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치유의 향기를 내뿜던 가을이 가고 찬바람이 자꾸 목으로 스며든다. 이제는 장갑과 머플러 없이는 외출하기도 힘들 정도로 쌀쌀해진 날씨. 청명한 하늘에 기분 좋은 바람에 날리는 낙엽이 떨어졌던 잠깐의 초가을이 그립다. 너무 빨리 지나간 시간. 지구의 기후는 여전히 이상하지만 변화는 늘 찾아온다. 떨림의 지구는 울림으로 반응하면서.
멈춰 있는 듯 보이는 건물도 실제로는 진동한다고 했던가. 물리학의 시점으로 보면 나의 삶도 진동하고 있다. 세상이 변화면 어느 정도 적응해야 한다고 여기면서도, AI니 신조어니 하며 꾸역꾸역 따라가는 순간이 가끔 버겁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요즘 안드레아는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아쉽다는 말을 자주 한다. 또 나이를 먹어야 하는 게 슬프다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도 세월 가는 속도가 유난히 빠르게 느껴지는 연말을 보내기가 그만큼 힘든가 보다. 크고 작은 외부의 사건들, 예상치 못하게 나타난 문제, 해결되지 않은 고민거리. 어느 가정이나 걱정과 불안은 있다고는 하지만 정도는 다를지언정 대나무처럼 꼿꼿하게 마음을 지키기가 쉽지는 않다.
내 삶에도 변화가 느껴진다. 두 번째 대학을 졸업했지만 학부 때보다 더 바빠지는 걸 느낀다. 우주의 기운을 받은 듯 번역의 기회가 찾아왔고 한 번이 두 번, 세 번으로 이어지며 이런저런 일이 조금씩 늘고 있다. 돈을 많이 버는 건 아니지만, 하고 싶은 일을 위해 계속 열정을 쏟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다. 기분 좋은 일과 마음을 다스리기 힘든 다른 일이 씨실과 날실처럼 겹쳐지기도 한다. 카르페디엠을 기억하며 현재에 집중하려 하지만 그 현재에는 책임과 아픔이 함께 있다.
게다가 요즘 주말마다 대학원 면접과 전공 시험 준비로 정신이 없다. 여섯 학교나 되어 헷갈리기도 하다. 언뜻 서류만 제출하면 될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학교마다 일정도 다르지만 제출 서류나 자격, 방법, 요건 등이 다 다르다. 학업계획서나 연구계획서의 내용이나 형식도 다르고 적용해서 맞춰야 할 커리큘럼도 다르다. 영문학 책을 보고 있는데 마음이 떨려서 그런지, 다른 일이 섞여 집중이 안 되어 그런지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 합격하고 싶지만 막상 합격하면 일과 가정과 공부, 건강 관리를 어떻게 조절해야 할지 막막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생각지도 못한 복잡한 가정사가 하나둘 시나브로 늘어간다. 나는 멀티플레이어가 아니다. 현재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는 환경이 나를 끊임없이 진동하게 한다. 올 때가 되었으니 왔을 테지만, 언제나 새롭게 나를 괴롭히는 이 파도를 이겨내고 싶다.
가끔은 버거워진다. 완벽주의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완벽주의 같은 생각에 빠져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치료 때문에 병원에 가면서도 그날의 할 일을 다 하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한다. 필요해서 가는 건데 계획대로 시간을 쓸 수 없어 조바심이 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책상 앞에 있으면 외출해서 처리해야 할 다른 일이 신경 쓰인다.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니 가족으로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처리해야 할 일이 불쑥불쑥 찾아오니 말이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예전처럼 잠도 안 자고 몸을 혹사하며 해내다가 가뜩이나 저질 체력이 더 나빠지게 할 수는 없다.
두 달 안에 팔 수술이 예정되어 있고 진행 중인 번역 프로젝트에 수업 관리, 시험 외에 원래 해 오던 루틴을 다 하려니 부담이 커진다. 나도 아픈 곳이 많지만 역시 쇠약해지시며 아파하시는 양가 부모님이 걱정된다. 아이들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따뜻한 품이 되고 싶은데 마음처럼 잘되지 않아 속상할 때도 있다. 다 잘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것이 인생이다. 욕심을 버리고 우선순위를 다시 조정하고 변화를 받아들여야 할 때다. 시간이나 횟수를 줄이되 멈추지 않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다음 달에는 집수리도 할 예정이다. 6주가 예상되는 장기 프로젝트이다. 십 년이 넘게 살고 있는 집이 많이 낡았다. 요즘은 잦은 미팅, 문의, 예약, 신고, 인테리어, 이삿짐센터 등 관련된 준비과정으로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다.
거의 매일 하던 글쓰기 발표나 공부 시간을 급하고 중요한 정도에 따라 조정해야 한다.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내가 쓰는 모든 것을 블로그에 담아낼 필요는 없다. 이제 쓰기는 나의 일부가 되었고 다른 일을 하느라 조정하기는 해도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타인에게 나를 증명하기보다 나에게 솔직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려 한다. 노트에, 핸드폰 앱에, 일기장에, 단상집에, 책 모퉁이에 적고 표시하고 또 기록한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조금씩 서서히 하나를 줄이고 새로 해야 할 일을 집어넣어 삶에 균형을 잡고 싶다. 그래도 실패할 수는 있지만 할 일이, 해야 할 공부가 있음에, 뭔가 시도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변화에 맞추려 한다. 변화의 떨림에 적응의 울림으로 살아가려 한다. 움직이는 것을 억지로 막을 수는 없고 멈추어 있는 것을 억지로 움직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