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장미
난외의 여백
w. 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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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빽빽하게 채워지는 원고지와 같다. 정사각형의 칸 안에 글자가 채워지고, 글자들이 모이고 문장이 만들어지며 글이 완성되는 것처럼 죽는 순간에 온점을 찍기 전까지 인간은 삶이라는 이름의 원고지를 채워 나가며 살아간다. 우리는 사실 진짜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가 가지고 노는 한낱 인형 따위일 수도 있고, 어떤 존재가 부러 만들어 놓은 인위적인 판 위에서 남의 의지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 컴퓨터 시뮬레이터일지도 모른다. 종종 사람들이 떠드는 이상한 진실같은 이야기들은 삶이 한 장짜리 종이 위에 턱턱 쓰여지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소설같은 삶도 다 거기에서 비롯된 말일지도 모르지.
빡빡하게 이어지는 삶, 강제로 쥐여지는 몇 칸들의 쉼, 그 위에서 다른 사람들과 휩쓸려 가며 살아가는 인간. 빙글빙글 돌아가는 일상의 바퀴는 과연 각각의 인간들을 위한 하나의 제대로 된 일대기를 찍어내고 있을까? 아침에 일어나서 나갈 준비를 하고, 회사에 출근하고, 똑같은 회사 업무를 소화해내고, 퇴근하고, 잠깐의 여유를 즐길 때도 없이 잠자리에 드는 사람들은 한 둘이 아닐 테고, 그런 사람들도 저마다의 생각과 특별한 하루들이 있을 텐데 그것들을 잘 기록하고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만약 사람들이 정말 원고지에 쓰여지고 있는 한 인물이라면 자신의 이야기가 쓰인 원고지 위에 서서 자신을 보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싶었다. 글자 하나하나를 곱씹어 보며 삶을 추억하고 빽빽한 글자들을 손 보아 한 칸씩 띄어쓰기를 하고, 조금 더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기억나지 않는 과거의 단편과 같은 생각들이다.
언젠가 했던 생각들을 되짚으며 나는 눈을 비볐다. 초점이 나가 흐릿하게 보이는 화면은 예전과 같고 변한 게 아무것도 없다. 기억의 시작부터 나는 원고지 위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원래 사람이 맞긴 한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어떤 방법으로 들어온 건지 모르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누군가의 원고지 위에서 그 사람이 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문을 열어준다. 새로운 삶을 살면 다행이고, 저승으로 간다면 그 또한 그 사람의 운명이라고 생각한 게 언제부터인지도 이제는 까마득하다. 날짜나 날씨,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나는 살아 있는지, 그런 아주 기본적이고 단순한 생각을 해보기도 했지만 그 무엇도 떠올릴 수 없다.
내가 처음 눈을 떴을 때, 나는 커다란 원고지 위에 서 있었다. 내가 열심히 뛰어다녀도 한참을 뛰어야 할 만큼 큰 크기의 원고지는 어떤 사람의 이름을 시작으로 빼곡하게 쓰인 글을 가지고 있었다. 탄생의 순간부터 자세하게 쓰여진 글은 흥미를 끌기 충분했고, 아무도 없는 그곳에 가만히 있던 나는 그 글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한 발짝에 한 글자씩, 차곡차곡 밟아가며 음미하는 누군가의 삶은 절대 녹록치 않은 것이었고, 자연스럽게 한 장, 한 장 늘어가며 이어지는 인생의 원고지는 죽음까지 막힘 없이 뻗어나고 있었다. 내가 그 원고지를 다 읽었을 때쯤, 제목 위에는 덩그러니 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누구세요?”
나는 그 멀리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그 사람은 내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대답도 없이 원고지에 쓰인 이름만 또박또박 읽고, 또 읽었다. 점점 떨리는 목소리는 아마도 툭, 툭, 떨어지는 물기를 들고 버티기 힘들어 그러는 것 같았다. 이 이름이 누구의 이름이길래 이 사람은 이렇게 슬퍼하며 읽고 있는 것일까. 혹시 이 원고지에 나오는 글의 주인일까? 그런 잡다한 생각을 하며 끝에서부터 천천히 다시 시작으로 돌아갔다. 아직 제목 위에 있는 그 사람을 마주하는 자리에서 그 이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을 때, 울음이 몽글몽글 차오르는 눈이 별안간 커다란 눈물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혹시 당신 이름이에요?”
내 물음에 그 사람은 아주 작게 고개를 저었다. 신경 써서 보지 않았다면 놓쳤을지도 모를 만큼 아주 작은 움직이었다. 본인의 이름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슬퍼하는 이유가 뭘까? 누구의 이름이어야 이름만 보아도 슬플 수 있을까? 내 머리에 떠오르는 물음을 읽은 것처럼 그 사람은 차분히 이름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제 아버지 이름이에요. 물에 빠진 것처럼 푹 잠긴 목소리가 커다란 공간에 웅장하게 울린다. 그 사람에게 이 공간은 꿈이다. 저를 위해 한 평생을 일해오신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처음으로 잠에 들 수 있게 되었을 때, 이곳에 덜컥 서있었다고 했다. 커다란 글자들이 만들어낸 아버지의 이름만 보아도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며 그 사람은 차분히 설명을 이어 주었다. 혹시나 제 아버지의 이름이 아닐까봐 몇 번을 읽고, 또 읽었단다. 그리움이 가득 묻어난 목소리는 꼭 당장 눈앞에는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주름진 뺨을 쓰다듬는 듯했다. 탄생도 시작하지 못한 이 이는 이 원고지를 읽어나가며 얼마나 울 생각으로 이렇게 벌써부터 눈물을 쏟아내는 것일까?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 사람의 손을 이끌었다.
‘19xx년 xx월 xx일, 탄생이었다.’ 문장의 시작은 그러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모든 인간의 시작은 동일했다. 탄생이었다. 이 문장은 단 하나도 변하는 것 없이 똑같이 등장했다. 마찬가지로 죽음 또한 마지막을 늘 한결같이 장식했다. 자식이 바라보는 아버지의 어릴 적 모습은 참으로도 미묘한 것이었다. 눈물이 넘쳐 흘러 머리 전체가 바다에 빠진 것 같은 사람이 입술은 이상하게 웃음을 짓고 있다. 눈 가운데에는 자그마한 호기심도 콕 박혀 있는 것 같았다. 사진을 봐도 잘 믿기지 않을 부모의 과거는 글로 읽으니 더 세세하고 생기 있었다. 현실감이 가미된 잘 쓰여진 글은 살아 생전의 아버지가 해주신 기억을 떠오르게 했을지도 모른다. 울면서 글을 읽는 그 사람을 보며 나는 그렇게 추측을 해보았다. 내가 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 사람이 한 글자, 한 글자 밟아나갈 때마다 원고지는 새로운 문장을 하나씩 내놓았다. 기차선로처럼 쭉 이어지는 원고지를 따라 읽어가던 그 사람은 어디에서 꺼냈는지 모를 빨간색 펜을 꺼내들었다. 한눈에 봐도 사람이 쥐기에 턱도 없이 커다란 사이즈였다. 오히려 이 원고지를 쓰고 있는 사람이 들고 있을 법한 어마어마한 사이즈의 펜이었다. 자기 몸뚱아리만한 펜이 부담스럽지도 않은지 그 사람은 그것을 들고 북북 선을 긋기 시작했다. 검은 글씨 위에 박히는 빨간 잉크들이 이질적이게 꽃처럼 피어오른다. 한 원고지에 몇 번이고 선을 긋던 그 사람은 그 위에 주저 앉아 제멋대로 원고지에 글을 잔뜩 쓰기 시작했다.
모두가 알다시피 정사각형의 칸으로 이루어진 원고지 주위는 새하얗게 비어있다. 거기에 빼곡 글을 채워넣기 시작한 그 사람의 얼굴은 꼭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진지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흰색과 검은색 밖에 없던 세상에 빨간색 꽃이 자꾸, 자꾸 생겨난다.
나는 그 행위가 참으로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아버지라 한들 남이 분명할 텐데, 이 이는 겁도 없이 남의 원고지에 손을 대고 저가 하고 싶은 말을 빨갛게 채워나간다. 그 말에는 원망도 있었고, 아버지를 두둔하는 글자도 있었고, 오히려 부정하는 문장도 있었다. 눈물은 이미 다 말라버린지 오래였고, 떠나보낸 이를 그리워하던 얼굴은 이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후회보단 원망에 가까웠고, 그리움보단 혐오가 조금 더 보였다. 아까 흘린 눈물은 다 거짓말인 것처럼 말이다.
‘○○○은 자식을 아주 사랑했다.’
“○○○은 자식을 등한시 하는 사람이었다.”
‘술을 먹고 귀가하는 행위는 그에게 아주 작은 행복과도 같았다.’
“그 이후의 행위는 가족들에게 지옥과도 같았다.”
이 이가 다는 주석은 문장과 반대인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원고지가 생각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이 사람이 생각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특히 더 그랬다. 눈물을 흘릴 때에는 아버지를 꽤나 그리워하는 사람 같았는데 이제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가식이었던 걸까? 그런 생각을 했다. 원고지의 중간은 그렇게 빨간색이 가득한 페이지들로 바뀌었다. 원고지의 주인인 아버지는 이제 노년을 바라보고 있다. 펜은 그 때쯤 멈추었다.
“우습네요.”
“네?”
“우스워요. 제가 너무 바보 같아요.”
왜 그리워했지? 저는 이 사람을 왜 그리워했을까요? 이렇게 못된 사람이 죽었는데 저는 당연하게 울었어요. 아버지니까 그래야 하는 것인줄 알았다구요. 근데 이게 뭐예요? 스스로 자랑스러워 했던 모습들은 모두 저에게 폭력이었어요. 아버지가 저를 사랑했단 사실도 이 글을 읽지 못했다면 평생 몰랐을 거예요. 우수수 쏟아지는 말들은 꼭 아까의 눈물과 같아 보였다. 물기가 가득하고, 미묘하게 짠내가 난다. 이 사람은 꼭 눈물을 입으로 쏟아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읽었던 감동적인 이야기는 이제 핏빛의 폭력으로 가득했던 누군가의 피해기록으로 바뀌었다. 그 사람은 더 이상 글을 읽을 의지가 없어보였다. 펜을 던져버리고, 멍하게 저가 쓴 빨간 글씨만 쳐다보고 있다. 눈에 생기도 사라져버렸다.
“오늘 꿈은 이상해요.”
“…….”
“아마 기억에 오래오래 남겠지요?”
더 이상은 보고 싶지 않아요.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하며 처벅처벅 걸어 문을 향해 나아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 발걸음은 단호해 보였고, 그 끝에 질질 끌려가는 그림자는 미련 같았다.
쿵, 문이 닫히고 나는 빨간색 원고지 위에 서있다. 차분히 노년의 글을 다시 읽어본다.
‘사랑했단다. 내가 못난 아비였어도 마음은 그렇지 않았어.’
마지막 말이 이제 다시 보니 모순 덩어리였다. 폭력으로 가득했던 한 때와 늙어버린 아버지, 자식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말하며 죽음을 맞이한 후 떠난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도 그의 삶을 모두 부정해버리는 자식. 오늘은 여백에 붉은 피가 가득 채워졌다. 그것이 자식을 위한 희생으로 토해낸 아버지의 피인지, 폭력의 밑에서 눈물로 지샌 자식의 피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눈물을 토해내는 피해자의 손을 조금 더 꼭 잡아주고 싶은게 당연한 인간의 마음일까? 그 사람이 두고 간 펜을 든 나는 나머지 원고지에 서서 작은 기록을 남긴다. 언젠가 꺼내볼 누군가가 이 아버지를 나보다는 더 정확하게 판단해주었으면 한다. 나처럼 감동적인 이야기라고 착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자식이 생각하기에 나쁜 아버지였음. 사랑과 별개로 폭력을 휘두른 점을 잊지 않길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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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원고지가 사라지고 나서, 나는 몇 번의 원고지를 더 만났다. 그 때 원고지를 읽을 사람이 와서 함께 읽은 경우도 있었고, 혼자 원고지를 읽고 떠나보낸 경우도 꽤 있었다. 가끔 나와 함께 원고지를 읽는 사람들은 늘 색다른 행위를 하고 떠나곤 했다.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를 펜으로 지난 번과 달리 칭찬을 적는 경우도 있었고, 자기 마음대로 띄어쓰기를 몇 번이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원고지를 수정하는 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아예 찢거나 구긴 사람도 있었다. 모두들 흰 여백을 가만히 놔두지 못하고 다 망친 채 문 뒤로 사라져버렸다. 내가 그 사람들을 말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어서 새롭게 변해버린 원고지를 그냥 보고만 있어야 했다. 나중에는 그렇게 바뀐 원고지를 다시 읽어보는 것도 새로운 재미가 될 정도로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하게 원고지에 새로운 것들을 빼곡 채워넣었다.
방금 나타난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눈물 한 점 없이 깨끗한 얼굴로 나타난 이 사람은 이 공간이 무척 익숙해 보였다. 이름을 읽어보고, 척척 새로운 원고지로 향하는 발걸음에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당연하게 펜을 꺼내 들었고, 북북 긋는 선은 거침없이 뻗어나갔다. 내게 한 마디도 말을 걸지 않고 이 행위를 시작하는 사람은 미묘하게 내 기분을 나쁘게 했다. 내가 살고 있는 공간에서 나를 무시하는 행위는 꽤나 자존심을 긁는 행위였다.
“저기요!”
그래서 큰 소리로 그 사람을 불러세웠다. 그제야 얼굴을 든 사람은 이제껏 본 사람들 중에 가장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해맑게 웃은 그 사람은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게 했다. 나와 악수를 마친 이 이는 내가 꼭 물꼬를 튼 것처럼 말을 이어갔다. 자신의 이름부터 나이, 성별, 그 외의 개인 정보들을 모두 쏟아냈다. 생각보다 많은 나이였고, 이 원고지의 주인이기도 했다. 나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원고지에 손을 댄 게 이해가 될 정도로 성격이 급한 사람이었다.
“이런 생각 해본 적 있었거든요. 내 일생이 담긴 소설이나 원고지 같은 거 말예요.”
“아, 그러세요?”
“네. 그래서 이미 적어둘 말도 잔뜩 생각했었어요. ‘나는 이때 이랬으면 좋았을 거고, 이렇게 바꾸면 내 삶도 바꾸어지겠지.’ 이렇게 생각한 것들이 잔뜩이에요. 그걸 실천하는 중이구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도 제멋대로 쓰면 이대로 삶을 살아갈까요? 그럼 ‘눈을 뜨자마자 복권에 당첨되었다.’라고 쓸 거예요. 그렇게 되면 너무 좋겠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어……. 당신 말대로 좋을 것 같네요.”
그렇죠? 그 사람은 내 말에 대답을 하고 원고지를 고치는 걸 이어나갔다. 빈칸을 늘려서 여유를 만들고, 빈칸에서 하고 싶은 것을 여백에 잔뜩 적는다. 그리고 나서 저가 못난 모습은 다 지워버리고, 잘난 것들은 부풀려 적기 바쁘다. 나는 원고지와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서 가만히 그 행위를 바라봤다. 같이 대화를 하고 원고지를 읽어나가고 싶었는데 원고지를 고쳐나가는 모습에 질려버렸다. 굳이 더 읽고 싶지 않았고, 곁에서 말을 걸고 싶지도 않았다. 금방 원고지의 끝까지 빼곡하게 채워넣은 그 사람은 손으로 땀을 닦는 척 얼굴을 닦았다. 얼굴엔 땀이 단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그 행위까지 너무 작위적이어서 나도 모르게 저절로 올라온 한숨을 푹 내뱉었다.
“신에게 기도하길 잘했어요. 다음 번에도 이렇게 기도하고 올 수 있으면 좋겠네요.”
“아아, 네.”
“전 가볼게요. 수고하세요.”
여기 있는 이래로 가장 조금 머물다 사라진 사람이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그제야 잔뜩 수정된 원고지를 읽는다. 거북했던 그 사람 그대로 거북한 문장이 참 많았다. 소설도 뭣도 아닌 글이 내 눈을 어지럽히는 것 같다. 나는 그 사람이 새로 채워넣기 시작한 미래의 글은 제대로 읽지도 않고 원고지를 떠났다.
사람은 참 다양하구나. 쓸 데 없이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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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새로운 사람이 찾아왔다. 버석하게 마른 눈은 원고지의 이름을 몇 번이곤 읽다가 꼭 감아버렸다. 괜찮으세요? 내가 조심스레 건넨 말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얼굴을 쓸어보고, 뺨도 때려보고, 글자를 몇 번 더 읽어보고 나서야 현실을 인정했는지 자리에 주저앉는 모양새가 허탈해보였다.
“괜찮으세요?”
나는 다시 한 번 더 물었다.
“어, 네. 감사합니다. 괜찮아요.”
“누구신데 이렇게 힘들어하나요?”
나는 원고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입을 몇 번이고 달싹이던 사람은 내게 정확히 대답을 주지 않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원고지에 쓰여진 본인은 아닌 듯한데 어떤 관계인지 이야기해줄 생각은 없어보였다. 천천히 읽어보세요. 해줘야 할 말인 것 같아서 툭 내뱉었다. 내 말을 듣고 나서야 그 사람은 몸을 일으키고 글자를 밟아 나간다. 원고지는 새로운 손님에게 또 새로운 이야기를 내어준다. 나도 처음 읽어보는 원고지라서 그 사람과 조그마한 거리를 벌려두고 차근차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탄생부터 조금씩 자라나는 아이는 참 밝고 착한 것 같았다. 대사는 모두 칭찬으로 가득했고, 등장하는 인물 모두 행복해 보였다. 어두움이 없는 이야기다. 친밀함을 차곡차곡 쌓아올리고 신뢰를 우뚝 세우는 멋진 친구들, 단 하루도 변하지 않고 옆자리를 지켜주는 친구들, 따스한 온기를 나누는 연인은 없을지라도 그의 인생에 찬란하지 않은 순간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연인의 존재는 굳이 필요하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힘들어하는 원고지 위의 사람이 참 이상하게 느껴졌다. 원고지의 주인공은 가까운 이가 보아도 웃음짓게 할 수 있을 만큼 따스한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다. 싸운 사람은 평생동안 존재하지 않았고, 이별하는 법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에게 미련이 남은 사람이어도 원고지를 본다면 그 미련조차 느끼지 못할 것 같은데 원고지 위의 손님은 미련보다 더욱 진한 감정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왜 이렇게 슬퍼하시는 건가요? 다시 물어본 질문에도 답은 되돌아 오지 않았다. 그저 펜을 쥐고 몇 개의 이름을 지울 뿐이었다. 잉크에 잔뜩 적셔진 종이가 물기를 머금고 제 질감을 잃을 때까지 그 이의 행동은 반복되었다. 벅벅, 종이를 긁는 소리가 공간 안을 가득 채운다. 그 소리는 꼭 누군가를 벌하는 매의 소리 같기도 했고, 상처에 올라온 딱지를 헤집는 아픈 소리 같기도 했다. 절대 좋은 소리는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는 소리였다. 긋는 본인은 울지 않는데 나는 어쩐지 눈물이 났다. 앞서 먼저 글을 읽고 수정을 시작한 터라 잉크 밑으로 사라진 이름을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이의 이름이 사라진 것처럼 뚝, 뚝 눈물이 떨어졌다. 원고지에는 투명한 얼룩이 하나씩 새겨지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난 후, 마지막 장까지 모두 이름을 지운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이제 다 없어졌네요. 제 이름.”
말의 끝에 웃음이 걸린다. 분명 행복이 담뿍 묻어나는 목소리인데 말랑하지 않고 딱딱하다. 그 어색함이 나를 놀래켰는지 나도 모르게 울음을 꿀꺽 삼켜버렸다. 그렇게 벅벅 지우던 이름이 본인의 이름이라고 솔직하게 말한 그 이는 속이 깨끗하게 비워진 듯했다. 짐을 다 내려놓은 얼굴이 즐거움으로 가득 채워진다. 속은 비어 공허한데 얼굴만 어색한 무언가로 가득하다. 꼭 가면을 쓴 것처럼 말이다. 나는 더 이상 그 이에게 질문을 할 수 없었다. 이름을 다 지웠으니 저를 대신해서 뭘 더 채울 수 있을까요? 대답도 제대로 해주지 않던 이가 나에게 물음을 던졌다. 이름을 꼭 지우지 않더라도 당연히 펜을 가지고 있다면 무엇이든 채울 수 있었다. 여백은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동의를 확인한 그 이는 자신의 이름 위에 새로운 이름을 끄적인다. 원고지에 새로이 자리를 잡는 이 또한 내가 알지 못하는 이겠지만, 나는 이 사람이 하는 일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글자를 꼭꼭 눈에 담는다. 새로운 동작은 또 한참동안 반복되고, 반복되었다. 원고지 위에 서서 글씨를 쓰는 이는 이미 땀이 얼굴에 잔뜩 흐르고 있었다. 원고지 끝까지 이름을 바꾸어 쓴 그는 펜을 내려놓고 그 위에 주저앉았다. 즐거움마저도 사라진 얼굴은 속에서 올라온 공허함으로 지배된 지 오래였다.
“공간을 조금 더 쓰셔도 돼요.”
“…….”
“여백은 그러라고 있는 것이잖아요.”
내 말에 벌떡 몸을 일으킨 그 이는 마지막으로 몇 글자를 더 끄적인 후 펜을 내팽겨쳤다. 하릴없이 굴러가는 펜
은 끝을 모르고 원고지를 벗어나 계속 또록또록 굴러간다. 내게 더 말을 붙이지 않고 그 사람은 혼자 문을 찾아 나갔다. 혼자 남고서도 그 사람이 올까 한참을 기다리던 나는 원고지가 한 장, 한 장 정리되고 있는 것을 본 후에야 마지막으로 쓴 글씨를 읽었다.
‘내가 아니라 이 사람이라면 당신의 연인이 될 테지.’
몇 번의 원고지가 스쳐 지나가도 아직 이해하지 못한 그런 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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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또 많은 원고지가 스쳐 지나갔다. 새롭게 깔린 원고지에 맞춰 방금 막 도착한 손님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어느 한 구석을 보면 잔뜩 나이를 먹은 노인 같으면서도, 또 다른 어딘가를 보면 앳된 아이의 얼굴을 한 사람이었다. 키도 성별을 구분하기 어려운 애매한 정도였고, 걸음걸이나 행동거지에서 그 무엇도 읽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정쩡한 자세로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눈만 굴려 그 사람을 읽어보려 애썼다. 원고지를 읽으면 읽을수록, 또 그의 주인이나 주변인을 만나면 만날수록 새로운 손님을 만났을 때, 또 새로운 원고지를 읽었을 때 눈치 빠르게 알아차렸던 그간의 경험은 이 이 앞에서는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가만 서 있는 나를 대신하여 먼저 인사를 해준 그 이는 바로 원고지로 눈을 돌렸다. 제 이름이었는지 또박또박 읽어보고, 아무런 질문도 없이 글을 쭉쭉 읽어나간다. 두 번째 장으로 그 사람의 발이 넘어갔을 때에야 정신을 차린 나는 그제서야 재빠르게 그의 뒤를 따라 원고지를 읽기 시작했다. 원고지는 제멋대로 사라지기를 좋아해서, 나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손님의 발에 맞춰 글을 읽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다가 원고지를 미처 다 읽지도 못하고 그대로 보내야 했던 적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읽는 속도가 꽤나 빠른 사람인지 내 걸음은 금방 손님의 발걸음을 따라잡지 못 했다. 한 글자, 한 글자 곱씹으며 읽었던 많은 사람들과 달리 입으로 글을 내뱉는 동시에 발을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대부분은 읽는 도중부터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를 펜을 들고 있었고, 또 펜이 나타나는 순간부터 글을 고치기 시작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이 사람은 펜도 없고, 고칠 마음도 없어 보였다. 길지 않은 원고지를 모두 읽고 마지막 온점 위에 털썩 앉아 원고지가 내려 앉은 공간을 찬찬히 뜯어볼 뿐이었다. 나는 그 행동이 무척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본인의 글이 아니신가요?”
“아뇨. 저 맞아요.”
“그럼 펜이 없으신가요?”
“아뇨. 펜도 있어요.”
그럼 왜 그러고 계세요? 콱 목을 막는 무례한 질문을 내뱉지 않고 꾸욱 삼켜 내었다. 이 사람의 행동을 자유롭지 않게 하면 원고지는 내 행동에 기분이 상한 걸 표현하듯이 금방 모습을 감출 것이다. 빠른 속도에 맞춰 걸었던 터라 글을 제대로 읽은 건지, 아닌 건지 이해도 가지 않는 지금 상황에서는 가만히 있는 것이 글을 한 번 더 읽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나는 한참을 이 사람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는데 이 이는 정말 일어날 생각도 없는지 계속 앉은 채로 원고지와 상관 없는 질문만 내게 자꾸 던졌다. 여기는 어딘지, 어떻게 자신이 온 건지, 나는 무얼 하는 사람인지……. 나도 고민해봤지만 잘 알지 못하는 질문들 뿐이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금방 받아들였는지 질문도 금방 끝을 맺었다. 조용하게 여유를 즐기는 사람이 답답해서 나는 혼자 몸을 일으켜 다시 글자 하나씩 곱씹어 원고지를 다시 뜯어보기 시작했다.
이 이의 원고지는 전혀 색깔이 없는 평범한 것이었다. 누구보다 특별한 인생을 산 것도 아니고, 누구보다 초라한 인생을 산 것도 아니었다. 가정도 평범했고, 살아온 삶의 곡선도 그저 그랬다. 꼭 회색 잉크로 글을 쓴 것처럼 삶이 흐림에 가까웠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맑지도 않았고, 또 비가 오기 전처럼 잔뜩 구름이 낀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그냥 흐리고 잘 티가 나지 않는 글. 딱 그런 모양이었다.
사실 이런 원고지는 생각보다 자주 나타나는 종류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자신의 원고지나, 다른 사람의 원고지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평범하지 못하고, 원만하게 굴러간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파란만장하고, 굴곡이 심한 삶을 원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대단한 기억 한 줄조차 없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이런 원고지를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회색보다 진한 검정색으로 여백을 가득 채우고 문으로 돌아갔다. 자신이 생각하는 특별하고 멋있는 것들을 여백에 잔뜩 채우고, 원고지가 그처럼 바뀌기를 원했다. 이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거의 그랬다고 봐도 좋을 만큼 대부분이 그랬는데….
“여기는 써도 되는 공간이에요. 여백이잖아요. 누군가가 채우라고 비어있는 공간이잖아요.”
“알아요. 저도 원고지에 있는 난외에 잔뜩 글을 채워 넣어 보았거든요.”
근데 왜 여기에는 쓰지 않나요? 내가 묻지 않아도 뭘 물을지 아는 듯이 씩 웃음을 지은 이 이는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글을 짓는 사람이에요. 지금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지만 다시 돌아간다면 저는 또 글을 쓰기 시작하겠지요. 그럼 저는 또 원고지를 보고 있을 거예요. 제가 빼곡하게 채워넣은 글을 읽고, 또 읽어보고 수정할 것들을 다시 빼곡하게 채워넣겠죠. 매번 그렇게 글을 쓰고, 책을 내왔으니까요. 저는 오히려 빈 원고지를 본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글을 다 쓰고 나면 원고지는 까맣게 때가 탄 것처럼 글자와 부호로 가득 찼거든요.
“그래서 그럴까요? 어쩐지 제 삶에는 더한 설명을 넣고 싶지 않네요.”
앞 페이지에는 제게 억울한 일이 있었고, 그것보다 더 앞 페이지는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들이 많더라구요. 띄어쓰기를 줄이고, 여백을 늘려 더욱 많은 이야기를 채워넣고 싶은 곳도 있어요. 근데 그렇게 인생을 고치기만 반복한다면 제가 선택해온 결정들이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 같아서요. 어쩌면 미리 쓰여진 원고지에 정해진 삶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게 또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선택해온 삶이기도 하잖아요. 운명이고, 숙명이고, 결국 뜯어보고 고쳐보고 아둥바둥거리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놔둔다면 그냥 내가 선택한 인생이 될 뿐인 것 같아서요.
그렇지 않나요? 그 사람을 말을 마치고 곧바로 몸을 일으켜 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 듣는 말은 해석하기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려서 나는 그 사람에게 어떠한 답변도 주지 못하고 그 사람을 떠나보내야 했다. 곱씹어 보고, 또, 곱씹어 본 후에 그 말을 이해했을 때, 나는 이미 새 원고지와 새 사람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이해하는 사이에 몇 번의 원고지가 오가는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냥 로봇처럼 새로온 손님을 반기고 원고지를 읽는 행위를 늘 그랬던 것처럼 했었을 뿐이었다.
원고지가 꼭 정해진 삶인 것 같아서 비난한 적이 있었다. 모두 다른 행위를 하는 사람들과 때론 거짓도 가져오는 원고지가 재미있었다. 사람들이 삶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무척이나 다르고, 이곳은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공간이란 것을 깨달은 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리고 깨닫고 난 후에야 나는 제대로 원고지를 읽고, 손님맞이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알았다.
____ 장미 therosenovel@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