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애도할 줄 모르는 사회의 비극
한달이 꼬박 걸려 작성되는 '삶보다 죽음 시리즈' 2탄. 지난 글에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다뤘다면 이번에는 나 자신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적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죽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수밖에 없는 참사가 일어났다.
할로윈을 즐기려고 주말에 이태원을 향한 젊은이들이 인파에 휩쓸려 압사사고를 당했다. 할로윈 기간에 이태원에 사람이 많이 몰린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다. 코로나 시국에도 거대한 인파가 몰렸고, 사람 많은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나는 '대체 저런 델 왜 가느냐'라며 혀를 끌끌 차곤 했다.
처음 사건을 접할 때만 해도 실신한 정도인 줄 알았다(물론 실신도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아비규환인 이태원에 비해 내가 있는 침대는 안락하기 그지없었고, 역시 할로윈에 이태원이나 가니까 험한 꼴을 당한다며 혀를 찼다. 그런데 계속해서 업데이트되는 소식이 심상치가 않았다. 사망자수가 자꾸 늘어났고, 현장은 내 생각보다 더 참혹했다. 착잡한 마음으로 잠에 들고 아침에 눈을 뜬 이후에도 이태원 참사 소식을 수시로 확인했다. 아무리 열심히 확인해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같은 맥락의 일은 아니지만, 이러한 대규모 참사를 목격한 일이 또 있었다. 8년 전, 2014년 4월 16일 수학여행을 떠난 고등학생들이 탄 배가 침몰한 '세월호 참사'였다. 세월호에 탄 아이들은 당시 18살, 1997년생으로 나와 동갑이었다. 사망 사고를 처음 접한 건 아니었지만, 나와 또래인 아이들이 그렇게 대규모로 목숨을 잃는 모습을 목격하는 건 처음이었다.
타인의 죽음에 영향을 받아본 건 2013년이 처음이었다. 중학교 때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한 동창이 이른 아침 등교길에 뺑소니 차량 때문에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사건이 일어난 시간이 이른 아침이어서 더 슬펐다. 그 아이는, 그저 일찍 출발하는 모범생이었을 뿐인데 그런 일을 겪었다.
그런데 난 정말 그 아이와 친하지 않았다. 같은 반이 된 적도 있었지만 중학교 3년 통틀어서 나눈 대화가 한 마디도 되지 않았다. 그 소식이 아니었다면 평생 생사도 모르고 지냈을 아이였다. 동창들은 저마다 장례식에 가기도 했는데 그때 나는 기숙학교에 있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다. 다른 아이로부터 실망했다는 말도 들었다. (네가 뭔데) 지금 생각하니 나는 회피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 뒤로 몇 주 동안 무기력에 시달렸다. 그 아이가 곁을 떠나서가 아니었다. 내가 너무 아무렇지 않게 잘 살아서 힘들었다. 타인의 죽음에 눈물 흘리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때 나는 그 아이의 죽음보다 나의 모의고사 성적이 떨어진 것이 더 슬펐다. 그리고 그런 내가 부끄러워 무기력했다. 예쁜 풍경을 보면 그 아이가 보지 못한 풍경을 내가 대신 보는 것 같아 멀쩡히 살아있는 것 자체가 죄스러웠다.
또 죽음이 너무 덧없어서 슬펐다. 그 아이는 자신의 등교길이 생의 마지막일 것이라고 예상했겠는가. 인간은 누구나 죽지만, 특수한 상황에 놓이지 않는 한 당장 오늘 내일 죽음을 맞게 되리라 예상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 누구도 미리 준비하지 못한 허망한 죽음을 나는 외면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감정이 1년 뒤에 다시 생겨났다. 세월호 사건이 터지고 국가는 집단적 애도의 기간을 가졌다. 짧지 않은 기간이었다. 아무리 대참사라고 해도 사람이 항상 슬플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데 그때는 항상 슬퍼야 하는 분위기였다. 잠깐이라도 행복하면 뉴스로 본 유족들의 눈물이 떠올라 다시 가라앉았다. 그렇게 한 달을 힘들어했던 것 같다.
2013년과 2014년, 10대였던 나는 2022년 20대 중반이 되었다. 그리고 이태원 참사의 사망자 대부분이 20대였다. 나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많은 경우도 많겠지만, 어쨌든 대부분은 나와 동년배다.
참사가 일어나고 며칠 뒤 퇴근하다가 유리창에 비친 나를 보았다. 원래 나는 걷다가 유리창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어딘가로 부지런히 향하는 내가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아가는 것 같고 또 이만큼 어른이 된 내가 괜히 뿌듯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 본 유리창은 기분이 묘했다. 사망자와 비슷한 연령대의 내 모습에 뿌듯함보다는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곧 무서워졌다. 무려 두 차례나 국가의 부재를 경험한 터라 과연 내일도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든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고, 원래 죽음은 덧없고 허망한 것이 많다. 하지만 진짜 나를 참담하게 하는 건 침몰한 배를 탄 아이들도, 이태원에 간 젊은이들도 미리 예방만 했다면 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왜 우리는 꼭 누군가가 목숨을 잃어야만 정신을 차리는 걸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행위가 완전히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다. 남은 소라도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잃어버린 목숨들의 주인은 우리 사회에 따끔한 교훈을 주려고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다. 태어난 이후부터 존중 받아야 하는 목숨들이었다. 어떤 성장은 상처를 수반하지만, 이런 상처까지 감수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과오를 저질러왔고, 더 이상의 희생양은 필요하지 않다. 덧없는 죽음이 또 반복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태원 참사와 세월호 참사를 대하는 국민들의 결이 다르다. 학교 수학여행으로 배에 올랐고, '가만히 있으라'라는 지시를 얌전히 따랐을 뿐인 아이들과 이태원에 자발적으로 놀러간 사람들을 동일 선상에 놓을 수는 없다. 나 역시 처음 참사를 접할 때까지만 해도 '그러게 딱 봐도 사람 많은 날 이태원은 왜 가서'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갈수록 늘어나는 사망자수와 안타까운 일화들이 들리면서 착잡해진 나는 마음을 고쳐 잡았다. 그 누구도, 이태원에서 할로윈을 즐기려 했다는 이유만으로 죽어 마땅할 수 없다. 이 세상에 죽어도 되는 사람은 없다. 온갖 악행이 넘쳐나는 이 세상에서 고작 이태원에서 할로윈을 즐긴 게 뭐가 그리 잘못이란 말인가.
10월 30일부터 11월 5일까지 정부는 국가 애도의 기간을 선포했다. 그 결과 많은 행사가 취소되었다. 이태원 참사 역시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건이지만, 이런 식의 애도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한다. 도리어 충분히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반발심을 불러일으키는 형국이다.
이번 애도 기간을 거치면서 확실히 깨달은 건 진정한 애도는 무언가를 금지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행동을 취하는 것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정부는 시민들에게 피해를 떠넘기며 애도를 강요하는 대신 모두가 납득할 만한 반성과 개선의 행동을 보여야 한다. 애도는 침묵이 아니라 행동에서 나온다.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피해자들을 안타깝게 여긴다면, 다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심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서울의 인구밀도는 이미 임계점을 넘은 지 오래다. 나야 서울 중에서도 사람이 덜 갈 곳만 골라 다니지만, 출퇴근에서도 이를 피할 수는 없다. 누구든 만원지하철을 탈 때 무지막지하게 밀려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분명 내가 끝인 줄 알았는데 밀리고 밀려 깊숙이 들어간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런 서울을 살면서 내가 또 언제 그런 일을 겪을지 장담할 수 없다. 이태원 참사 이후로 압사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져 더 이상 전처럼 밀고 들어가지 않는다고 한다. 변화는 좋지만, 이게 집단의 트라우마에서 나왔다는 점이 안타깝기만 할 뿐이다.
오랫동안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확신할 수 없었다. 태어났으니 살아야 한다고 하기엔 태어난 것부터 내 의지가 아니었고 이 세상이 그렇게 애써 버텨야 할 만큼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뉴스에서 비극적인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이렇게까지 개개인의 삶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에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돼 엄청난 무력함을 느끼곤 했다. 아직 나는 20대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너무나 많은 이의 죽음을 목격했다. 내일은 더 나은 세상이 펼쳐질 거라고 믿기엔 벌써 너무 많은 세상의 어두운 단면을 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품고 싶다.
최근 <팩트풀니스>라는 책에 대한 영상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영상에서 설명한 책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세상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극단적으로 절망스럽지 않다. 극단적으로 절망적인 사례만 미디어에 나오기 때문에 사실이 왜곡되는 것이다. 세상은 분명 나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세상은 나아지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낙관적인 태도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세상은 나아진다. 우리가 행동하는 만큼만. 우리가 있어야 할 위치는 낙관주의와 허무주의, 그 사이에 있다."
참사 이후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슬퍼하는 목소리들, 제대로 된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들에 희망을 많이 얻었다. 이태원 현장에서도 누군가는 쓰러져가는 옆 사람을 외면해도 누군가는 모르는 사람을 살리고자 고군분투했다.
지금 내가 해야 하는 건 무력하게 좌절하는 것도, 다 잊어버리는 것도 아닌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나의 할 일을 해내는 것이다. 그 결과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너무나 초라한 움직임이지만 이 글로나마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