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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삶이 말한다 한들

살아내지 않고서야 그게 뭔들

by 얄리

'시는 어렵다'라는 편견을 깨준 시인이 있다. '평론은 어렵다'라는 편견을 깨준 사람도 있다.


대뜸 "바다는 잘 있습니다."라고, '알고만 있으시라'는 투로 애둘러 안부를 전하던 시인이 '혼자가 혼자에게'만 한다는 독백을 관객이 창궐하는 영화관에서 읊어낸다. 움직이는 잔상들로 가득 차야 했을 공간을, 정적이고 하얀 사각 프레임 안에 가두어 두고. <목적 때문에 삶을 망쳐서는 안된다. 나는 정말 뭔가가 되어야만 할까? 나도 당신 품을 따뜻해하며 나란히 식어갈 수 있는지> 삶이 내게 질문하도록 내버려 둔다. 네가 울던 말던


"진정으로 비정한 일은, 네가 아픈 만큼 나도 아프다고, 그러니 누가 더 아프고 덜 아픈지를 따지지 말자고 말하는 일일 것이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 덜 아픈 사람이다. 지배하는 사랑과 미성숙한 사랑의 공통점 중 하나는 저울을 사용할 줄 모르거나 사용하려 하지 않으려 하는데 있다."라며 아무렇지 않은 듯 '슬픔이 곪은 상처'를 툭 쳐서 터트려 버리는 평론가는 <삶을 바라보는 눈을 가져라> 나를 잡아 세운다. 나의 맘도 묻지 않고


시가 말하고 시를 말하니,
삶이 말하고 삶을 말하게 된다.
하나도

어렵지 않다.



누군가에게 싸인을 받아 오는 적이 빈번한 나였다.

오직 두 사람에게서만 실명으로 싸인을 받아 왔다.

내가 이름을 숨긴들 뭐 하겠는가?

이렇게 뚜렸하게 실명을 적어 넣는 당신 앞에서


나도

말하고 싶다

내 이름

아니, 내







어느 날 갑자기 수많은 텍스트들이 내 마음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문학도 인문학도 심리학도 예전에 느꼈던 거리감이 오히려 낯설어질 만큼 훅하고 단숨에 달려드는 것 같았다. 생각했다. 이제서야 책을 읽을 만큼의 여유가 내 삶에서 생긴 것인가? 아니면 이제서야 비로소 타인의 글에서 삶을 배우려는 겸손함이 내게 싹트기 시작한 것인가? 하지만 어제와 딱히 다를 것이 없는 삶에서 특별히 여유가 생겨났을 리 없었고, 자신의 삶에 몰입되어 있던 내가 불현듯 타인이 궁금해졌을리 없었다. 한동안 책을 읽지 않았던 시간들 속에서 내가 한 일이란 오직 삶을 살아내는 것 뿐이었다.


언젠가 시가 말을하고 삶이 말을 할 때 내 귀는 열려 있지 않았다. 시를 말하고 삶을 말하고 싶었지만 할 말이 없었다. 내가 겪어낸 적이 없어서 였다. 어느 순간 그 말이 들린 것은 내가 그것을 겪어낸 후 였다. 듣게 되니 비로소 말을 할 수 있었다. 내 안에 경험이라는 그릇이 없으면 펼쳐져 있는 세상의 그 무엇도 담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유와 겸손은 그것을 담으면서 생기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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