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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bari Dec 24. 2024

로즈와 캐럴

한 뼘 소설

비가 밤새 쏟아진 다음 날엔 해가 참 좋아. 적도가 지나가는 건조한 이곳은 비가 온 후엔 해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잖아. 이런 날엔 외출하면 발걸음이 가볍고 경쾌하지. 그날 아침엔 하루가 무척이나 기대가 되었어. 로즈와 제인은 움푹 파인 물이 고인 길을 지나 허접한 상점에서 친구의 면을 세워주기 위해 몇 개에 물건을 집어 들었지. 동행한 캐럴은 눈치를 채고는 또 다른 상점으로 로즈와 제인을 안내했지만 그곳 역시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어. 마지막으로 온갖 물건이 배치된 대형마트에서 저렴하고 예쁜 물건을 구입했지. 참 만족스러웠어. 그리고 맛있게 점심을 먹고 즐겁게 커피까지 마셨잖아. 중간에 그 어떤 삐딱선도 없이 우린 즐겁게 굿바이를 했으니 만족스럽고 기분이 참 좋은 날이었어.


로즈가 집에 도착한 지 1시간쯤이나 지났을까. 캐럴에게 연락이 왔어. 서운하다, 배려가 없었다는 말들을 쏟아냈어. 목소리에는 '화'가 잔뜩 묻어났고 더 이상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했으니, 로즈는 머릿속이 멍해진 상태로 캐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던 것 같아. 사실은 로즈는 그녀에게 차근차근하게 설명하고 싶었지만 화가 많이 난 캐럴이 쏟아내는 말에 오히려 가슴이 냉정해진 거야. 그래서 로즈는 캐럴이 말벌처럼 마구 쏘아내는 모진 말에 맞대응을 하지 않았는지도 몰라. 로즈는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했지. 그날 말이야, 아침부터 헤어지기 전까지의 시간을 되새겨 본거야. 캐럴을 대하던 행동과 말 그리고 상점을 방문하면서 실수했던 일이 있었나 되돌아보면서 어느 부분에서 그토록 화가 났을까. 원래 이성적인 캐럴이 화를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리만큼 급하게 전화를 할 수밖에 없었는지 되짚고 되짚어 봤어.

'구입한 물건을 행사장소로 오는 날에 가지고 와달라는 그것이,  떠맡겨졌다는 그것이, 배려가 없었다는 그것이, 힘들었다.'라고 캐럴은 말했지.

로즈는 화가 잔뜩 난 캐럴에게 그런 게 아니라고 설명하려고 했지만 감정이 상한 그녀는 로즈의 말을 가로채며 아니라고 오히려 반박을 하지 뭐야. 로즈는 전화기 너머에 있는 캐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쯤 했어. 그 미안함은 진심이었지만 고개를 갸우뚱거릴 만큼 의구심은 있었어.

근데 말이야, 시간이 지날수록 로즈는 자신이 마음이 아프다는 것을 발견했어. 캐럴의 시선으로 그녀를 잘못 해석했다는 점에서 말이야. 화가 난 상태엔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싶기도 하지만 오직 캐럴은 자신감정만이 중요구나 싶은 거야. 필터 없이 뱉어낸 그녀의 말이 상대방의 마음에 비수를 꽂는다는 것을 몰랐을까. 오래된 친구 사이에 그렇게 밖에 말할 수밖에 없었나. 마치 관계를 끝내려고 하는 사람처럼 모진 말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었어야만 했나. 상대방에 말은 전혀 들으려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화가 난 감정만 쏟아냈으니깐 말이야. 그날 말이야, 로즈가 그 어떤 말을 했더라도 캐럴은 그녀의 진실된 마음을 보지 않으려고 어. 아니 보고 싶지 않았는지 모르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더라면 그렇게 무례한 말을 하지 않았을 거야. 로즈가 알던 캐럴은 그런 사람이었으니깐.

그날 말이야, 기억하니. 캐럴, 네가 내뱉은 말은 뾰족한 가시보다 훨씬 날카로운 칼날이었어. 뭐라고 할까. 말이라는 칼로 한 사람의 인격을  난도질할 수도 있다는 것, 그로 인해 상대방은 모멸감으로 밤잠을 설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야. 너를 밤새 미워할 수도 있잖아.


이틀쯤 지났을까 로즈가 떨리는 목소리로 제인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그날 말이야,  캐럴에게 내가 실수한 일이 뭐가 있을까. 어떤 점에서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했던 것일까. 물건을 그녀에게 맡긴 게 그토록 화가 난 일이었나?"

그녀는 나뭇잎이 잔잔한 바람에 흔들리는 그 떨림보다 미세한 목소리로 스스에게 말하듯 제인에게 물었다.

"캐럴이 힘들다고 하니, 미안하다고 했어. 너에게 전화를 한 것은 캐럴을 비난하기 위해서 아니라 그날 말이야, 어떤 부분에 내가 그토록 실수를 했나 싶어서야."

제인은 로즈가 깊은 고민 끝에 자신에게 전화를 했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녀는 고개를 꺄우뚱하게 저으며 로즈에게 말을 건넸다. 

"제인에게 물건을 맡겨서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아마도 우리가 그녀의 차에 동석한 것이 불편했던 게 아닐까 싶어. 그날 길도 안 좋았고. "

그게  캐럴이 화를 낸 근본적인 이유였을까. 차라리 그것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고 캐럴이 이야기했더라면 그녀를 백 프로 이해하고도 남았을 텐데 아니 더 미안한 맘이 들었을 것이다. 로즈는 캐럴이 차에 대해서 민감했던걸 잘 알고 있었기에  움푹 파인 길을 오고 갈 때 그녀의 긴장된 모습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로즈는 캐럴에게 화를 맞대응하지 않아서 잘했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다가도 문득문득 떠오르던 그날을 기억한다.

`우리 사이가 눈빛만 봐도 알아채는 그런 관계는 아니잖아. 책임자는 당신인데 나에게 책임을 떠맡겼잖아. 치밀한 성격인 줄 알았는데 감정적으로 일처리를 하네. 나도 요즘 힘든 일이 많은데 나에게 기대지 마.'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만을 입 밖으로 내뱉는 제인에 말에 로즈는 머리가 멍해질 정도로 충격적이었지. 그 어떤 말보다 책임감이 없다는 뉘앙스가 로즈에게 모멸감으로 다가왔던 거야. 로즈가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캐럴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데 말이야. 캐럴은 로즈를 다시는 보지 않을 사람처럼 모진 말을 꼭 했어야 했을까? 그 독기 있는 말이 분명히 로즈에게 아픔을 줄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말이야. 이날 후로 행사장소에서 로즈는 캐럴에게 그날 배려가 없었다며 미안하다는 말을 했지만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어.


다행이다 싶은 것은 캐럴의 아픔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짧지 않은 한 달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녀는 캐럴에게 감정대로 대하지 않았다. 제인이 옆에서 본 둘 사이에서 어떤 삐딱한 감정을 읽지 못했으나 캐럴이 로즈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시간이 잠시 흘렀다.

제인은 로즈에게서 자유와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로즈는 캐럴을 사랑하기에 그녀의 맘을 수용한다고 말했었다. 마치 그녀는 그 고백을 지키기라도 하듯이 캐럴을 수용하고 존중하고 있었다. 어쩌면 노력 중이었는지 모른다.


크리스마스이브 제인은 태양이 바다 끝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 황홀한 자연의 모습은 가슴 밑에 묵직하게 자리 잡은 덩어리를 삼켜버리는 것만 같았다. 해지는 모습 한컷을 카메라에 담는 순간, 카톡 알람이 울린다.

'제인, 사람은 참 강한 존재야. 요즘 새삼스러울 만큼 주위에 사람들이 친근하게 다가오는 거야. 아픈 시간을 통해서 깨달은 것은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나락으로 떨어지리 만큼 슬퍼하지 말라는 거야. 어떤 것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다 잃은 것은 아니라는 거지. 마음을 조금이라도 열어두면 또 다른 소중한 선물이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 큰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조금 뒤로 물러서면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돼. 뭐, 그런 걸 깨달았어. 그래서 말이야.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받아들이고 더 이상 아파하지 말자. 스스로를 위로하는 시간을 갖고 나면 마음이 한결 평온해지더라. 

제인, 그와 헤어질 결심을 한 것, 네가 많은 고민 끝에 결정한 것을 알고 있어. 동안은 많이 힘들 거야. 그러나 기억하렴. 그게 끝이 아니라는 것을. 메리 크리스마스 앤 해피 뉴이어. 제인'

그래, 로즈 너도 평안하길 바란다. 새해엔 다 잘될 거야. 달달한 화이트 와인이 목덜미를 타고 내려간다.



12월의 제라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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