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쓰기와 연애를 시작하기로 했다
- 생존쓰기
-나연-
‘나 그냥 읽기만 하고 살래. 슬기로운 글쓰기 생활 한 번 해볼랬더니 숨이 차’
생애 최초 글쓰기 모임, 마지막 수업만 남긴 날, 지루하고 장황한 나의 글에 폭풍 피드백을 받고, 뇌의 과부하 상태로 귀가하던 지하철에서 나는 SNS에 이런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집에 도착할 무렵 마지막 과제의 제목을 정했다. 「나는 쓰기와 연애를 시작하기로 했다.」
올봄엔 나의 갱년기에 딸의 사춘기까지 정점에서 교차하며 감정 소모가 한도 초과에 도달했다. 아, 이러다 우울증이나 암 중 하나는 걸리겠는 걸. 나는 셀프 응급 처방을 내렸다. ‘운동과 쓰기를 두배로 할 작심’. 미라클모닝 의식의 장소인 헬쓰장을 아침, 저녁으로 다녔다. 그리고 올인원(All-IN-one) 노트를 마련했다. 일기, 감사일기, 일상쓰기 등을 휴대가 간편한 한 권의 노트로 통합했다. 노트 제목은 「생존 쓰기」다.
일기
별일도 없었던 오늘을 내가 대체 뭐라고 쓸지 머리에도, 펜에도 한 자도 걸려있지 않은 채 노트를 펼치고, 의식의 흐름대로 마구 휘갈긴다. 다람쥐 쳇바퀴 같은 밋밋한 하루, 그러나 내 생에 단 한 번뿐인 오늘의 역사를 남긴다. 마음속에서 소용돌이 치는 복잡·미묘한 감정들도 풀어낸다. 그러다 일기의 매력, 쓰기의 마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누군가 진정으로 들어주면 암담해 보이던 일도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칼 로저스는 공감의 효과를 이렇게 표현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경청과 공감으로 내 말을 한없이 들어 줄 사람을 갖기란 참으로 힘들다. 그래서 나는 누구나 작가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독자는 단 한 명, 바로 나 자신이면 충분하다. 나 자신조차 진정으로 들어주며, 공감하지 못한 말을 들어줄 누군가는 지구별엔 없다
일기의 매력 첫 번째는 바로 이런 경청과 공감의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벗이자 거울이 된다는 점이다. 마음을 휘젓는 감정을 다 쏟아내고 나면 마음 잘 통하는 친구에게 폭풍 수다를 떤 듯 스스로 좀은 치유가 된다.
더 놀라운 일은 일기의 두 번째 매력이다. 마구 뒤엉킨 말초적인 감정이나 생각을 밑도 끝도 없이 써 내려가다 보면 어느 정도의 진정 효과는 물론 혼란스럽던 생각이나 마음이 상당히 정리가 된다.
때로는 어제의 일기를 읽으며 놀란다. 어, 내가 이런 글을 썼네? 평소에 내가 자각하지도 못했던 생각이나 느낌이 불쑥 튀어나와 있다. 일기의 세 번째 매력이다. 번아웃이 왔을 때 영혼 탈출 모드로 휘청거리며 써 내려간 글에는 잠재의식 같은 게 떠오르기도 한다. 여태껏 나도 몰랐던 또 다른 나를 만난다.
그렇게 나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한 글을 쓴다. 그 무엇보다 위안과 카타르시스가 되기 때문에.
감사일기
김주환 교수는 『회복탄력성』이란 저서에서 회복탄력성을 키우는 과학적으로 검증된 두 가지 방법으로 운동하기와 감사일기 쓰기를 꼽는다. 3주만 쓰면 스스로 변화를 느끼고, 3개월을 쓰면 주변에서도 변화를 알아차린다고 한다.
나는 3주, 3개월이 지나도 별 변화를 못 느낀 채 그냥 썼다. 세컨 일기를 쓰듯이. 3주, 3개월이 아니라 3년쯤 지난 후였을까? 어느 날 문득 자주 마음에 감사일기를 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나의 도착에 맞춰 신호등에 파란불이 켜지는 순간 또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가 ‘감사합니다.’하고 되뇌고 있었다. 속상한 일로 울면서 길을 걷다가 ‘그래도 나는 내 인생 다른 사람이랑 안 바꿔. 엉엉.’하고 좀 더 운다. 마지막 엉엉은 눈물로 쓰는 감사일기다. 아, 나는 경지에 이르고야 말았어. 그때부터 숙제처럼 거의 매일 쓰던 감사일기장은 접었다. 매일 실천할 성장 습관 목록들이 넘쳐나서 늘 시간에 쫓기기 때문에.
그러다 다시 감사일기장을 꺼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쓰는 머리 속의 수위는 손이 쓰는 육체적 노고를 결코 따르지 못한다는 걸 절감하면서. 요즘은 이 밤이 다하도록 멈춤없이 써내려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손가락이 아프도록 쓰고, 또 쓰면 마음이 정화된다. 경지 따윈 중요하지 않고, 손이 움직이는 이 구체적인 순간이 내겐 애틋하다.
처음 감사일기를 쓸 때는 숙제처럼 감사할 거리를 찾았다. 좋다고 하니까 뭐 한 번 써보지,하며 받아쓰기 하듯 모범답안을 영혼없이 썼다. 지금은 감정일기나 감사일기의 경계가 없다. 감사라는 키워드를 의식하지 않은 채 그냥 아무말 대잔치로 막 쓴다. 슬픔이든 우울이든 그 시작이 무엇이었든 마지막은 착함표 억지가 아니라 알고리즘처럼 감사로 귀결된다. 감정의 불순물들이 가라앉고 정제된 마음만 남는다.
일상쓰기
초등학교때부터 글쓰기 시간은 내겐 늘 고역이었다. 특별한 경험이 없어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당최 쓸 게 없었다. 늦깎이로 읽는 즐거움에 젖어 들며 조금씩 알아차렸다. 나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글은 내용의 특별함이 아니라 오히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특별한 글로 탄생한 경우였다. 대단해. 이 소재로 내가 글을 썼다면 ‘오늘은 아무일도 없었다.’ 이 한 줄로 끝일텐데, 하고 감탄할 때가 많다. 김영하 작가의 장편소설 『빛의 제국』은 두통에 대한 길고 긴 묘사로 시작된다. 와, 작가들이란. 두통으로 몇백 장도 느끈히 쓰겠는 걸, 하며 새삼 그에게 경이를 표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특별한 글로 남을 수 있다면 또는 특별한 일상이 그 어떤 것으로도 남을 수 없다면. 특별한 인생은 전자가 아닐까?
밀리언 셀러 동화 『백만 번 산 고양이』의 작가 사노요코의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를 읽으며 생각했다. 쓸 수 있다는 건 축복이구나. 그녀는 산소같은 하루 하루를, 또 암 투병 중에 마지막 잎새의 나날들을 섬세하게 기록했다. 그 산소와 마지막 잎새는 어떤 위인 평전보다 내게 신성한 울림을 줬다. 외로워도, 고통스러워도, 몸이 아파도 그 어떤 경험이든 기록할 수만 있다면 나쁘거나 버릴 순간은 없겠구나. 내가 바로 내 곁에 있으니까. 나 자신이 내 곁에 머무르며 온 마음으로 들어줄 수 없을 때 우리는 이 생에서 더는 위로받을 수 없는 막다른 길에 다다를 것이다.
또 쓴다는 것은 세 번 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경험을 쓰기 위해 기억을 떠올리며 두 번을 산다. 또 언젠가 그 글을 읽고, 추억하며 세 번을 산다. 쓰기 위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며 미세 감각을 일깨운다. 한 명의 독자라도 있다면 나누고, 공감하며 유연해진다. 이 과정에서 둔하게 지나칠 일상들은 섬세하고 풍부해진다.
죽는 순간까지 마지막 느낌을 기록하거나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사노요코 작가처럼 ‘죽는 게 뭐라고’를 쓰다가 의연하게 지구별 여행을 마치고 싶다.
지금은 일제강점기도 아니고, 우리는 독립투사도 아니면서 좋아하는 사람들을 충분히 만나지 못하고 산다. 충분히 만나지 못하는 것은 좋아하는 사람만이 아니다. 우리는 나 자신도 실컷 만나지 못하고 산다. 글쓰기가 고역이었던 내가 쓰기의 마력에서 만유인력을 느낀 이유는 나를 자주 만날수록 행복해지는 법칙의 발견 때문이다.
무엇이든 쓰세요. 필터없이 쏟아내면서 나는 나를 만나 가고 있다. 반세기나 살면서도 나는 나를 자주도, 깊이도 만나지 못했다. 나 자신에게 관심 두기엔 늘 다른 일로 더 바빴다. 사람은 사랑받기를 원한다. 특히, 그 누구에게 보다 자기 자신에게 사랑받기를. 매슬로는 인간 욕구 5단계 이론으로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될 때 상위 단계의 욕구들이 충족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나 자신을 실컷 만나고, 나 자신에게 사랑받는 일은 어쩌면 기본중에서도 으뜸인 애착 욕구일지 모른다. 이 본질적인 욕구를 너무 오래 잊고 살면 아무리 많은 것을 이루어도 마음 한 켠은 휑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쓰기와 연애를 시작하기로 했다. 노후 대책의 반열 1순위에 글쓰기를 올렸다. 늙고 늙어 기력이 쇠진해도, 요양병원에 누워있더라도 가장 오래 나와 함께 할 수 있을 유익한 공짜 취미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 자신에게만은 바닥까지 솔직해지는 것, 그렇게 점점 진짜 내가 되어가는 것은 멋진 일이다. 나는 이것을 ‘생존쓰기’라고 부른다.
글로 옮겨진 거리두기로 나는 엄마의 108번뇌와 인간 나연의 일상을 분리한다. 그래서 오늘도 ‘그건 그거고’하며 칸을 지르고, 나연의 글쓰기 숙제에 몰입한다. 번뇌의 강도가 몰입과 즐김을 상쇄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강화할 수도 있는 경이로운 아이러니를 체험하면서 생존을 위해 쓴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변하는 게 아니다. 보다 자기다워지는 것이다. -린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