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줘서 고마워
성인이 된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지금은 양육자의 영향을 논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 굳이 논하자면 내 삶의 양육자는 나 자신이다. 내 삶의 양육자인 나로부터 전해지는 신호는 비교적 안정적이다. 세상을 탐색하기 위해 일상을 잠시 떠날 때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일이 버겁지 않아 졌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세상을 탐색하다가 일상에 제대로 안착하지 못해 속으로 앓았던 시간들이 내게도 있었다. 그럴 때는 섣불리 나를 세상으로 던져 놓기가 두려웠다. 자극은 유쾌한 것이 아니라 위험한 것이 되었고, 자극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은 독백이 아니라 방백이 되었다. 나 자신과 주변을 모두 들었다 놨다 하는. 그때는 나의 주변도 편하게 "잘 놀다 와"라는 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더 멀리 갈수록, 더 그리워졌다
탐색이 길어지거나 더 잦아질수록 일상이 더 그리워졌다. 마치 오랜 여행을 다녀올수록 집이 더 그리워지는 것처럼. 다녀와서 집에 있던 사람에게 폭풍 수다를 떨어대고 싶어 졌다. 떨어진 시간만큼 더 보고 싶었다고, 두고 온 시간과 공간 속에 여전히 남아 주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고 말하고 싶어 졌다.
여전히 마치 습관처럼 허리에 끈을 질끈 동여 메고 길을 나선다. 돌아보면 항상 그 자리에서 내게 손짓하고 있을 일상을 담보 삼아 떠난다. 특별하게 다르지 않고, 평범하다 못해 지루할 수 있는 삶이 내게는 가장 의심하지 않고 반대편 끈을 걸어 둘 말뚝이 된다. 그 말뚝에 걸어 둔 끈의 길이는 나날이 줄어든다. 연차는 반차로 줄어든다.
이상보다는 체온이 더 좋더라
종일 쏘다니고 집에 들어온 어른 아이의 쫑알댐을 꾸벅꾸벅 졸며 들어주는 일상이 손을 뻗어 얼굴을 비벼댄다. 따뜻한 체온이 졸음을 돋운다. 일상의 다리를 감아 싸고 말한다. “나는 네가 좋아”라고.
내게 특별한 어느 날을 위해 일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 머물기 위해 가끔 특별한 어느 날이 필요했다. 혼자가 되는 한 때를 위해 타인과 함께 하는 나날이 필요한 게 아니라, 타인에 기대는 나날들을 위해 혼자가 되는 한 때가 필요했던 것처럼.
내가 나 이기 위해 필요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타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