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 해 볼래요?

완장의 위력, 사라진 딸

by 얄리

창업 맴버, 남이 이미 갖추어 놓은 틀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틀을 만들어 가고 싶은 사람들이 탁자에 둘러 앉았다. 나 역시 그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 새로운 고객을 만들기 위해 경쟁사보다 두배를 준비해 제안에 임했고 두배의 빈도로 일을 수주하지 못했다. 할 수 있으리라고 믿게 만들 레퍼런스가 우리에게는 없었다. 하다가 파산하지 않으리라 여겨지는 자본도 넉넉치 않았다. 오직 거부할 수 없을 정도의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뛰어난 시각화 능력을 보여주는 시안'만이 고객의 불신을 깰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될 것이다. 더 생각하고 더 생각하라. 디자이너라면, 너도 나도 그리해야 한다.


힘들지 않았다.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머리를 싸메고 파일을 만지는 일은 그 자체로 행복이었다. 집에 돌아가는 시간이 점점 늦어졌다. 눈을 감았다 뜨면 퇴근과 출근이 모두 생략된 채 나의 자리에 앉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분이 오시는 날이 많았다. 오실 때 잡아서 파일에 모셔 두어야 했다. 일이 재미있으니까 몸개그나 농담도 시의적절하게 구사하게 된다. 주변이 킥킥댄다. 매우 뿌듯하다. 이전 회사에서 죄책감을 느끼며 퇴사했던 것은 생각해보면 잘한 일이다. 나는 옳은 선택을 했다. 아주 잘.


팀장, 해 보지 않을래요?
부담이 되면 거절해도 괜찮아요.


일 보기를 연인보듯 하는 나에게 그 제안은 올 것이 온 것이었다. 주변은 어깨를 툭툭쳤고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하겠다는 뜻이었다.




퇴근 시간은 전보다 더 늦추어 졌다. 팀원들과 분담한 나의 시안을 마치고, 팀원들이 각자 올려 놓은 시안을 검토하며 수정할 것들을 정리하려면 전보다 더 시간을 쓸 수 밖에 없다. 다음날 시안을 잡았던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수정할 포인트를 알려준다.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수정하려니까 내키지 않아요? 아니면 어떻게 수정하라는 지 감이 잘 안 와요?" 물어 본다. 그건 아니란다. 그녀는 회사에서 내가 친하게 지내는 언니였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내게 화가 나 있는 듯 했다. 내가 그녀에게 지시를 하는 상황이 되니까 내 말에 따르기 싫어진 걸까? 몸 참겠다. 그녀를 따로 부른다. 옥상으로.


왜 그래요? 선임님
나한테 무슨 불만있어요?


묻기만 했는데 그녀가 울음을 터트린다. 당황스럽다. 담배를 피우러 올라왔던 실장님이 상황을 보고 멈칫한다. "와! 벌써 팀장이라고 군기 잡는 거예요?" 그는 바로 자리를 피한다. "언니 나하고 친했잖아요. 그러면 언니가 여기서 나를 가장 잘 도와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왜 가장 먼저 까칠하게 대해요? 내가 수정사항 말하는 게 못 마땅해요? 동생이라서?" 한참을 울다가 그녀가 입을 연다. "아니 그런게 아니라 네가 너무 멀게 느껴져서 그랬어. 전에는 농담도 잘하고 내게 이것 저것 말도 잘 걸더니 지금은 일만 얘기하잖아" 그녀의 말이 맞았다. "미안해요.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어요." 다가간다. "내가 여전히 네게 친한 언니인 것은 맞는 거지? 비록 회사 안에서는 네가 팀장님이지만" 물러선다. "그럼요. 그러니까 저 좀 도와줘요. 언니" 이제 언니에게 솔직하게 털어놓는 동생은 될 수 없을 거 같다. 그래도 농담은 해 보려고 노력하겠다.




준비한 시안을 고객 앞에서 발표해야 한다. 팀장이니까 내가 해야 한다. 그런데 온몸이 떨리고 현기증이 난다. 고객과 함께 바라보는 화면 속 글자가 흔들린다. 입을 열지 못한다. 낌새를 눈치챈 실장님이 내가 가지고 있던 마이크를 낚아챈다. "며칠 밤을 새며 일을 해서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네요. 어제 잘 자고 온 제가 진행하겠습니다." 좌중이 웃음바다가 된다. 더러는 내게 안쓰러운 눈빛을 보낸다. 챙피하다. 아니 화가난다. 나는 이제 팀장인데 이게 다 뭐람.


처음엔 다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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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려서 그랬던 게 아니었어요.


사실 아침에 확인한 최종 시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프로젝트의 시안을 잡고 있어 내가 미쳐 깊이 관여하지 못했던 탓에 스스로 흡족할 만큼의 완성도가 확보된 시안이 나오지 않았다. 더군다나 내가 수정하라고 했던 것 마저 놓쳤다. 시안에 오류를 발견하는 순간, 끝까지 완벽하게 챙기지 못한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내가 챙기지 않았다고 해서 다시 한번 점검하고 반영하지 않은 팀원들도 미웠다. 하지만 나도 시안을 잡아야 했다. 당신들도 나도 똑같이 24시간을 산다. 시간을 더 얻어낼 수 없다면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완성도를 포기하거나, 내가 시안을 잡는 것을 포기하고 완성도에 집중하거나.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나의 시안도 많은 프로젝트의 일부일 뿐이다. 일부를 포기하고 나머지를 챙기는 게 팀장이 할 일이다. 이제 디자인을 직접하는 것은 놓아야 할 거 같다. 나도 시안을 잡고 싶지만 욕심이다.




프로젝트의 수주가 늘어났다. 시안을 잡는 일은 줄어든 반면 수주한 프로젝트의 실제 페이지를 디자인할 일은 많아졌다. 업무량이 폭주한다. 고객의 의견을 수렴하고 실무자에게 전달하는 일, 전달된 것을 고객에게 어필하는 일, 관련 협업자와의 마찰을 중재하는 일, 길어지는 투입에 지친 팀원들을 다독이는 일, 고객 클레임이 걸리면 수습하는 일, 팀원들이 모두 맡은 일이 있어서 더 이상 처리할 수 없는 일들을 가져와 땜빵하는 일. 모든 일이 내게로 몰린다.


팀장님, 이거 어떻게 해야 되요?
팀장님, 이거 다음에는 뭐해요?
팀장님, 이거 잘 안되요. 못하겠어요.


나도 모른다. 나도 다 처음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적어도 함께 고민을 해 주어야겠다. 아니 일단 고민해 볼 테니까 먼저 퇴근해라. 혼자 남는다. 생각한다. 또 생각한다. 따르르릉.


지금이 몇 시인데 안 들어와
김서방은 벌써 들어왔는데 작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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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까지 왜 그래. 정말


짜증이 난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지만 집으로 나선다. 돌아가는 길에도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일들로 머리 속이 혼잡하다. 뭔가 생각이 날때마다 메모장을 꺼내 적는다. 오직 일 밖에 없다. 내 머리 속은.




어쩌다 쉬는 주말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요일표는 '월화수목금금금'이 되어 있었다. 정말 예외 케이스다. 시안도 프로젝트도 동시에 딱 맞게 끝났다. 점심때가 다 되도록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아무도 나를 깨우지 않았다. 잠결에 된장찌게와 제육볶음 냄새가 잠을 깨웠다. 배가 고픈 것도 느껴본 지 참 오랜만이었다.


며칠 전에 병원에 갔다 왔는데
젊은 의사가 겁을 주데
빨리 큰 병원에 가 보라고


엄마는 의사들이란 다 환자들에게 겁부터 주고 시작한다고, 이전에도 큰병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고, 인간들이 왜 그러냐며 신경쓸 것 없다 하신다. 신경이 쓰인다. 하지만 일이 없는 날이 없다. 오늘은 예외일 뿐이다. 그래도 병원에는 가 봐야 할 것 같다. "내가 회사에 말하고 해야 할 일을 좀 마무리할께. 조금 기다려 줄 수 있지? 엄마" 그럴 필요없다고 알아서 할 테니 걱정마라고 하신다. 그래 좀만 기다려. 회사에 사정을 이야기하고 며칠을 부지런히 정리해서 내가 자리를 비우는 사이 각자가 할 일을 알려준다. "금방 돌아올께요. 조금만 고생해줘요" 팀원들과 윗분들은 걱정하지 말고 어머니 모시고 병원 잘 다녀오라고 위로한다. 그럴께요. 수고해줘요.




보이시죠? 이미 다 전이가 됐어요.
엑스레이 상으로 장기가 구분이 안되요.
췌장액에 다 녹아 들러 붙은 겁니다.


절망적이었다. 엄마의 상태는. 장기가 엉겨 붙어 거대한 덩어리처럼 보이는 엄마의 엑스레이는 일한다고 정신을 다 팔아버려 사랑하는 가족의 삶이 녹아내리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딸의 매정한 심장을 짓이겨 놓았다. 모든 것이 일시에 멈춰 버렸다. 엄마를 입원시키고 회사에 결과를 알렸다. 입원한 엄마는 매일 여러 가지 검사를 받기 위해 끌려 다녔고 나는 엄마 옆에서 수발을 들었다. 급기야 대장 내시경 검사를 위해 장을 비워낸 엄마는 정신이 혼미해져 몸을 가누지 못했다. 검사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통로가 막혀 있어 관을 더 이상 삽입해 관찰할 수 없는 지경이었기 때문이었다. 검사를 중단하고 실려 나온 엄마의 옷을 갈아 입혀 드리려고 몸을 안아 올렸다.


우리 딸이 고생이 많네. 고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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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긴 뭐가 고마워


병원에서는 항암제 투여가 무의미한 상태라 고통을 줄여줄 수 있는 진통제만 처방할 수 있다고 했다. 한달이 조금 넘은 입원을 종료하고 집으로 엄마를 모셔왔다. 자신의 방에 드러 누운 엄마는 수시로 일어나 앉아 끙끙 앓고 있었다. 엄마의 방으로 들어간다. "가서 자. 해 줄 건 없어" 엄마의 다리를 주무르다 남편이 잠든 방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엄마방을 오가는 일을 되풀이 한다. 모든 것이 내 탓이다. 회사에서 야근을 하고 들어와 퍼질러 잘 일이 아니었다. 좀 더 일찍 귀가해 엄마의 방에 들렸어야 했다. 늦은 시간에 라면 국물만 사라지고 건데기는 그대로 남은 사발면 그릇을 눈여겨 봤어야 했다. 엄마가 점점 말라가는 것이 나이가 들어가는 이유라고 흘려 보내면 안되는 거였다. 시안이 뭐가 중요한가? 프로젝트가 뭐가 그리 대단한가? 팀장이 된 것과 내가 엄마의 딸인 것은 별개다. 그런데 나보다 항상 일찍 들어온 남편은 왜 몰랐을까? 자신의 어머니라도 그랬을까? 하긴, 딸도 제대로 보살피지 않는 엄마를 사위가 무슨 마음으로 보살필 수 있었을까? 원망은 나에게로 남편에게로 다시 나에게로 옮아가고 있었다. 견딜 수 없이 모든 것이 녹아내렸다.




엄마는 집에서 채 두달을 버티지 못했다. 급격하게 병을 앓았고 급격하게 돌아가셨다. 남편이 출근해 버린 빈 집. '나와 그가 출근한 빈 집에 엄마는 지금의 나처럼 덜렁 혼자 남겨졌겠구나' 싶었다. 정신없이 일하는 딸에게 자신의 병을 알리지 못한 채 의사가 준 겁을 꾸역 꾸역 삼키고 있었겠구나. 빈 집에 남아 있는 것은 고통이었다. 빈집이 아니라 감옥이었다. 큰 죄를 지은 나를 가두는 감옥. 견딜 수 없는 죄책감을 머리 속에서 지워야 했다.


출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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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만큼 시간을 써요.
모친상 지낸지 얼마 안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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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괜찮아요.
쉬는 게 더 괴로울 것 같아서요.


나는 할애해 주는 시간보다 더 일찍 복귀를 해 버렸다. 그리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일이 몰리는 팀장으로 돌아갔다. 퇴근 시간은 조금도 빨라지지 않았다. 죄책감은 내게 말을 걸지 못했다. 틈이 없었다. 어차피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나쁜 딸이 속죄할 길은 애시당초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잊어라.






팀장, 해 보지 않을래요?
딸 말고. 아내 말고


엄마의 상태도 살피지 않고 일에만 매달렸던 것은 정말 바보 같던 일이었다. 팀장이라는 완장이 딸이라는 관계를, 아내라는 관계를 떼고 붙여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말 바보 같은 일이란 그것만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슬픔에 머무는 것, 충분한 애도의 시간. 나는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그 애도의 시간을 내 삶에서 순삭시켜 버렸다. 그리고 속죄할 수 있는 시간도 함께 없애 버렸다. 모든 것을 기억 저편으로 날려 버리고 일이라는 방패를 내 앞에 더 바짝 세워 놓았다. 일은 모든 걸 잊게 했다.


엄마의 장례식장, 대표님은 근무했던 회사의 사람들을 거의 털어 오다 시피해서 그곳을 찾았다. "내가 온 마음을 다 바쳐서 일한 댓가가 없는 것은 아니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없는 빈 집에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을 때마다 그들이 보였다. 위안이 되었다. "비극만 있었던 시간은 아니었어" 나에게 회사는 비극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통로였다. 돌아가야겠다. 그곳으로. 나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이것은 내가 자신과 계약한 십년의 댓가로 내 영혼을 갈아 넣는 첫 번째 일에 불과했다. 사람은 절대, 같은 실수를 한번만 저지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