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의 자각 시점

그러니까 내가 뭐랬어? 뭐래니

by 얄리
실장님, 정말 가능하시겠어요?
다 된다고만 하시다 나중에 힘들어져요.
여기서 일단 선을 긋고 가시죠.


위태로워 보였다. 사업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은 그는 고객의 요구사항에 언제나 “가능합니다” 내지는 “반영하겠습니다”로 답하고 있었다. 쇼핑몰 구축에 있어서 구현의 최종단계에 있는 개발영역, 그가 하는 사업은 그것이었다. 앞에서부터 뒤로 갈 수록 요구사항은 불어나고 일정은 밀리기 마련이며 예상 못한 변수가 튀어 나올 것이다. 그래서 무조건적인 수용은 스스로를 절벽으로 미는 것이나 다름 없었지만 그는 선을 긋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떡이고 고객이나 기획자가 내미는 요건들에 흔쾌히 수렴할 때마다 점점 불안한 기운이 감돌았다. 대체 어쩌려고 그러나? 끝을 예상하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그도 다 계획과 능력이 있을 텐테 내가 알 수 없어서 못 미더워하고 있는 것 뿐인가?


제가 알아서 할 께요.
개발은 저희가 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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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그만하죠.


맞다. 오지랖. 나름 프로젝트 많이 해 보고 여러 고객을 만나 보았다고 스스로 생각한 나는,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미리 예측하고 ‘최악의 시니리오’를 머리 속에 그렸던 것이다. 그가 단지 나보다 '많이 젊다'는 이유로, 나보다 '경험이 적다'는 이유로 그를 가르치려 하고 있었다. 엄연히 사업을 하기 위해 만난 관계에서 말이다. 내 개입이 많아질수록 나의 책임도 많아질 일에 굳이 왜 나서서 훈장질을 하고 있을까? 아! 꼰대. 그랬다. 나도 모르는 사이 소위 말하는 ‘꼰대짓’을 하고 있었다. 그가 지난 날 '뻔히 보이는 불꽃으로 날아드는 나방'같았던 나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지 말라고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내 행동은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의 오기만 키우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더 깊은 곳에 감추도록 종용했을 뿐. 나는 진심어린 충고라고 생각하지만, 상대에게는 스스로 방향을 잡는 과정에 혼란을 가중시키는 소음처럼 들릴 뿐이다. 관계만 악화된다. 그만하자.


오픈이 지연되면 저희도 발을 못 빼요.
그러면 손실이라 말씀드린겁니다.
간섭하려고 그런 건 아니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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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압니다. 일정 맞추겠습니다.




꼰대짓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다. ‘우려한 것들은 반드시 현실이 된다’는 것을 반복학습하게 된 결과다. “그러니까 내가 뭐랬어”라는 말은 여전히 옳은 건 나라고 자신을 세뇌시킨다. 과거의 경험만으로 '내 생각이 옳다'라고 하는 것은 자기합리화다. '내 생각이 옳으니 따르라'고 하는 것은 꼰대짓이다. 하지만 쉽게 제어되지 않는다.


개발에 의한 구현이 시작되어야 할 시점이 꽤 지났는데 질문이 하나도 없다. 이것은 시작하지 못했거나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다는 싸인이다. “혹시 궁금한 거 없으신가요? 전체적으로 설명을 한번 해 드릴까요? 바쁘실테니 저희가 사무실을 방문해도 됩니다.” 기다리다 못해 연락을 했다. “아닙니다. 설계서가 완벽해서 질문할 게 없어요” 믿을 수 없는 답변이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아무리 문서를 꼼꼼하게 잘 만들었다고 해도 모든 것을 담을 순 없다. 문서를 만든 사람의 의도가 그 문서로 작업을 할 사람의 이해와 정확하게 매칭되지는 않는다. 그 간극은 언제나 질문과 답변으로 채워져 왔다. 많이 묻도 많이 답할 수록 안정적이다. 하지만 필요없다니 되었다.


단계 별 예정 완료 시점이 지연되기 시작했다. 일정은 그때마다 재정의 되었다. 다시 잡아온 일정은 항상, 고려되어야 할 것들이 빠져 있었고 영혼을 갈아넣듯 실무자의 밤낯을 점유해도 턱없이 부족할 시간들로 칸이 채워져 있었다. “정말 가능하겠어요? 일정을 자꾸 번복할 수록 고객의 신뢰를 잃게 됩니다. 이번에는 꼭 가능할 일정을 잡아 주셔야 해요. 고객이 밀어 붙인다고 무조건 맞추겠다고 해봐야, 못 맞출 때 미리 예측도 못하고 답했냐는 질책만 듣게 될 겁니다” 우려의 시선을 보낸다. “이번에는 꼭 그래야겠어요”라는 말은 번번히 빗나갔다. 끝을 도저히 가늠할 수 없어지고 고객은 시쿤둥해진다. “진짜 끝나긴 하는 건가요?” 이제는 어째야 할지 나도 모르겠다.


뚜껑을 여는 날, 테스팅이 시작되었다. 바로 덮혔다. 되는 게 많지 않았고 그나마 전체가 아닌 일부였다. 예상대로다. “다 되면 얘기해 주세요. 개발을 하는 와중에 테스트를 하면 결과가 모두 백지가 됩니다. 아까 되던게 지금 안되고, 아까 안되던게 지금 되면 테스팅의 의미가 없어요. 미개발된 것과 수정해야 되는 것이 섞여서 더 힘들어집니다” 테스팅은 중단되었다가 다시 실행하기를 반복한다. "정말 다 개발하고 먼저 자체 테스트 하신 거 맞아요?" 그는 모두로부터 몰아 세워진다. 이미 자신을 포함한 그의 직원들은 체력적으로 바닥을 치고 있다. 멘탈은 붕괴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당연하다.


우리가 놀면서 이러나요?
철야를 한지도 한달이 넘었어요.
솔직히 그 많은 업무를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다 합니까?


그의 말이 맞다. 구현해야 하는 범위가 너무 광범위한데 비해 시간은 턱없이 모자랐다. 하지만 그것을 말할 시점은 지금이 아니다. 일찍 말하면 예측이 되지만 늦게 말하면 변명이 된다. 특히나 ‘할 수 있다’고 선언을 한 시점 이후에는 더 더욱. “누가 철야를 하라고 시켰나요? 할 수 있다면서요. 그걸 못하니까 이렇게 된 거죠. 그래서 몇번이나 일정도 조정해 드렸잖아요” 고객은 더 이상 일정을 조정할 마음이 없다. 아니 일정을 조절하면 완료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다.


개발 시작이 한달이나 늦어졌어요.
그러니 구현할 시간이 있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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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결과물을 늦게 드렸나요?
일정지연의 책임이 저희에게 있나요?


기어이 그는 원망하고 만다. 모든 것을 다 수용하고 미친듯이 달렸는데 돌아오는 건 끝이 없는 압박과 비난 그리고 불신 뿐이었으니까. 모두가 원망스럽다. 하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다. 그의 원망이 우리 직원의 발목을 붙잡고 함께 깊은 늪으로 끌고 가는 것을 끊어내는 수 밖에. 일정이 지연되고 끝을 알 수 없게 되면 책임을 나눠 질 사람을 찾게 된다. 그가 모든 것에 “오케이”라는 답변을 할 때부터 우리는 이렇게 발목을 잡히지 않기 위해 내부를 단속시켰다. 절대 단계상의 지연을 유발할 수 있는 일은 하지 마라. 결과물은 반드시 제시간에 올리고, 만일 지연되면 그 사유를 반드시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에 게시하며, 관련된 사람들에게 확인 메일을 보내놔라. 미안하다. 나는 당신을 더 이상 도울 수 없다.




우리가 더 이상의 인력투입을 중지하고 자체 대기모드로 돌아간 지 한참 뒤에야 개발이 완료되고 프로젝트가 종료되었다. 그의 눈빛과 목소리를 잠잠해져 있었다.


죄송했습니다.
처음부터 얘기해 주셨는데


아니다. 그에게 벌어진 그 일은 얘기를 해 준다고 막을 수 있는 것도, 얘기를 하지 않아서 벌어진 것도 아니다. 그가 이 일을 앞으로 해 나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언젠가는 한번 혹은 그 이상 겪어야만 할 일이었다. 내가 그에게 얘기를 해 줄 수 있었던 것은 그와 똑같은 실수로 힘들어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그와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을 때 나 역시도 주변의 말을 새겨 듣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도 그랬을 것이다.




필요한 과정입니다. 저도 그랬어요.


도움이 필요하지 않아요?
필요할텐데, 그래야 할텐데


나는 이렇게 그를 몰아 세우고 있었다. 상대가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되고 먼저 손을 내밀 때 그 손을 잡아주는 게 돕는거다. 아직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는 상태에서 갑자기 손을 내밀면, 고마운 게 아니라 ‘내가 뭘 잘못하고 있나?’하는 불안감만 느끼게 할 뿐이다. 혹은 ‘나를 믿지 못하는 건가? 무시하는건가’하는 싶어지기도 한다. 믿을 수 있는 대상이 되기 위해 못 미더워 보이는 질문은 삼가하게 되고, 무시 당하지 않기 위해 상대방의 개입을 막게 된다. 무엇보다 정말 필요한 시점에 자신의 상황을 솔직하게 밝히고, 도와달라고 손을 내미는 것을 할 수 없게 만든다. 도움의 손길을 실은 기차는 이미 지나갔기 때문이다. 자신의 칸에 탑승해야 할 사람 앞에 서서 문을 여는 게 아니라, 문이 열린 채로 탑승할 사람을 지나가 버린 것이다. 문을 열긴 열었다. 탑승자가 타든 말든.


차라리, 음료를 사 주고
머리 좀 식히라고 할 걸 그랬어


아직 미경험인 것을 대신 경험시켜 줄 수는 없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경험이 필요하다. 스스로 인지한 실수에 대한 분석결과가 있어야 다음에 대비할 수 있는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좀 더 생각해보고 판단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였을지 모른다. 아니면 '무언의 지지'였을지도. "내가 미리 알려주어야 되겠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상황이 올 거라는 전제를 깔고, 그때를 대비해 '암묵적인 책임회피의 수단'을 만드는 것이다. 나는 말했다.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함께 책임을 질 마음은 애초부터 없었던 거다. 내가 그를 진심으로 돕고자 했다면, 압박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지지해주고 응원해 주었어야 했다. 악몽이 다가오고 있다고 겁을 주는 게 아니라 말이다.


그는 일정을 못 맞췄고 나는 도움을 줄 타이밍을 못 맞췄다. 그는 실수를 하고 나도 실수를 한다. 어차피 모두가 실수를 통해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세상에 완성품은 없다. 스스로를 완성품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런 착각을 하는 사람을 우리는 '꼰대'라고 부른다. 착각에 쉽게 빠지면 나는 언제든지 꼰대가 될 수 있다. 나홀로 꼰대는 없다. 주변을 흔드는 줄도 모르는 꼰대는 있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