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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테판 Jan 21. 2021

원주역 기억하기

사라지는 것들 - 원주역

"그럼 화요일에 올라 가."

곧 원주에서 서울로 올라갈 나에게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중앙선 기차가 지나가는 원주역이 지난 80년의 역사를 지켜온 학성동에서 무실동으로 새로 이전하여 화요일부터 새로 운행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순간 그럴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역사가 궁금하기도 했고, 새 건물과 깨끗한 분위기가 당연히 좋으니 그럴 예정이었다. 그런데 잠시 생각해보니 새 역사가 화요일에 개통되면 월요일은 구 원주역의 마지막 운행 날인가? 학성동에서는 이제 더 이상 기차를 탈 수 없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월요일에 마지막으로 원주역에서 타고 가지 뭐."

"왜?"

"사진도 찍고, 글도 좀 쓰게."


생각할수록 선택을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새로 개통될 원주역은 언제든 갈 수 있지만 이제 예전 원주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테니까.

청량리에서 출발해 제천으로 향하는 중앙선이 원주역을 통과한다. 서울에서 지내는 나는 고향집인 원주에 오기 위해 시외 혹은 고속버스를 타거나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야 한다. 그동안 나는 버스보다는 기차를 애용했다. 일단 소요 시간도 버스보다 빠르고 편안하며,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정시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몇 년 전, 강릉으로 향하는 KTX가 새로 생기기도 했지만 일반 열차와 소요시간에서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일반열차를 타고 원주역에서 항상 오고 갔는데 딱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그것은 기차 안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였다. 환기가 잘 안 되는지 냄새가 심할 때가 종종 있는데 무궁화호를 떠올리면 사실 그 쾌쾌한 냄새부터 떠오르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차가 좋았다. 두툼한 천 보자기에 싸인 보따리를 이고 가는 할머니, 서울에서 온 많은 등산객들, 3대가 함께 보이는 가족 등등. 여기 원주역에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가 있다. 그 추억들과 인사하기 위해 마지막 운행일에 기차를 예매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들이 있던 것일까. 원주역과 마지막 인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여 놀랐다. 우선 원주역 앞을 항상 지키고 있던 택시기사 아저씨들이 모여 있었다. 평소보다 택시도 많고, 기사분들도 많았다. 아마 그들도 이곳에서의 마지막을 기념하고, 추억들을 나누겠지?


"예전에는 말이야~"

"괜히 섭섭하네."


아저씨들은 언제나 그랬듯 한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자판기 커피를 들고, 몇몇 분은 담배 한 개비를 문채 연기를 자욱이 내뿜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제는 볼 수 없는 광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진을 남기고 싶었다.


원주에 올 때면 가족들이 마중 나올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언제나 이곳에서 택시를 이용했다. 수많은 택시기사님들이 나와 원주역을 이어주었다. 가끔씩 짐을 한가득 들고 택시에 타면 조심히 올라가라고 해주시던 기사님들, 우연히 만난 택시 운전을 하는 고모부, 택시 파업으로 인해 한동안 이곳에서도 보이지 않았던 기사님들... 이곳에서의 이야기들이 떠오르듯 지나갔다.

다정해 보이는 모자가 원주역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고 있었다. 그리고 역사 곳곳에 사람들이 카메라를 가지고 원주역을 추억하고 있었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한 게 아니구나.'


나도 저만할 때 기차를 탔었다. 청량리 즉, 서울로 향하는 원주역은 어린 나에게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문이었고, 항상 설레는 장소였다. 바로 여기서 나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첫 기차에 올랐었다. 그때의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꼬맹이였고, 할머니 손을 잡지 않으면 어디도 가지 못했다. 사실 늦게 안 사실이지만 할머니는 당시 글자를 전혀 읽지 못하셨다. 그런데 어떻게 어린 나를 데리고 멀리 서울에 사는 딸의 집까지 가셨을까? 어린 손자의 손을 잡고, 서울로 씩씩하게 올라가셨던 할머니가 새삼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지금은 계시지 않지만 이곳에 묻어둔 할머니와의 추억은 그대로 간직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원주역 덕분에 잊고 지냈던 추억 한 장을 꺼내 보았다.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출발을 위해 어디론가 떠나는 출발점이고, 그리웠던 사람이 오는 기다림의 장소이기도 하며, 누군가에게는 처음 막 내린 낯선 장소였을 것이다.


나에게는 정든 고향을 떠나 처음 타지 생활을 하기 위해 떠난 걱정과 설렘이 공존했던 기억이 있다. 옷가지들을 챙긴 큰 가방과 어머니께서 해주신 반찬들을 한가득 들고 오갔던 곳이다. 공부를 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제는 일을 하기 위해서 서울에 있는 나와 원주에 있는 나를 연결해주던 곳이다.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마주치기던 반가운 장소이기도 하고, 가족이나 친구랑 함께 탔을 때는 이야기 꽃을 피웠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사진을 찍다 보니 원주역에 쌓아 둔 나의 추억이 꽤나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과 원주, 그리고 원주와 다른 도시들을 연결하며 80년 동안 우리들의 꿈과 사랑, 설렘을 가득 싣고 달려와 주었다. 기찻길이 닳고 닳을 때까지 열차는 열심히 달려왔을 것이다.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 주기 위해서.


해가 뜨지 않은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열심히 달린 원주역에서 이제는 다시 기차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서운함과 허전함이 밀려왔다. 나도 서운한데 이곳 학성동 주민들과 원주역은 얼마나 서운할까. 아니면 이제는 좀 쉬고 싶었을까? 쉼 없이 긴 세월을 달려온 원주역에게 정말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이제 원주역은 새로운 시설과 더 빠른 운행으로 편리함을 제공해 줄 것이다. 저탄소, 친환경 열차로 더욱 진보된 교통도 제공해 줄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 삶의 터전을 연결해준 학성동 원주역에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어떤 모습으로 새롭게 탄생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모습 또한 원주시민에게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수 있기를.


구 원주역의 추억이 잊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았으면 좋겠다.


80년을 달려온 원주역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원주역은 1940년 일제강점기 때부터 운영되어 수탈과 강제징용, 전쟁으로 인한 전소의 아픔을 가지고 있다. 1956년에 다시 복원되어 서울과 강원도 영서지역을 이어주는 역할을 이어갔고, 이후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며 만남의 장소가 되기도 하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삶의 터전이 되어 왔다. 그리고 마침내 2021년 1월 5일 00시 31분 열차를 마지막으로 80년의 긴 역사를 마감하는 운행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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