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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Jul 02. 2022

소리가 멈춘 곳에 핀 꽃

현직 교도관의 고백.  [어느날, 살인자가 말을 걸어왔다]


"안하세요. 전 교도소에서 일하는 교도관입니다. 반갑습니다."


여러 사람이 있는 강의실에서 내 소개를 마쳤다. 내가 서있는 강의실 양쪽 벽에는 '사랑의 대화', '수화는 언어다.'라는 문구의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회색빛이 감도는 교도소, 구치소의 풍경이 익숙한 나에게 수화 교육원의 강의실 내부는 낯설었지만 그간 푸석했던 내 마음을 희석시킬 정도로 이곳 사람들의 표정이나 분위기는 환하게 느껴졌다. 내 소개를 들은 사람들은 잠시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이내 큰 박수로 나를 맞이해주었다. 소개를 마치자 내 옆에 서있던 수화통역사는 나를 바라보며 손짓했다.

"손가락을 이렇게 해보세요. 이건 ㄱ, 이건 ㄴ, 이건... 여러분도 같이 따라 해 보세요."

나는 어색한 손동작으로 수화통역사의 수어를  따라 했다. 그리고 인생 처음으로 내 이름을 수어로 소개할 수 있었다. 그때 느꼈던 뿌듯함은 수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내 마음에 남아있다. 입으로 내뱉는 소리가 아닌 손과 몸짓, 표정으로 커뮤니케이션이 된다는 사실이 실로 놀라웠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사실 큰 포부를 안고 전화로 문의했을 때와는 달리 처음 수화 교육원을 방문했을 때 나는 쉽게 교육원의 정문을 열고 들어가지 못했다. 새로운 배움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나의 무지로 인해 농아인 분들에게 실례를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컸던 게 사실이다.

"저도 배울 수 있을까요...?"

쭈뼛쭈뼛 말을 거는 나를 보며 이곳 사무실 직원께서 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요! 초급반부터 차근차근 시작하시면 됩니다. 교도관님이시죠.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교도관님은 어떻게 수어를 배울 생각을 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직원분은 교도관 일을 하는 분이 교육을 받으러 온 것은 처음이라며 다소 호기심이 어린 표정으로 초급반 교육신청서와 볼펜을 건네주었다.

"전 범죄피해자분들을 상담을 통해 도움을 드리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어요. 어느 날, TV를 보다가 범죄피해를 보신 농아인께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걸 보고..."

교도관이 되고 이 세상 한구석엔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의 슬픔이 존재한다는 것을 목격했다. 그 이후로 나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 없을지 찾아 나섰다. 한 번은 교정시설에 수감된 아버지를 보러 온 어린 아들이 수어를 통해 면회를 진행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저 어린아이가 부모의 부재로 인해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했지만 기본적인 수어를 몰랐던 나는 그 아이에게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던 답답한 경험을 한적도 있다.


"공감과 경청. 이 두 가지가 대화의 기본 요소입니다."

나는 학부와 대학원 석사과정 모두 상담심리학을 전공했다. 내가 전공한 '상담심리학'과 '수어'는 많이 닮아있다. 상대방의 몸짓과 표정을 보며 감정을 공유하고 말을 주고받는 면에서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르지 않다. 어를 배우고 농아인 분과 처음 대화를 할 때도 '공감과 경청'은 역시 인류의 모든 대화방식에서 공통점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초급반과 중급반 수어 교육을 수료했다. 하루 8시간 가까이 진행된 수업이었지만 농아인 분들의 문화를 배우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그 과정 동안은 정말 시간이 가는지 모를 정도로 인상 깊었다. 말 뿌듯했던 건 중급반 종강 날 농아인 분들 앞에서 내 직업인 교도관에 대해서 수어로 얘기하고 많은 동료 교도관 직원분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사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농아인 분들께서도 소방관, 경찰관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교도관의 직업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며 응원의 목소리를 내어주셨다. 리고  이야기를 들은 동료 교도관께서도 도움을 드리고 싶다며 수화 교육원에 후원금을 지원해주셨다. 음엔 단순히 봉사를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수어 배우기는 점 내 인생에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으로 번져나갔다. 그렇게 우리는 한 공간에서 한 마음으로 각자의 인생을 응원하며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았다.


시간이 흘러 내 결혼식이 있던 날, 농아인 분들과 수화통역사분께서 축하를 하러 와주셨다. 그분들은 처음 수화 교육원에서 쭈뼛하던 나를 맞이 해주셨을 때와 똑같이 환한 미소로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축하한다는 수어와 함께 두 양팔을 올려 하트 모양을 만들었다. 말없이 나를 보며 웃는 그분들의 진심은 나에게 수천, 수만의 말들보다 더 가슴 깊이 울리며 다가 왔다. 연 이 순간 말이 필요할까. 그분들의 환한 얼굴을 보며 나도 대답했다.


"저도 많이 사랑하고 응원합니다."


마음과 마음이 닿는 곳에서 우린, 소리의 울림보다 훨씬 큰 마음의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코로나 탓에 어려움도 많았을 우리 모두 하루빨리 마스크를 벗고 서로를 마주 보며 다시 한번 그 환한 미소를 보고 싶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

아내와 나는 지금도 맥주 한잔을 마시며 종종 수어를 배울 때의 기억을 꺼낸다. 당시 수화 교육원 앞 화단에는 분홍 달리아 꽃송이가 풍성하게 피어있었다. 그 꽃처럼 아름다운 마음을 지닌 그분들에게 배운 그 환한 미소를 나도 누군가에게 다시 돌려드릴 수 있도록, 그리고 세상의 편견과 불편함에 아픔도 많았을 그분들의 앞날에 따뜻한 은총만이 가득하길 바라며 눈을 감고 마음을 담아 두 손을 모아 본다.


'모두 잘 지내시죠? 참 많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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