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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니마리아 Jun 05. 2024

18화 악몽(惡夢)을 대하는 자세

급하게 화장실을 들어간다. 언뜻 보아 나인 것 같은데 흐릿한 화면이라 확신할 수는 없다. 나의 의식대로 움직이는 소녀의 모습이니 나일 것이다. 흑백 화면은 아닌데 비교적 어둡고 분위기도 약간 음산하다. 두세 명의 다른 소녀들이 세면대 주위에서 웅성거린다. 나는 뭔가 입안이 불편한지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계속 입을 헹군다. 어두운 데도 더 어두운 뭔가가 계속 내 입에서 나온다. 아무리 물로 입안을 헹구어도 계속 검은 액체가 쏟아져 나온다. 이상하고 두려운 마음에 자세히 쳐다보니 '피'다. 피가 계속 나왔다. 

주변의 걱정스러워하는 시선이 느껴진다. 나도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허둥대는데 갑자기 앞니 하나가 흔들린다. 아무래도 빠질 것 같다. 누가 준 것인지 내가 가지고 있었는지 내 손은 비닐봉지를 하나 들고 있다. 이상한 느낌에 나는 비닐봉지에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이를 담으려고 한다. 다 뱉고 나니 봉지가 가득 찼다. 하나가 아니라 이 전체가 다 빠진 것이다. 

꿈과 현실의 경계인지, 현실에서 깨어나기 전인지 모르겠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아, 또 이런 꿈을 꾸다니! 어쩌지?'

그냥 개꿈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었다. 찝찝한 느낌이 드는 꿈이나 무서운 꿈을 꾸어 본 경험은 누구나 다 있을 테니까.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가 빠지는 꿈은 다르다. 적어도 내게는. 이번이 두 번째이지만 첫 번째 이런 꿈을 꾸었을 때(기억하는 꿈)의 강렬함과 사건은 내게 잊을 수 없는 충격을 주었으니까. 

아마 십 년도 더 된 듯싶다. 앞뒤 상황은 기억이 안 나지만 아무리 꿈이지만 나의 치아가 속절없이 우수수 동시에 떨어지는 상황의 황당한 마음은 아직도 생생하다. 꿈속에서도 처음 겪는 일이라 공포심에 힘들었고 깨고 나서도 한참을 가위눌린 듯 멍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저 힘든 꿈을 꾸었을 뿐이라 생각했다. 그다음 날 어떤 소식을 듣기까지는. 새벽 즈음인가 안드레아는 전화 한 통화를 받았는데 표정이 무척 심각했다. 외삼촌이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때는 아이들도 어렸고 경황이 없는 상태에서 상갓집을 다녀왔지만 한동안 그 전날 꾸었던 꿈이 계속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얼마 전에 이가 빠지는 꿈을 다시 꾸었다. 다른 상황, 다른 시간이었지만 이번에는 걱정과 두려움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리고 어떻게든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두렵지만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좀 더 강해지고 싶었다. 시계를 보니 아직 5시도 채 되지 않았다. 아직 안드레아와 딸은 자고 있는 시간이었다. 보통 이런 날은 여유 있게 아침 루틴을 하게 되어 선물을 받은 기분을 느끼지만 이날은 달랐다. 길을 잃지는 않았지만 무리에서 홀로 떨어져 저 멀리 쉬고 있는 다른 양들을 슬프게 바라보는 한 마리 양이 된 기분이랄까. 

문득 핸드폰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문자가 와 있었다. 시간을 보니 밤 11시가 훨씬 넘었다. 내가 잠들고 얼마 안 되어 온 문자였다. 사실 누군가 보낸 문자가 아니라 내 명의로 된 카드가 사용된 계산 내역이었다. 

  'oo 병원, 29000원' 

급박한 상황에서 '피가 몰리는 느낌'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아이에게 비상시에 쓰라고 준 카드 내역이었기 때문이다. 군대에 있는 아이가 평일 밤에 병원비를 썼다고? 워낙 늦은 시간이라 정상적인 진료는 아니었을 것이고 군의관이 아닌 일반 병원 의사를 봐야 할 만큼 급박한 상황이었나? 아마 응급실이었을 것이다. 답답하고 놀란 심정에 어쩔 바를 몰랐지만 당장 아이와 연락할 수는 없었다. 핸드폰 사용은 시간제한이 있고 정해진 시간대가 아니면 문자도 불가능했다. 

우선 급한 대로 어디 아픈 데가 있냐고, 무슨 일은 없냐는 안부 겸 걱정을 내비치는 문자를 보내 놓았다. 나중에라도 확인하면 자초지종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서다. 아침이 밝았다. 나는 출근 준비를 하는 안드레아, 등교 준비를 하는 둘째에게 '오늘은 특히 조심하라'라는 부탁과 함께 내 꿈 이야기를 해 주었다.

미신을 믿는 편은 아니다. 대개는 그렇다. 단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금기 사항은 굳이 반항적으로 대하지 않으려 한다. 시험 당일 미역국을 먹는다든지 어른들이 하지 말라고 하는 행동은 굳이 안 하려고 한다. 과학적 근거는 없다 하더라도 우연히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의 우연한 자극제를 유발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확률은 반반이더라도, 아니 소수라도 나는 그 소수에 들어가 본 경험이 종종 있기도 한 이유도 있다. 종교가 있는 사람으로서 세례를 받으며 맹세했던 바대로 점을 보거나 운명론을 믿지는 않으려 노력하는 부분도 있다. 내 운명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결정론 내지 운명론은 믿지 않으려 한다. 단 사고 든 행운이든 우연은 인생에서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하지만 인과관계가 조금이라도 느껴지고 경험치가 쌓여 확률적으로 위험한 일을 겪었다면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날 어떻게 되었을까? 남편과 딸은 나의 지나친 우려의 당부를 듣고 그래도 조심하겠다는 말을 해 주었고 다행히 별일은 없었다. 첫째는 그날 저녁 연락이 왔는데, 감기가 심하고 몸이 안 좋아 응급실에 다녀왔다고 했다. 회복이 잘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큰 사고가 일어난 게 아니라 이 역시 다행이라 여기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래도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한 나는 짬을 내어 치아 상실과 관련된 해몽 정보를 검색해 보았다. 과학적 근거는 없지만 누군가 올린 글에는 부정적인 내용도 있고 개인마다 다르다며 오히려 긍정적인 일, 좋은 일이 담긴 내용도 있었다. 공통점은 '변화'라는 내용도 인상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올해 내 몸은 또 변화를 겪고 있었다. 작년과도 또 다른 큰 폭의 변화를. 아픈 데가 더 아프거나 안 아픈 데가 새로 아프거나 전과 달리 회복 기간이 오래 걸리기도 한다. 삼 개월이 넘도록 생리를 안 하고 있었고 편두통의 횟수와 강도가 더 심해졌으며 몸의 각 부분이 제대로 기능을 못하고 있었다. 체력이 약해지고 걱정이 많은 데다 꿈을 꾼 당시 초현실주의 적인 내용이 담긴 책을 읽고 있었다.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꿈으로 나타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어떤 경우든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조금 더 의연하게 나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차분하게 하루하루를 맞이하며 살고 싶다.

 파도를 막을 수는 없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보더라도 무서워만 하거나 자포자기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때로는 즐기며 때로는 온몸으로 부딪치더라도 견디고 때로는 파도의 흐름에 나를 맡기며 흘러가는 작은 배처럼 철썩철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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