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낙오자로 살 기회
대학교 4학년 말 이미 건실한 원단 회사의 코디네이터로 취업을 해 있던 나는 회사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사회생활이 처음이라서 그런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가난한 현실 때문에 등록금을 마련해야 하는 것에만 급급했던 나는 겨우 학교를 졸업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고, 졸업과 동시에 취업이라는 공백없는 삶을 이어갔을 뿐이었다. 직업에 있어서 적성이나 비전 따위는 단 한번도 고려해 보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코디네이터의 일이란 자사에서 생산하는 원단이나 수입한 원단을 가지고 고객의 집이나 일터를 방문해 커튼이나 소파 등을 맞춤 제작할 품목 선정을 돕고, 관련된 수치를 직접 측정한 기록지를 가지고 회사로 복귀해 제품을 만들 부서에 전달한 후, 완성품을 다시 고객의 집이나 일터에 납품한 다음 수금을 해 오는 것이었다. 조금의 미적감각이 필요한 영업직이었던 것이다. 반복적이고 단조롭게 돌아가는 회사 생활은 6개월만에 회의감과 후회로 뒤덮혀 가고 있었다.
선배님, 지금 새로운 것을 찾는 건
이미 너무 늦은 선택일까요?
같은 파트의 5년 선배였던 그녀는 나와 비슷한 이유로 퇴사를 했다가 결국 이 회사로 재입사한 이력이 있었고 곧 결혼을 앞둔 예비신부였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담에 비추어 나의 생각이 무모하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돌려서 해 주었다. 함께 입사했던 두 명의 입사 동기에게도 물었는데 "지금와서 영어를 다시 준비할 거야? 아니면 컴퓨터와 관련된 기술을 배울 거야?"라는 답이 돌아왔다. 어느 것도 다시 맨 바닥에서 시작하기에는 만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이미 틀린 길로 들어서 버렸고 어떻게든 이곳에 뿌리를 내리는 수 밖에 없는 것일까?'하는 갑갑함을 느끼던 와중에 아버지의 암이 재발했다는 선고가 떨어졌다. 그나마 버티는 수 밖에 없는 것조차도 내 몫은 아니었던 것이다. 어머니와 나 둘 중에 한 명은 일을 쉬고 아버지의 간병을 해야 했다. 결론은 생각보다 쉽게 났다. 누가 한달의 수입을 더 많이 가져올 수 있는지, 누가 지금 멈추면 다시 일을 얻기 어려운지, 그건 어머니였다. 나는 사회생활에서 반 강제적으로 이탈되었다. 그때만 해도 잠시만 아버지 곁을 지키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냈다. 의사나 간호사가 찾을 때마다 벌떡 일어나 자리를 비켜줘야 했고, 아버지가 시키는 심부름을 하거나 집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가져다 주는 일의 연속이었다. 마치 병든 닭처럼 이상하게 눈을 뜨고 있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졸음이 쏟아졌다. 때때로 몸살에 시달렸다. 주변의 어르신들은 "젊고 팔팔한 아가씨를 오늘 내일 하는 사람들 안에 묶어 두니까 기가 빠져 그런다"고 안쓰러워 하셨지만 대신할 사람이 없는 나로서는 시간을 흘려 보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병원에 머물렀던 아버지가 퇴원을 하시고 이제는 탈출을 하나 싶은 마음에 해방감을 느끼는 것도 잠시 나라는 이상한 기운으로 들썩이기 시작했다. 한국은 외환위기가 아니다. 기다. 말이 많던 끝에 이름만 대도 누구나 알 거대한 기업들의 부도 소식이 줄을 이었다. IMF, 국가도 부도가 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내가 겪었던 사회생활에서의 반 강제적 이탈, 이것은 개인의 일이 아니라 대다수 젊은이들의 일이 되어 버렸다. 나는 돌아갈 곳이 이제 아무데도 없다. 젊은이들의 희망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하루에도 몇 개씩, 아니 몇 십 개씩, 아니 몇 백개씩.
이 집 딸도 그렇지? 우리도 그래
이게 뭐 지들 탓인가
일 자리에 대한 건 말도 못 꺼내
지들 속은 더 할 텐데, 안 그래?
갈 곳이 없어진 나는 내 방에 들어 앉아 매일 저녁 아주머니들이 모여 떠드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들 중에는 어머니도 끼어 있었다. 이상한 건 이들의 넋두리가 내게는 도리어 위안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도 내게 어서 사회로 나가 달려야 할 때라고 종용하지 않는, 심지어 나 조차도 조바심에 무조건 튀쳐 나가지 않는 그런 시간. 내겐 뭐라 말도 못 꺼낼만큼 속이 더 문드러질 것도 없었다. 일을 하다가 혹은 하려고 하다가 좌절을 한 게 아니라 한동안 못하고 있었던 나였다. 그 무직이 길어지고 있었지만 이건 내탓이 아니라고 세상이 말했다. 철이 들고 난 후 처음으로 누구에게도 쫓기지 않는 시간을 얻었다. 나는 '반 강제적으로 이탈한 자'였다가 '반 강제적으로 휴식을 취하는 자'가 된 것이다. 나도 쉴 수 있구나.
휴식기는 쉽게 끝이 날 것 같지가 않았다. 문득 "지금와서 영어를 다시 준비할 거야? 아니면 컴퓨터와 관련된 기술을 배울 거야?"라던 동기의 말이 떠 올랐다. 만만치 않았던 것은 무엇 하나 준비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는데 이제 남아도는 것이 시간이었다.
이왕 할 거 안 해본 걸 하자
순수미술을 전공하고 별다른 취업 준비를 거치지 않은 채 입사를 해 버렸던 나는 당시만 해도 꽤 높은 비중으로 발견되는 소위 '컴맹'이었다. 모니터의 전원을 켜지 않아 화면에 아무것도 뜨지 않는 것을 컴퓨터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순수한 무식쟁이. 어머니가 구해 온 돈을 들여 학원에 등록했다. 처음 시작한 것은 CAD였다. 뭔가 창의적인 그래픽을 만들고 싶었던 바람과는 달리 설계도면을 완성하는 기계적인 작업이었다. 이어서 3D STUDIO라는 프로그램으로 도스환경에서 돌아가는 입체를 만드는 법을 배웠고 3D MAX로 이어졌다. 여기까지 배운 후에야 나는 비로소 이쪽 길이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좀 더 다이나믹하고 스토리를 담을 수 있는 것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 눈에 띈 것이 Metimedia툴인 MM Director를 활용하여 CD-ROM Title을 제작하는 과정이었다. 드디어 적성에 맞는 것을 찾았다. 이것으로 '한글'이라는 주제를 정해 교육용 CD-ROM Title을 만들었고 소프트웨어진흥원의 공모전에서 입상했다. 이제 이 길로 들어서는 것만 남았다.
원하던 방향은 아니지만 해 볼래?
하지만 그 선택은 잘못된 것이었다. CD-ROM Title 시장은 그때 이미 사양사업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더 이상 뭔가를 배우는 것에 돈을 쓰기에는 한계에 도달했고 어떻게든 회사에 들어가 돈을 벌어야 했다. 어머니 혼자 돈을 버는 것으로는 더이상 가정을 지탱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CD-ROM Title 제작과정의 서브처럼 배웠던 것이 온라인 사이트를 구축하기 위한 강의였다. 주로 선생님이 나눠준 HTML을 뜻도 모르고 배껴 쓰면 화면 안에 텍스트와 이미지가 배열되어 나왔다. 그러면 이미지의 사이즈와 동일한 크기의 이미지를 만들어 덮어써 보거나 텍스트의 일부를 바꾸어 봤다. 선생님이 보여준 원본과 조금 다른 결과물이 화면에 떴다. 내가 온라인 사이트에 관해 아는 건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단지 이것을 해 봤다는 이유로 취업의 자리는 엉뚱한 곳에서 열렸다. 자그마한 온라인 사이트 구축 회사의 웹 디자이너를 뽑는 자리, 나는 그동안 배우면서 만들었던 작업물과 수상했던 CD-ROM Title 결과물을 들고 그곳을 찾았다. 웹 디자이너로서 알아야 하는 기본적인 지식은 부족했지만 프로젝트에 투입되기 전까지 스스로 마스터 해 두겠다는 것을 전제로 채용이 되었다. 실상은 프로젝트에 투입이 되어 있는 동안에 맨 바닥에 해딩을 해 가면서 배워 갔지만 말이다. 밥벌레가 밥벌이를 하게 된 순간이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IMF라는 이름의 휴식, 그건 나에게 있어서 '숨겨진 낙오자로 살 수 있는 기회'였다.
내 삶에서 그 기간만큼 진지하게 하고 싶은 것을 찾아가거나 배우기 위해 깊이 몰입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거나, 회사에서 인정받기 위해 받기 닥치는 대로 일을 할 때가 분명 있었지만 그건 모두 돈을 벌기 위한 것이었다. 모든 것을 정지시켜 놓은 채, 돈을 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일에 매달리는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뜻밖에도 IMF 덕분이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멈춰서야 했던 때라 나의 멈춤에 대한 압박감이 덜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러니 한 일이었다. '운수 좋은 날'의 실체가 그 반대였던 것처럼 내게는 '운수 나쁜 날'이 그 반대였다.
일년 남짓한 시간이었다. 컴맹이 웹 디자이너로 바뀌는 데 걸린 시간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결국 원하는 쪽과는 살짝 빗나간 자리에 안착했지만 좋았다. 내 명함의 직책이 '조금의 미적 감각이 필요한 영업 사원'이 아니라 '웹 디자이너'로 새겨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나는 좋았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절박해서가 아니었다. 단지 그 시간이 내게 너무 재미있던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열심히 하는 것은 잘 하는 것을, 잘 하는 것을 좋아서 하는 것을 이길 수 없다. 그 말은 맞았다.
가끔 생각한다. 만일 나보다 5년 먼저 그 분야의 일을 시작했던 선배의 말을 내가 들었더라면, 영어도 컴퓨터도 '배우는 것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동기의 말을 들었더라면, 불행이긴 하지만 아버지의 병환으로 멈춰서야 하는 것이 없었더라면, IMF라는 거대한 좌절의 시간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다. 아마도 첫 회사에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해 보겠다는 마음은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 이러다가 어디에서도 써 주지 않는 경력 단절자로 남게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 때문에 크게 흔들렸을 것이다. 삶에서 본의 아니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을 빼앗겨 버리는 때가 있다. 하지만 가지고 있던 것을 놓아버리게 되는 상황이 정말 불행이 될지 행운이 될 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고 내가 잡은 기회가 앞으로의 삶에서 늘 기회로 작용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불행인가 싶을 때 행운, 행운인가 싶을 때 불행. 어차피 끝을 예측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