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되면 사랑은 완성될까. 사랑의 완성은 무엇인가. 결혼인가.
사랑의 완성은 설득 이후의 과정인가 단지 납득의 한 단계일까
누군가를 설득한다고 그 사람이 항상 납득하는 것은 아니다. 흔히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 Title: 『 PERSUASION 』(번역서: 설득)
* Author: 제인 오스틴 Jane Austin
* PRINTED IN: 1818.12(first edition)
* Publisher: Penguin Readers(level3)
씀씀이가 헤픈 아버지 월터 엘리엇 경과 맏딸 엘리자베스는 평소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가문의 저택, 켈린치홀에 세를 주기로 한다. 둘째 딸이자 주인공인 앤 엘리엇은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와의 추억 때문에 정든 집을 떠나 근교의 작은 집으로 이사하는 게 슬프기만 하다. 그 과정에서 앤은 8년 전 사랑했던 남자를 만나게 된다. 세입자로 들어오는 부부의 형제가 바로 그녀의 첫사랑 프레드릭 웬트워스 해군 장교였다. 둘은 한때 약혼까지 한 사이였지만 지인 레이디 러셀의 반대와 설득에 헤어진 과거가 있다. 당시 프레드릭의 불안정한 경제력과 신분을 이유로 주변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이다. 8년 후 재회한 두 사람의 사정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안정적인 지위와 부를 획득한 프레드릭은 타 여성들의 호감과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이 되었고 앤은 기울어져 가는 집안의 노처녀일 뿐이었다. 프레드릭은 여전히 예의 바르나 앤에게 다소 냉정한 태도를 보이는데......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 영문학사에서, 책으로 혹은 영화로 재현되며 끊임없이 회자되는 반면 <설득>은 덜 알려져 있다. 둘 다 계몽주의에서 낭만주의로 넘어가는 18~19세기의 로맨스 소설이다. 남녀 사이의 갈등, 여성의 주체적 결정, 결혼과 같은 사회, 문화, 의식의 변화를 다루는 등의 공통점도 있지만 작품 속 감성과 성숙도, 캐릭터, 플롯의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이십 대 초반에 초고를 작성한 작품, <오만과 편견>의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당차고 주체적 자아가 강하며 자신만만한 여성이다. 반면 <설득>의 여주인공 앤은 좀 더 소극적이고 내성적이며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드러내기보다는 참고 속으로 삭이는 성격의 소유자이다. 뭐랄까, 전통적인 동양의 여인상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성격이 서양인의 관점에서는 좀 답답하고 수동적으로, 혹은 신비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동양에 속한 나는 이런 모습의 캐릭터가 익숙한데 말이다.
알파걸처럼 당당하고 똑똑하며 아름답고 사랑을 쟁취하는 여자 주인공을 대할 때 매혹되지 않는 독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현실에서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그런 끌림이 곧바로 성격의 변화를 일으키지는 못한다. 감탄하고 노력하여 태도를 어느 정도 바꿀 수는 있다. 하지만 타고난 본성의 전환은 별개의 문제다.
지금도 전혀 무관하지 않지만 19세기 전후 영국 사회에서 교제의 기준은 경제력과 신분이었다. 차이가 많이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은 발생하지만 그 사랑이 제대로 이루어지거나 결혼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던 레이디 러셀의 설득에 헤어짐을 선택한 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재산이 많지 않아 불행해질 것이라는 악담보다 자신의 선택으로 집안에 해가 되고 가족의 괴로움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면 안 된다는 말에 설득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결혼에 있어 개인의 행복 못지않게 가족의 행복을 중요시했고 자신의 감정이 타인의 이성에 못 미친다는 생각에 주눅이 들었을 것이다.
어색하지만 적대적이지는 않은 두 사람은 친척 및 친구의 연결고리를 통해 종종 만나면서도 서로의 감정을 확인할 기회를 만들지 못한다. 앤은 어리고 예쁜 여성들에게 둘러싸인 프레드릭의 모습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그의 행복을 빌지만 늘 가슴 한편에는 그를 향한 회한과 사랑이 남아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왜 8년간 다른 사람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고 새로운 삶을 지향하지도 않았을까. 하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프레드릭의 마음이 어떤지는 물론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 억눌림조차 스스로 쳐 놓은 벽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3인칭 시점의 전개로 독자는 프레드릭의 마음과 계획을 아는 데에 한계가 있다. <오만과 편견>의 다아시처럼 달변가였다면 엘리자베스와 피 터지게 싸우고 논쟁하여 최소한 서로의 생각과 자신의 문제를 인지했겠지만 <설득>의 두 주인공은 그리 말주변이 없는 내향형의 시인과 같다. 그래도 그의 행동을 통해 앤에 대한 감정을 짐작할 수는 있다. 어린 조카가 앤의 등에 매달리며 괴롭히자 프레드릭이 말없이 그 악동을 떼어내는 장면이 있다.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했던가. 그들이 풀지 못한 매듭을 풀 기회는 종종 무산되고 만다.
"프레드릭이 나를 도와주다니 친절한 사람이야."
그녀는 감사를 표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었다. 이내 메리 언니와 머스그로브 자매들이 방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앤은 방을 나섰다."
30쪽/Persuasion
서로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대화가 필요하다. 꼭 말이 아니어도 자신의 생각을 상대에게 표현하고 자신의 감정과 이성에 대조해 보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알겠는가. 더욱이 솔직하고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라면 이들은 늘 어긋나기만 한 사랑을 할 수밖에 없는가. 오스틴은 이 안타까운 커플의 운명을 위해 '제삼자와의 대화와 편지'라는 수단을 택한다. 직접적인 대화보다는 훨씬 돌아가야 하는 우회로 같은 장치이나 사랑이 늘 효율적인 과정을 따라가지는 않으니까.
When a woman really loves a man, she will never forget him.
"어쩌면 남자는 여자를 쉽게 잊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여자의 감정은 남자보다 더 오래가거든요. 여자는 남자를 진정으로 사랑할 때 절대 잊지 못하죠."
앤이 말했다.
(중략) 앤이 하빌 대령에게 하는 말 중에서
When a man really loves a woman, he will never forget her.
"당신이 하필 대령에게 하는 말을 들이니 제 마음을 꼭 말해야겠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정말 사랑할 때 남자는 그 여자를 영원히 잊지 못한답니다."
(프레드릭의 편지에서)
64~65/<Persuasion>
여자의 마음에 대해 토로한 앤, 그 말을 듣고 편지로 자신의 감정을 고백한 프레드릭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마침내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들은 그제야 처음으로 설득이 아닌 납득의 단계에 들어설 수 있었고 존중의 탈을 쓴 회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특히 앤은 아버지나 러셀 부인의 설득이 아닌 자기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기에 납득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작가 오스틴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어떤 사정이 있었든 간에 작가의 현실 속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 생애의 마지막 소설 <설득>을 통해 자신의 소망을 담아 자신이 그리는 이상적 사랑을 완성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참고로 이 소설은 그녀의 사후 출간되었다고 한다. 41세의 젊은 나이였지만 21세의 <오만과 편견>을 쓸 때와는 다른 인생의 의미가 반영되었으리라.
인스턴트 같은 사랑이 만연하는 시대에 불완전하지만 인간의 한계, 실수를 겪으면서도 솔직한 내면의 성찰로 성숙한 사랑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를 접하고 싶은 독자에게 이 작품을 추천한다. 설렘과 같은 단순한 로맨스 이상의 좌절, 인간, 선택과 감내해야 할 현실, 배움과 여운이 있는 소설이다.
Penguin Readers Level 3: Persuasion (ELT Graded Reader) 저자 Jane Austen출판 Penguin Random House Children's UK발매 2023.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