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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등(4)

회복

by Bora

어느 금요일은 스왈리 선생님이 작은 왕국에서 40분 거리에 있는 큰 쇼핑몰에 가자고 했어요. 금요일마다 쇼핑몰에 외국인들이 많이 오는데 케냐 전통 물건을 구경하며 그동안 배운 스왈리를 연습할 좋은 기회라고 하더라고요. 저와 선생님을 태운 마타투라는 대중교통으로 사용하는 15인승 봉고차는 부자 동네를 지나더니 쇼핑 몰 정문에 우리를 내려놓았어요. 그 허접한 차는 까만 매연 냄새를 풍기며 다시 시내 쪽으로 달려갔어요.

몰 입구에는 카키색 제복에 장총을 들은 경비원이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참 신기했어요. 금요일 오전인데 주차장에 차가 꽉 차있었고 외국인들이 위층에서 봉지 한가득 물건을 가지고 내려와서 저도 위층으로 올라갔는데 사방이 탁 트인 주차장에 케냐 전통시장이라고 불리는 마사이 마켓이 펼쳐져 있었지 뭐예요. 커다란 주차장 가득 강렬한 색감들이 춤을 추듯 어우러져 있었어요. 얇은 사각형 천에 휙휙 물감을 뿌려 놓은 색에서 자유로움이 엿보였어요. 빨간색 바탕에 초록색과 검은색이 들어간 얇고 거친 담요와 오래된 타이어를 잘라 만들었다는 마사이 샌들, 샌들 위에 작은 구슬, 어떤 귀걸이는 제 손바닥만 한 것도 있었어요. 두상을 감싸는 스카프는 머리가 아찔하도록 화려하고 아름다웠어요.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시장에서 가슴이 두근두근거려서 다리가 휘청거렸어요.


마사이 마켓

상혁 선배!

저는 작은 왕국을 떠나 샤론 이모와 함께 ‘메루’라는 지역으로 갑니다. 나이로비에서 차로 3시간쯤 떨어진 곳이에요. 그동안 선배에게 연락 못 했던 것 정말 미안해요. 선배는 언제든 제가 연락을 하면 모든 걸 이해할 것 같았어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선배, 그럼 안녕히...」

상혁은 보미의 마음 깊은 곳에서 꿈틀꿈틀 일어나는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감정이 고스란히 그에게 전해졌다.


보미는 샤론 이모가 사는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다섯 식구가 머무는 집은 천 평이나 되었고 영국 사람이 지었다는 아주 오래된 집에는 방이 교실처럼 일자로 있었는데 그 앞으로 긴 복도가 있었다. 정원은 한국의 작은 공원에 놀러 온 것처럼 컸고 뒤 뜰 빨래 줄 부근에는 바나나 나무와 담벼락에는 보라색 패션이라고 불리는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샤론 이모가 과일 한 바구니를 보미에게 안겨 주었다. 바구니에 가득 찬 과일은 진한 보라색의 패션이었다. 샤론 이모는 비타민 C가 많은 과일이니 먹고 나면 한결 몸이 가뿐할 것이라며 했다.

보미는 과일 바구니를 품에 안고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가 패션 가운데를 스테이크 칼로 힘 있게 잘랐다. 껍데기 안에서 샛노란 과즙이 흘러나왔다. 노란 액체와 검은 씨를 아작아작 씹어 먹었다. 20개가 되나 되는 패션을 혼자 다 먹어 치웠다.

그날 밤 꿈속에서 하얀 커버가 씌워진 소파에 하영이가 앉아 있었다. 하영이는 소리 없이 웃으며 보미의 손을 잡아 주었다. 꿈속에서 하영이와 재회하며 흘리던 눈물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기쁨과 평안의 눈물이었다.


보라색 패션

보미는 지난 1년 동안 빨간 신호등 앞에서 멈추었다가 초록색 불이 켜지자 앞을 향해 다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뒤 삼일 동안 철저히 단절의 시간을 보내고 부활했듯이 보미 또한 그런 시간을 보낸 것이다.

상혁의 친구 환희와 보미의 친구 하영은

S단체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다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환희와 하영이 그리고 김 선배는 S단체에서 위대한 순교자로 기억되고 있다.

순교자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죽은 자에 대한 애도인가. 아니면 남아 있는 자들에게 더 큰 헌신과 충성을 요구하는 메시지인가.

인천공항에 도착한 상혁은 10시가 되어서야 보딩패스 2장을 건네받았다. 출발시간은 0시 03분이다. 그의 손에는 가로 10센티, 세로 3센티 쯤되는 티켓이 쥐어졌다. 종이 위로 케냐의 아이들과 환하게 웃고 보미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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