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십년만 해보는 거야
네트워크 회사에 기생하듯 자리를 차지한 온라인사업 회사, 사장을 빼고는 프리랜서 PM과 디자이너 1명 그리고 프로그래머 1명 이렇게 4명이 고작이던 그곳에서 나는 일을 시작했다. 공공기관의 웹사이트를 구축해 주는 일이 주된 업무였는데, 온라인이 아직 활성화되지 않았던 때라 하드웨어 장비를 구입하면 서비스로 사이트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고객과 주로 대면할 PM, 그 다음에는 사이트가 돌아가게 만들어 줄 수 있는 프로그래머. 디자이너는 '이왕이면 이쁘게'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던 시절. 사이트에 올려질 정보의 양이 조금씩 늘어나면서 로딩속도에 민감해지자 페이지 내의 디자인 요소들을 축소하는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었다. 사장은 은근히 내게 눈치를 주었다. PM이 고객으로부터 수집한 요건들을 말로 전하면 사이트의 구조와 화면을 설계하는 것은 나였지만, 당시에 그 일이 기획이라는 업무로 구체화되기 전이라 흔히 생략된 것으로 보여졌다. 나는 그저 몇 개의 사각 구멍을 이미지로 메우는 존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앞으로 디자이너는 없어도 되지 않을까? 들릴 듯 말듯 웅얼웅얼.
속도가 빨라져서 뭐든지 올릴 수 있으면요?
기술력의 차이도 좁혀지면 그때는요?
보여지는 게 중요해 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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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때고. 당장 그러는 것도 아니잖아?
미래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고 싶으면
대기업을 가시든가.
대기업을 추천한다는 말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건 갈 능력도 안되는 나에 대한 조롱이었다. 그날부터 조용히 디자이너 구인 정보를 뒤지기 시작했다. [최소 3년 이상 쇼핑몰 구축 유경험자 0명] 대기업의 공고 중 그나마 웹디자이너에 속하는 구인은 그거 하나였다. 이제 '1년 4개월 된, 공공기관 사이트 구축 유경험자라고 하기에도 뭣한 초짜 디자이너'였던 나에게는 어느 것 하나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 없었다. 사장이 나를 조롱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냥 조용히 입 닫고 있을 걸 그랬나?'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업질러진 물이다.
제안서를 만들기 시작했다. 제시하는 물품은 '나'였다. 몇 개 안되는 프로젝트의 이력을 연대기로 만들었다. 목표로 했던 것을 구조적으로 또는 시각적으로 어떻게 현실화시켰는지, 과정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 향후에 다시 시도할 수 있다면 어떤 방향으로 바꾸고 싶은지 등을 '점점 성장해가는 생각의 흐름도'로 상징화 시켜서 표현했다. "구인하는 기준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지만 가능성을 봐 달라"는 구태의연한 멘트도 낯 간지럽지만 붙여서 지원메일을 보냈다.
대기업의 구조본, 새로운 구상을 사업화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2개의 사업본부 중 하나로 입사하게 되었다. 쇼핑몰 사업부였다. 1주일 전 본사 로비에서 2명의 면접관과 질의답변 형식으로 인터뷰를 봤던 결과였다. 나는 왜 여기에 있게 된 걸까?
근데, 저를 왜 뽑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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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라서, 뽑았지
답변은 명확했다. 분명 조건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고, '아무리 소설을 써도 도저히 연대기가 될 수 없는 객관적 경력'이라는 현실이 있었음에도 무턱대고 지원을 한 그 또라이의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로비에서 만나 사업부가 추구하는 쇼핑몰의 방향성과 디자인의 전략에 대해서 하나씩 물어봤는데 정말 진지하게 정반대의 방향과 전략을 말하더라는 것이다. '또라이인가?' 싶었는데 '상-또라이'였다. 하지만 틀려도 방향은 있으니 그건 가르쳐서 바꿔주면 되고, 어쨌든 진지하게 방향에 맞는 표현방식을 찾으려는 의지는 확고하니 맨땅에 해딩해야 하는 구조본의 스타트업 사업부 일원으로는 쓸모가 있겠다 싶었던 게 채용의 이유였다. 제조사 공장같은 곳에 임시 거처가 마련됐고 사업부는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밥 좀 천천히 먹어.
밥만 먹고 사무실로 바로 들어가지마.
제발 늦게까지 일도 하지말고,
그건 잘하는 게 아니라 무능한 거야
사업부의 수장이 된 부장님은 늘 잔소리를 늘어 놓았다. 일에 미친 상-또라이는 밥 먹는 시간도 아쉬워서 10분만에 후딱 해치우곤 사무실로 휘리릭 사라지곤 했고, 퇴근시간이 지나도 컴퓨터를 쳐다보느라 혼자 덜렁 남겨지는 것도 몰랐다. 한술 더 떠서 늦은 밤에 귀가하면서 작업하던 컴퓨터의 하드를 떼어가기까지 했다. 집에서 마저 손보려는 욕심에 말이다. 일하는 걸 뜯어말려야 하는 직원은 처음이라 했다.
하지만 굳이 부장님이 뜯어 말리지 않아도 될만한 사건이 발생했다. 자체적으로 쇼핑몰을 구축하기 위해 TF를 꾸린 후 몇 개월을 달리던 사업부는 해체되었다. 기업은 이미 갖추어진 회사를 인수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구축 TF는 고스란히 인수한 기업의 일원으로 흡수되었고, 그곳에는 이미 그들만의 방식으로 쇼핑몰을 운영하고 있던 인수된 기업의 직원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상이 반복되었다. MD는 요구를 하고 디자이너는 찍어냈다. 이미 오래 전에 구축이 되어 나름 잘 돌아가고 있는 쇼핑몰에 내가 손을 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몇 개의 사각 구멍을 이미지로 메우는 존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사람. 결국 나는 권태로움과 무기력을 이기지 못하고 사직서를 내고 말았다. 들어갈 때는 1주일이 걸렸는데 나올때는 한달이 걸렸다. 수직적으로 쌓인 윗분들에게 이유를 설명하고 회유를 제고하는척 하다 거절하기를 반복했다. 마지막으로 인사부서 담당자를 만났을 때 너무 지쳐있던 나는 "이제 그만, 묻지 말고 저 좀 내보내 주세요. 힘들어요." 라며 매달렸다. 같은 대기업이라도 구조본의 스타트업 사업부와 이미 틀을 갖춘 운영기반의 거대 조직은 룰이 완전히 달랐다. 결국 탈출하던 날, 나의 수장이던 부장님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어깨를 토닥였다.
내가 원하는 창의적인 디자이너의 길을 걸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이직을 준비하다 '디자인 중심의 웹에이전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포트폴리오와 인터뷰를 준비해 제법 인지도가 높은 에이전시에 입사하게 되었다. 이곳만의 룰이 있긴 했지만 확실히 대기업의 빡빡한 룰과는 달랐다. 특히 나만 홀로 남겨지는 일은 없었다. 모두가 나처럼 일했다. 하지만 그 일상은 얼마가지 않아 테클이 걸렸다. 디자인실의 수장은 독립된 회사를 꾸릴 준비를 마쳤고 부서 내 디자이너들의 대대적인 이탈이 발생했다. 주로 3개의 선택지가 있었다. 카리스마 있던 실장을 믿고 따라가는 것, 부서내에 총망받던 팀장이 옮기는 곳에 합류하는 것, 새로운 수장이 부임할 현재의 회사에 남는 것. 하지만 겨우 6개월 밖에는 함께 지내지 않은 나에게는 3개의 선택지 모두 물음표였다. 뭘 알아야 따라가든 남든 할텐데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는 상태로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버렸다.
지낼 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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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저 오리알 됐어요.
마치 텔레파시를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부장님이 전화를 걸어왔다. 챙피했다. 그 난리를 치고 나갔으면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아야 할텐데 이게 뭔가. 왜 하필 이런 때 전화를 하셔가지고 딱 들키고.
거기서 헤메지 말고 돌아와
좋은 공부한 셈 치고
회사를 꾸려 나가려는 디자인 수장 대신에 발령을 받은 새로운 수장은 회사에 남겠다는 사람을 확보해야 했다. 가급적 많이. 그래서 디자이너 전체를 대상으로 1명씩 집중 인터뷰를 했는데, 먼저 남으려고 하는지를 묻고 나간다면 가려는 방향을 물은 후 생각을 바꾸고 남았을 때 줄 수 있는 기회에 대한 설득이 이어졌다. 내 차례가 되었다. "직전에 근무했던 회사로 돌아가려 합니다." 예상했던 답안지에 없는 답이 나오자 설득하려던 새 수장은 당황했다. 에이전시에서 고객사로 가겠다는 말이었고 생각을 바꿔야 할 근거를 대기 어려운 케이스였다. 설득까지 가지도 않았다.
이혼을 하고 친정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잠시동안은 '내가 그냥 악몽을 꾼 것 뿐이야'하는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잊고 있던 회의감이 다시 몰려 오기 시작했다. '내가 이래서 이곳을 탈출하려고 했던 건데 다시 기어 들어오다니. 미쳤구나. 정말"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이제 어쩌겠는가? 또 나가? 그때였다. 메신저에 익숙한 아이디의 주인이 내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뭐해?" 바로 내가 입사한지 6개월만에 자신의 회사를 세우기 위해 마음 맞는 이들과 창업을 한 디자인 수장이었다. "원래대로 돌아가서 일하고 있죠 (당신 때문에)" 심드렁하게 대꾸를 했다. "재밌어?" "아뇨" 다시 퉁명스럽게 톡을 날린다. "이리로 와. 당신이 필요해"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악몽으로 다시 기어 들어온 것을 후회하고 있는 참이라 구원의 메시지로 들렸던 것이다. 이후 며칠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다시 탈출을 시도할 것인지, 그냥 여기에 남을 것인지 마음이 복잡했지만 고민은 길게 가지 않았다. 고민의 이유는 믿고 다시 불러준 부장님을 배신해야 한다는 죄책감 때문이었지만, 다시 퇴사를 하고 싶다고 고백해 버렸다.
아이고, 답답한 사람아!
왜 두 계단 밑으로 내려 가려고 하니?
왜 인지에 대한 것은 답을 못했다. 내 마음이 이미 떠났다는 것 밖에는 말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처음 나를 보낼 때보다 더 안타까워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꼭 그렇게 전쟁터에서 굴러야만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게 아니야. 늘 그렇게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제발 자신을 혹사시키지마" 그의 시선은 많은 말을 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 나를 잡지는 않았다. 이번엔 어깨를 토닥이는 것조차도 없었다. 죽자고 덤비는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딱, 십년만 해보는 거야!
말씀하신 계단이 뭔지는 모르겠습니다.
남이 만들어 준 계단은 오르지 않을래요.
내가 만들고 싶어요. 그 계단
딱 십년만 해보겠습니다
차마 말로는 하지 못했지만 나는 부장님께 마음으로 이야기했다. 십년, 그건 스스로가 만든 결승선이었다. 1등으로 통과를 하든 그냥 통과만 하든 달려야 했다. 이 날의 내 선택이 실패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절대 무너지거나 멈추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나는 자기자신과 무서운 계약을 한 것이다.
자신의 성격 중에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습관과 강박'은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을 보호하기 위한 '자기방어의 수단'으로 쓰인다. 자신의 약점이 드러날 때,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는 것처럼 본능적으로 반응하도록 이미 스스로가 길을 들여 놓았다. 자신이 맹목적인 선택을 하고 말도 안되는 고집을 부리는 것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 거리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뼈저리게 자각하지 않는 한 그 강박의 시그널은 통제되지 않는다.
먼저 말해 두자면, 나는 스스로 계약한 십년의 약속을 지켰다. 내 영혼을 산산히 갈아 넣어서. 어떻게 갈아 넣었는지는 다음 기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