딘가로 향하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오는 이를 마중하거나 떠나는 이를 배웅하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 친구, 연인을 보고 반가움을 감추지 못한다. 그 후 즐거운 시간도 잠시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기 전 못내 아쉬움을 뒤로한 채 떠나는 이의 모습에 눈을 떼지 않고 손을 흔든다.


만남에는 항상 헤어짐이 뒤따른다. 헤어짐이 있기에 또 다음 만남이 있다. 이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나 모든 헤어짐의 순간은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 미묘한 감정이 있다. 아쉬움, 애틋함, 그리움, 고마움 같은. 나를 배웅하기 위해 이곳까지 동행해 준 이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보낸 시간들에 대한 즐거움과 아쉬움, 다음 만남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애틋함, 아직 헤어지지 않았지만 그 사람이 벌써 그리워지는 듯한 마음이다.


예전에는 만남과 이별로 대변되는 이 장소들에 대해서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기차역과 공항 같은 곳은 나에게 새로운 곳으로 떠나기 위한 장소로 인식되어 있어서 이별보다는 시작, 출발, 설렘과 같은 단어들이 먼저 떠오르곤 했다. 그러다 나에게도 기차역이 처음으로 슬프고도 애틋한 장소가 되었던 일이 있었다.






어느 평일 오후, 오후 수업을 빠지고 엄마와 기차역에 갔다. 그날은 남동생이 첫 100일 휴가를 나오는 날이었다. 동생이 군대에 가기 전에는 걔가 군대에 가도 별로 특별할 것이 없을 것 같았는데 막상 입대를 하고 나니 그렇지가 않았다. 낯선 곳에 가서 적응은 잘하고 있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불쑥불쑥 걱정이 되었다. 남동생을 군에 보내고 나서 초반에는 하루하루 걱정에 잠 못 드는 엄마를 보고 있노라니 덩달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인터넷 편지를 2번인가 썼다. 너가 나중에 이 은혜를 꼭 알아야 된다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100일이 지나 첫 휴가를 나오는 날이 되었다. 엄마 혼자 동생을 마중 보내는 게 마음에 걸렸고 나도 빨리 동생을 보고 싶은 마음에 같이 역에 마중을 갔다. 평소에는 같은 집에 살면서도 그렇게 생각도 나지 않던 애가 한순간에 애틋해질 수 있다는 게 웃프지만 그땐 그랬다.


기차 도착 시간이 다가왔고 엄마와 나는 역에 도착한 사람들이 나오는 곳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군복을 입고 군화를 신은 동생이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쟤가 저렇게 늠름했었나.라고 생각한 순간 동생은 우리에게 다가오다 말고 문을 지나 반쯤 걸어오더니 중간에 우뚝 멈췄다. 그리곤 군가인지 뭔지 모를 이상한 노래를 우렁차게 부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노래를 부르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룩주룩 났다. 나도 내가 왜 우는지 몰랐다. 마냥 어린애 같던 동생이 언제 저렇게 씩씩한 군인 아저씨가 되었나 하는 생각과,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을까 하는 안쓰러움, 사람들이 이렇게 쳐다보는 데 부끄럽지도 않나 하는 생각이 뒤섞였다. 울면서도 나는 핸드폰 카메라로 동영상을 찍었다. 이것도 언젠가 추억이 되겠지, 그리고 나중에 놀려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동생은 엄마와 내가 우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정면만 응시한 채 더욱 소리 높여 노래를 불렀다. 주위 사람들의 이목이 동생과 우리에게로 집중되었다. 그 이상한 노래가 끝나자 같이 휴가 나온 선임으로 보이는 사람 몇몇이 휘파람을 불었다. 동생은 엄마와 나를 만나고도 그 노래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와 엄마도 묻지 않았다. 나는 그 선임 중 하나가 시킨 거라 혼자 짐작하고 말았다. 그게 아니라면 그 넓은 공공장소에서 그럴만한 이유가 없었다. 그 이후 나는 동생이 휴가를 나올 때의 반가움, 복귀할 때의 아쉬움을 몇 번 더 느꼈다. 동생의 면회를 2번 정도 갔고 시간이 지나 무사히 전역했다. 동생의 군생활을 나는 모르지만 그 가족의 입장이 되어보니 모든 군인 아저씨들에 대한 존중감 같은 게 생겼다. 물론 그때도, 지금도 군인 동생들이지만 병역 의무를 다하는 것은 아무리 국민의 의무라 하더라도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그때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그 후로 나에게도 많은 만남과 헤어짐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대학시절 만난 남자친구와의 기억이다. 캠퍼스 커플이었던 우리는 그때 그 시절에만 할 수 있었던 것들을 함께 하며 소소한 일상을 보냈다. 수업을 같이 듣고 공간 시간엔 학교 벤치에 앉아 별 것도 아닌 일로 까르르 잘도 웃었다. 점심시간에는 5천 원짜리 분식집에서 점심을 먹고 산책을 했다. 수업이 끝나고는 영화를 보고 만화방엘 가고 고기가 먹고 싶으면 무한리필 대패 삼겹살집에 갔다. 그때는 무한리필 고깃집도 맛있었다. 뭘 먹어도 맛있고 뭘 해도 즐거웠던 시간들이었다.


학생이었던 우리는 데이트를 하고 헤어질 때 반대 방향의 버스를 타야 했다. 당시 남자친구는 항상 내가 타는 버스를 기다려주었고 무사히 올라타는 것을 보고서야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이 어찌나 아쉽게 느껴졌는지. 어차피 내일 보거나 못해도 일주일 뒤에는 볼 텐데 그걸 알면서도 애틋했다. 그와 함께 스쳐간 수많은 버스 정류장들은 헤어짐의 또 다른 감정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리고 꽤 시간이 지나 언제까지나 함께 할 것 같았던 우리의 연애도 종지부를 찍었다. 그와의 마지막 장소는 전철역이었다. 이별의 아픔이 무엇을 말하는 건지 이때 처음으로 느끼게 된 것 같다. 이별의 장소는 어디든 아프고 슬프지만 그게 역이나 승강장일 때 왜 더 그 감정이 배가 되는지 더욱 와닿았다.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시간이 지나면서 도무지 치유될 것 같지 않던 이별의 아픔도 서서히 무뎌졌다. 이후 새로운 만남과 이별이 몇 번 더 있었다. 이별은 이미 겪어봤다고 해서 적응이 되거나 더 잘하게 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매번 또 다른 아픔과 그리움, 때로는 후회 같은 것을 남기게 했다. 하지만 이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잊혀갔다. 지금도 잘 이별하는 것 따윈 모르고 앞으로도 알 길은 없을 것 같지만 그저 시간을 견디는 법을 배워가는 것 같다.






재작년 가을 즈음 이직을 이유로 상경한 나는 기차역에 가는 일이 더 많아졌다. 3~4개월에 한 번 본가에 가는 KTX를 탔고 며칠 고향에서의 시간을 보낸 뒤 다시 서울로 가는 KTX를 탔다. 나는 난생처음 서울 생활을 함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취를 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독립적인 성향이어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름 서울에서의 생활이 잘 맞았고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으며 할 것도 놀 것도 많은 그 거대도시가 좋았다. 물론 업무에 치일 때는 놀 거리가 많은 게 무슨 의미가 있었겠냐마는 그래도 시간이 여유로울 때는 주말에 홍대, 이태원, 압구정 같은 곳을 놀러 다녔고 맑은 공기를 쐬고 싶을 때면 집 근처 관악산을 올라가기도 했다.


본가에 갈 때마다 새로운 서울 생활이 만족스러우며 꽤 잘 지내고 있다고 엄마에게 얘길 해도 다행이라고 하시며 뒤에는 꼭 한 마디 덧붙인다.


"그래도 고생이지."


나와 남동생이 모두 상경한 뒤로 엄마는 더욱 적적함을 많이 느끼시는 듯했다. 아빠와도 여전히 사이가 좋고 종종 주말엔 드라이브와 등산도 가시지만 자식들이 떠난 빈자리를 유독 아쉬워하셨다. 나와 동생이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날 기차역에서 엄마의 감정은 배가 된다. 부모님은 서울로 다시 올라갈 때 매번 기차역까지 차를 태워주셨고 기차를 타고 자리에 앉는 것까지 지켜보고서야 돌아가시곤 했다. 그 순간만큼은 아무렇지 않았던 나도 뭔가 모를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걸 들키면 더 마음이 안 좋으실 것 같아 더 밝은 척하며 인사를 했다.


"나는 이상하게 역에 오면 슬프더라

니랑 00가 떠나는 걸 자주 봐서 그런지.."

"엄마 떠나긴 뭘 떠나? 또 올 텐데"

"그렇지. 그래도 가니까 아쉬워서 그렇지"


엄마는 정도 눈물도 많은 사람이었다. 항상 자식의 소식과 안부를 궁금해하면서도 괜히 신경 쓸까, 일에 방해될까 싶어서 일주일에 1번 같은 날에 전화를 걸었다. 무심한 딸인 나는 그걸 알면서도 이런저런 핑계로 먼저 전화를 하긴커녕 걸려오는 전화를 겨우 받고는 퉁명스레 대답하곤 했다.


그 후로 기차역은 나에게도 애틋한 장소의 이미지가 더해졌다. 나는 기차를 타고 가면서 창밖을 내다보는 것을 좋아해 창가 좌석을 선호하는 편인데 기차가 역에 정차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헤어짐이 아쉬워 손을 놓지 못하는 연인, 떠나는 친구를 배웅하는 모습, 씩씩한 군인, 커다란 캐리어를 든 사람..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남겨진다. 만남과 헤어짐이 교차되는 그 모습은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작년 12월, 나는 다시 고향에 돌아왔고 그 뒤로 기차역에 갈 일은 확연히 줄었다. 그리고 엄마와 나는 2~3주에 한 번씩 만나 밥을 먹고 수다를 떨고 시간을 보낸다. 이십 대 중반에 독립한 이후로 가장 자주 만나는 것 같다. 가까이 있더라도 여유가 없거나 여건이 되지 않으면 자주 만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이제는 잘 안다. 요즘 엄마와 나는 친구 같은 사이로 지낸다. 그간의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데 감사하다. 하루를 알차게 놀다 헤어지는 발걸음이 이제는 가뿐하다. 내키면 언제든 서로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앞으로도 남은 생에 아마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이 기다리고 있겠지. 그중엔 벅찬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만남도, 깊은 슬픔과 애잔한 헤어짐도 있을 테다.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면 그 과정을 거치며 조금씩 더 짙어지고 여무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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