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에 기대고 싶은 욕망
드라마 <눈이 부시게> <디어 마이 프렌즈> <기억> 등을 보고 싶어 하면서도 선뜻 보지 못하는 것은 그 안에 '나를 흔드는 불편함'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한 사람으로서의 찬란했던 때가 가고 서서히 늙어간다'는 것을 체감할 수밖에 없는 팩트라는 것이 이야기 속에 숨어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라는 말로 받아들이는 척 하기도, '신경 쓰지 않는다'라는 말로 외면하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한동안 나보다 더 앞서 늙어가는 이들을 굳이 바라보지 않으려고 한 것은 그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집요하게도 바라보고 싶어 하는 욕망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알 수 없는 것에서 오는 두려움을 지우기 위해 내 안의 목소리는 '바라보라'라고 부추긴다. 귀에 대고 속삭인다.
단지, 늙기만 해서가 아니잖아
사실 그렇다. 젊음이 주는 아름다움이 퇴색되어 가는 것이,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것들의 범주가 줄어드는 것이, 사회에서의 내 존재감이 작아지고 있는 것이 힘든 것만은 아니었다. 그 모든 징후가 죽음이라는 것과 닿아있다는 것이 힘들었던 거다. 예상하지 못했던 타인의 죽음이 나를 각성시켰다기보다는, 어느새 내 삶 가까이까지 다가와 있는 그것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 힘든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고민하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2007년 가을의 어느 날 카네기멜론대학교의 교수 랜디 포시는 학생들과 교수들이 자리한 공간에서 유쾌한 고별강의를 펼쳤다. 그는 '어린 시절의 꿈을 결국 이루는 방법,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을 방법, 다른 사람의 꿈을 돕는 것, 자신의 삶 속에 주인공이 되는 법'을 전했다. 더 이상 이것들을 전달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관계 단절의 인식이 그를 움직이게 하고 말하게 했다.
스탑트 온 트랙, 뇌종양에 걸린 한 남자와 그의 가족의 이야기다. 영화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라고 봐야 할 것만 같은. 삶을 끝내야 하는 사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간극을 벌이는 것도, 가족 개개인이 관계의 단절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밟아 가도록 만드는 것도 시간이었다.
내가 늙음이라는 것 뒤에 서 있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나라는 사람의 소멸이 두려운 게 아니라 관계의 단절이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이 삶을 다시 되돌아보게 만드는 것도 이것 때문이다. 삶에 있어서 진정 머무르고 싶은 관계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 말이다.
죽음을 다룬 책들 중에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팩트에 기반한 기술 때문에 먹먹하게 다가온다. 의사인 저자는 죽음을 다루기보다는 그것을 향해 가는 과정을 다뤘다. 더 이상의 독립적인 삶이 불가능 해진 사람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무언인가에 대해 말한다. 마지막까지 인간으로서의 가치 있는 삶, 즉 자신의 삶에서 주도권을 잃지 않고 싶은 욕구를 말이다. 그들이 잃고 싶지 않은 것은 삶 그 자체가 아니라 하찮을 수 있어 보이는 일상이었다. 하지만 삶 아니면 죽음 밖에는 바라보지 않았던 나는 그 사이에 놓인 노화에 대해 신체적인 변화 외에 심리적 고립감에 대해 그다지 알고 있는 게 없었다. 일상 안에 있으니.
서고운 작가의 그림 '사상도'는 죽음 이후 팽창과 붕괴의 과정을 담았다. 일상에서는 볼 수 없을 것들, 세상은 한 인간의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지 않는다. 팩트는 빨리 걷어 치우고 추모로 대체하는 건, 살아가야 하는 이를 위한 배려일 뿐 죽은 이를 위한 것은 아니다.
내가 늙음이라는 것 뒤에 서 있는 죽음과 멀어지고 싶어 한다면, 그것은 '온전히 혼자 감당할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길을 걸어가는 것'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상이라는 궤도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것, 그것은 나라는 한 인간이 내 안에 갇혀 버리는 것이다. 불편을 느끼게 하는 나의 모든 감각이 일상에서 나를 분리시키고 타인을 하나의 시선인 채 머무르게 한다. 그래서 절대적인 고독에 대한 체감 시점을 늦추고 싶게 만든 것이다.
죽음 그 이후를 사유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죽음'은 '티벳 사자의 서'를 연상시킨다. 종교적인 배경을 떠나서 '나라는 존재와 세상이라는 존재 사이에서의 의식'이라는 것은 어디를 떠도는 것일까? 하는, 인간의 삶과 죽음의 근원적인 이유에 호기심을 가지게 만든다. 그런데 대체 왜 이것이 궁금해졌나?
내가 늙음이라는 것 뒤에 서 있는 죽음을 알고자 한다면, 나의 무지에 대한 인식이 나를 자유롭게 만들어주기를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관계의 단절과 고립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일지라도 '당연스럽거나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자연스러움을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내가 알지 못하는 더 거대한 자아, 죽음으로 소멸되지도 멀어지지도 않는 의식을 발견하는 것이 더 평온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는 것이 사람과 사람 간의 언약 그 이상이 되든 말든. 믿고 싶은 건 단절과 고립도 지나가는 것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알 수 없는 것에서 오는 두려움을 지우기 위해 나는 '알 수 없었던 것들'을 보고 '알 수 없어서 무지했던 나'를 바라보며 늙음 안에 머물 수 있는 자유를 얻으려고 한다. 여전히 당연스럽지도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것도 아닌 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