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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Aug 02. 2023

달콤한 비극

주저흔#2

 적어도 15년은 족히 됐을법한 목재 장롱과 엄마의 화장대가 놓인 틈 사이로 기타가 하나 세워져 있었습니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진짜 공부 열심히 할게요. 편식 안 할게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무려 7개월에 걸친 조르기로 받아 든 선물이었죠. 6개의 줄에서 각각 만들어내는 선율, 줄을 튕기면 진동을 만들어내고 그 진동이 공기 분자들을 흔들면서 소리를 일으키는 이 경이로운 과정은 얼마나 과학적이면서도 예술적인가요. 록커 김경호의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 (1997)'을 따라 부르며 기타를 안고 있는 제 모습이 마냥 좋았습니다. 사실 전 지금도 기타를 치진 못합니다. 그저 TV속에 나오는 가수들의 모습이 멋져 보였고 마침 동네 사거리 모퉁이에 있는 음악사 쇼윈도어 걸려있는 그 기타는 당시 어린 제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엄마가 제게 기타를 사주신 이유는 공부나 편식이 아니었었죠.


너한테 너무 미안해서...


우리 집 가계사정이야 뻔했습니다. 공장생활에 치이고 치인 아버지와 생활고라는 날카로운 바람에 깎이고 깎인 엄마와의 마찰은 전쟁을 방불케 했죠. 언성은 높아지고 날선말들이 오갔습니다. 가끔은 부족한 세간살이마저 벽으로 날아와 꽂히거나 산산조각이 나기도 했죠. 단칸방에 사는 형편이나 보니 피신할 곳 없이 그 장면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부모님이 싸우는 곳에서 다섯 발자국 떨어진 방구석에 가서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거나 만화책을 펼치곤 했습니다.


서울지하철 7호선이 경기도권에 연장발표가 나면서 사거리는 항상 공사로 인해 부산했어요. 음악사 사장님은 매장 바로 앞에 역이 들어선다는 것이 그리 좋으신지 싱글벙글하셨지만, 예정보다 완공일이 길어지다 보니 심기가 영 불편한 듯 보였습니다. 바로 옆 스포츠의류매장 사장님의 표정도 불편해 보이는 건 마찬가지였어요. 계획대로라면 이미 2년 전에 들어서야 할 지하철이지만 아직 출입구도 만들어지지 않은 걸 보니 최소 2년은 더 가게 입구의 번잡스러움을 견뎌야 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엄마는 그 스포츠의류매장 사장댁 파출부로 일했습니다. 사장댁은 걸어서 15분이면 출퇴근이 가능했고 4시에 퇴근할 수 있는 다른 일은 찾기가 쉽지 않았죠. 점심시간에 짬을 내서 저희 형제의 밥을 차려놓고 갈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고 하셨어요. 학교에서 돌아와 현관문을 열면 항상 하얀색 밥상보가 씌워진 반찬거리들이 저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장댁에는 저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동갑내기 아들이 한 명 있었습니다. 파출부는 예전에 식모라고도 불렸다죠. 누군가의 아들에게 밥을 차려주고 빨래를 대신해 주느라 정작 자신의 아들에게는 양육의 부재가 생기게 되는 잔인한 현실. 하지만 그렇게 해야지만 집 월세를 메꿀 수 있는  현실에 대고 더 이상 치기 어린 불평만 쏘아댈 순 없었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투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몇 번의 전학으로 전 항상 기존의 세력에겐 이방인이었고 튀거나 밑 보이면 바로 타깃이 됐습니다. 제 뒤통수를 향해 지우개를 던지거나 일부러 시비를 거는 애들도 있었죠. 그럴 때마다 전 입술이 터지고 코피가 흐를 때까지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순간 자리를 피한다던가 적당한 처신으로 상황을 모면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어요. 집으로 간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진 않았습니다. 밀린 월세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된 밥상머리에서의 대화는 10년 전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한 사소한 문장들까지 소환시켰죠. 그렇게 전 항상 투쟁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미술 선생님이 '가족그림일기'를 만들어오라는 과제를 내주었습니다. 저날 저녁 밥상을 펴서 스케치북에 마, 아버지, 형과 저. 4인가족의 모습을 그려 넣었습니다. 버지의 이대팔 가르마와 엄마의 뽀글 파마머리, 나보다 10센티는 더 큰 키의 형과 까무잡잡한 까치머리의 내 모습까지, 그 옆에는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 피어오르는 집도 그려 넣었습니다. 집의 명패에는 '행복이 가득한 우리 집'이라는 글자도 새겨 넣었죠. 집보다 더 큰 사과나무도 빠트리지 않았어요. 우린 로 으르렁거릴 때도 많고 가난에 지쳐 허덕일 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닭백숙을 먹을 땐 서로 살이 많은 부위를 먹으라며 건네는 모습을 떠올리며 '그래도 가족밖에 없다.'라는 생각을 하니까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습니다.

다음날 학교에 먼저 온 친구들이 수업시작 전 스케치북을 꺼내 그려온 그림들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제 옆자리 송석진이 그려온 그림을 빤히 쳐다봤습니다. 송석진의 아버지는 변호사였고 어머니는 약사였죠. 멋진 양복을 입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과 초고층높이의 아파트, 제 그림에 비해 선도 더 진했고 색도 다양했습니다. 제 그림은 사람도 작게 그렸고 나무의 기둥과 뿌리도 얇고 보잘것없었어요. 앙상한 가지가 애처롭게 겨우 바람을 버티고 있는 듯했죠.

"너도 그림 보여줘 봐." 

반 친구들의 시선이 일제히 제 얼굴로 향했고 그 순간 항상 봐오던 아버지의 회색 작업복과 파출부일을 하는 어머니의 앞치마를 그려 넣은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림... 깜빡하고 안 가져왔어." 

거짓말을 했어요. 화장실을 간다고하고 교실밖으로 나와서 신발장밑에 제 스케치북을 깊게 밀어 넣었습니다. 완전한 인멸이었죠.

가족그림일기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단 앞에 나와 손바닥을 맞으면서도 제 머릿속엔 온통 부럽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부러웠던 건 그 친구들의 멋들어진 그림이나 부모의 직업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와 비슷한, 아니 더 형편없는 그림임에도 아무 거리낌 없이 그림을 꺼내 들며 웃는 그 용기. 어쩌면 그 아이들에겐 열등이나 비교 따위의 인식조차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족그림 숙제는 경쟁이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저와는 너무나도 다른 그 모습이 부러웠던 것이었죠. 


그날저녁, 저가족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런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하는 아버지와 엄마는 갈치살을 발라 제 밥 위에 얹혀주었습니다. 스러운 마음에 이 점점 뜨거워지자 나오지도 않는 하품을 억지로 끄집어냈습니다. 반주를 마친 아버지가 장롱옆에 기대 있던 기타를 집어 들고 김광석의 '어느 노부부의 일기'를 부를 때, 전 누워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덮어썼습니다.

취기 어린 아버지의 음색은 달콤했지만 우리가 내몰린 사정은 비극이었어요. 달콤함과 비극이라니, 이 상충된 두 가지의 단어처럼 힘들지만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에 코끝이 시큰해지는 하루. 그날의 하루는 참으로 달콤한 비극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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