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2월 인천은 수원과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칙칙한 회색도시가 마냥 낯설기만 하다. 구 인천시립대 뒤 쪽 공장지대 연통에서는 매연이 뿜어져 나왔다. 제물포 역 주위 상가와 집은 오래되었고, 역 주위 노상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지쳐 보였다. 골목 구석구석은 지저분하고 하굣길에 아이들 입에서 마구 쏟아져 나오는 욕설들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나는 결혼과 동시에 수원에서 인천으로 발령을 받아 주중에는 K단체에서 주말에는 M센터에서 스텝으로 일하게 되었다.
1년 중 3월은 내겐 가장 바쁘고 많은 에너지를 쏟는 시기이다. 그와 함께 7월 연해주를 방문하는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를 맡게 되었다. 우리의 목표지는 러시아 연해주 나호드카라는 곳이다. 그렇게 나의 봄은 설렘과 열정으로 시작되었다.
'나호드카 비전트립'이라는 프로젝트는 K단체 대학생들과 M센터 청년들 연합으로 계획된 일정이었다. 신혼 2개월인 최 간사 그리고 신혼 7개월인 나. 우리는 용감한 여전사인 양 젊은 청년 16명을 이끌고 뱃길 15시간을 달려야 도착한다는 연해주 자루비노 항구로 출발했다.
팀원 모두 출발 전부터 새로운 나라를 방문한다는 흥분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나 또한 배로 해외를 나가는 것은 처음이다. 그러나 우리는 도착 후 어떤 일들이 팀을 기다리고 있을지 아무도 그 아무도 알지 못했다.
배 위층의 가장 싼 티켓을 구매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곳은 방 전체가 하나로 된 넓은 운동장 같은 곳이었는데 손님에게 지급되는 것은 얇은 매트리스와 얇은 이불 한 장 그리고 저녁과 아침 식사였다. 방 한쪽 구석에서는 아저씨들의 화투 치는 소리와 소주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또 다른 곳에서는 보따리장수 아주머니들이 누워서 수다를 떨며 고단한 몸을 쉬고 있었다.
배 간판으로 나와 보니 큰 여객선이 달려간다고는 전혀 느낄 수 없을 만큼 고요했다. 배가 물길을 미끄러지듯 달려 나가고 있었고, 사방으로 보이는 건 온통 검푸른 바다뿐이었다.
일행은 배 간판에서 석양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호드카에서 보여 줄 공연을 준비했다. 다들, 얼굴에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몇몇 친구들은 타이타닉의 그 유명한 장면인 배 머리에서 두 손을 하늘로 활짝 펴고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배에서 하루 밤을 자고 아침을 먹은 뒤 연해주 자루비노 항구에 도착했다. 속초 동춘 페리를 탄지 꼬박 15시간이었다. 우리들은 많은 짐과 공연의 물건을 가지고 러시아 연해주 땅을 밟은 것이다. 검역관에서 일하는 키 작은 아저씨는 고려인 3세라고 한다.
팀을 마중 나와야 할 박 선생님 도착이 늦어진다. 배 멀미를 하던 친구들은 배낭에 기대어 쉼을 청했다. 역 바닥 이곳저곳에 짐을 한 가득 싸놓고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보였다.
한국에서 몇 달 전부터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연락을 주고받던 박 선생님은 오전 10시가 지났지만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사무실로 찾아가 박 선생님의 연락처로 전화통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도착부터 일이 꼬여 가기 시작한다.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준비해 온 나에게는 이 상황을 느긋하게 즐길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책임감이 몰려오면서 온 몸이 긴장되었다.
박 선생님을 기다리는 자리 비노 항구는 낮은 지대였다. 우리가 나호드카로 가려면 앞에 거대하게 가로막힌 산을 넘어가야만 한다. 산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산 등줄기의 도로를 타고 차들이 오르락내리락 교차하고 있었다.
성경 창세기에 야곱이 형 에서를 속이고 도망가다가 잠든 벧엘의 모습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 고개를 넘나드는 차들은 야곱의 꿈에 나타난 천사처럼 보였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던 천사의 모습처럼 말이다. 지금 나의 천사는 어디쯤 오고 있는 것일까? 나는 정말 목이 빠지라 산고개를 올려다보았다.
점심시간이 훌쩍 넘은 시간이 돼서야 비상식품으로 넉넉히 챙겨 온 초코파이와 S라면을 뿌셔뿌셔 과자처럼 먹었다. 팀 리더들은 눈치가 빨라 이 상황을 잘 파악하고 나에게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들의 조원들을 잘 다독이고 있었다. 어쩌랴, 다른 선택이 없으니 말이다. 불평하고 싶어도 불평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청년들이 딱하다는 생각도 잠시, 내 마음은 다시 바싹바싹 타 들어갔다.
산 위에서 빠르게 봉고차 한 대가 내려왔다. 봉고차 문이 열리면서 한국인인지 고려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한 무더기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내린 배를 타고 그들은 한국으로 가는 사람들인 것이 분명했다. 덩치가 큰 아저씨가 역으로 바쁘게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한국인이며 우리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에게 나를 소개한 후 혹시 나호드카 박 선생님을 아시냐고 물었다. 그는 그와 자기는 친구라고 말하며 오늘이나 내일 박 선생님이 본인이 운영하는 센터에 온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곤 본인 명함을 주시며 시원시원하게 센터에 가서 박 선생님을 기다리라며 힘을 실어 주었다. 센터 책임자에게도 연락을 해 놓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타고 온 동춘 여객선을 타고 한국으로 떠났다.
역무실 고려인 아저씨에게 버스를 불러 달라고 부탁을 했다. 1시간이나 지났을 무렵 산언덕 길을 타고 커다란 버스가 우리를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 버스가 마치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처럼 내 품으로 달려오는 것 만 같았다. 잠시 18명 팀원은 버스에 짐과 몸을 싣고 명함에 적힌 주소로 출발했다.
우리에게 친절을 베푸셨던 키 작은 카레이스키 아저씨에게 고추장을 선물로 드렸더니 그는 북한 말투로 "아넵니다. 아닙네다."라 한다.
이날은 2002년 7월 초였다
러시아 땅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했다.
오후 4시쯤 버스는 우리를 싣고 1차선 고속도로를 전속력으로 달렸다. 운전사 아저씨는 순수한 러시아인이었다. 키가 큰 아저씨는 금발 머리카락에 붉은색에 가까운 피부였다. 센터 명함을 받아 든 아저씨는 앞이 뻥 뚫린 고속도로를 향해 쭉쭉 나갔다. 오후 5시쯤 하늘에 먹구름이 끼더니 지평선 저쪽에서 마른번개가 쳤다. 나는 운전사 옆에 앉아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을 걱정의 눈으로 지켜보았다. 버스 안을 돌아보니 한국에서 온 뽀얀 청년들이 무엇이 그리 좋은지 연신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도로 오른쪽 끝에서 `우르르 꽝`하며 천둥이 치며 비를 몰고 있었다. 가로등 없는 하이웨이에 오가는 차가 한 대도 보이질 않았다. 어느 영화에서 잠시 보았던 장면인 허리케인이 갑자기 우리 버스를 삼켜 버릴 것 같은 공포심마저 들었다. 천둥은 결국 무섭게 비를 쏟아내었다. 저 어디쯤에서는 연신 번개와 천둥이 잇달아 쳐 대고 있었다. 청년들은 수다를 떨고 노래를 부르며 마냥 들떠 웃고 있었다. 청년들의 모습에서 설렘 그 자체였다.
갑자기 온 세상이 깜깜해지더니 무섭게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버스는 최대한 속도를 내어 달렸지만 거친 빗속을 뚫고 나가는 게 더디기만 했다. 달려도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이 길 끝에는 분명 도시의 시작이 될 것이다.
저녁 8시 빗속을 헤치고 버스는 어렵게 주소를 찾아냈다.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센터 마당에서 흙탕물이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기사는 차는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다고 한다. 나는 쏟아져 내리는 비를 맞으며 언덕을 올라가 센터 문을 두드렸다. 건물 안에서는 아무 소리가 나질 않았다. 강한 빗줄기가 내 얼굴과 옷을 적셨다. 등줄기로 쏟아지는 빗물은 너무 차가웠다. 비를 맞으며 버스 안을 쳐다보았다. 34개의 눈동자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시, 힘차게 센터 문을 두드리니 동양인 남자가 살짝 문을 연다.
비가 그쳐갈 때쯤 버스 안에 있던 팀원들은 센터 안으로 짐을 옮겼다. 라면 박스에 포장한 짐들이 비에 젖어있었다.
우리에게 문을 열어 준 분은 센터에서 지내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큰 키에 얼굴은 광대뼈가 나와 있었고 눈은 날카로웠다. 입은 무거웠다.
센터는 3층 건물로 1층은 부엌, 화장실, 샤워실 그리고 삼십 대 후반 남자분이 머무는 방이 있었다. 2층은 예배당이었다. 한국의 작은 교회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일자로 된 나무 의자와 강대상과 나무 십자가 그리고 커튼까지 말이다. 이 예배당은 우리들의 숙소가 될 것이다. 3층은 한국 가족이 머무는 숙소라고 한다.
우리는 배가 무척 고팠다. 한국에서부터 들고 온 라면으로 저녁을 먹었다. 그동안 밥 대신 지겹도록 먹었던 라면인데 우리는 처음 맛본 음식처럼 게걸스럽게 국물까지 몽땅 마셔 버렸다. 늦은 저녁을 먹고 나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에 젖은 몸이 으슬으슬 추워 오기 시작했다. 비가 오는 날 러시아 연해주의 찬물은 유난히도 차가웠다. 물이 귀한지 한국의 깊고 긴 고무 대야 안에 물을 받아 놓았다. 모두가 물을 아껴가며 겨우 샤워를 마쳤다.
연해주의 첫날은 무척이나 긴장되었고 엄청 배가 고팠고 추웠다. 고단한 하루였다. 교회 긴 의자에 한국에서 가져온 침낭을 펴고 몸을 눕히자마자 모두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다음 날 나보다 2살 위였던 선배가 나에게 조용히 말을 꺼냈다. 그녀는 유일하게 청년들 속에 유일한 청년이 아니었다. "저 어제 한숨도 못 잤어요. 어제 총소리 못 들었어요? " "네? 무슨 총소리요" "센터 뒤에서 총소리가 두 번 나더니 문 앞에서 사람들이 와서 무엇인가 부수는 소리가 났어요. 저는 그 소리를 듣고 무서워서 밤새 못 잤어요. 거기다가 간사님은 너무 피곤했나 봐요. 코를 엄청 골았어요. 그래서 다행히 다른 청년들이 총소리를 못 들은 것 같아요. " 나의 코 고는 소리가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깊이 잠들 수 있게 했다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지만 총소리가 난 것은 분명했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골방에 머무는 아저씨에게 "저기요"라고 말을 꺼냈다. "어제 새벽에 센터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 그는 동네 깡패들이 왔다고 했다. "여기에서는 말입네다. 총을 구하기 쉽습네다. 동네 깡패들이 남한에서 어젯밤 손님들이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열댓 명이 와서 문을 두드리고 센터 간판을 떼었습네다." 그의 말투는 북한 방송에서나 들을 수 있는 말투였다. "아, 그래요. 저희가 피해를 드려서 죄송합니다." " 아닙네다. 신경 쓰지 마시라오." 그리고 그는 교회 건너편에 공동 목욕탕이 있다고 귀 뜸을 해 주었다. 우리가 벌벌 떨며 찬물로 샤워하는 게 안 쓰러웠는지 보다.
러시아는 추운 나라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사우나를 꽤나 좋아하는 것 같다. 잘 사는 사람들은 집안에 사우나 실을 따로 만들어 놓기까지 하니 말이다. 그런데 공동 목욕탕이라니 외국인들과 함께 발가벗은 몸으로 목욕을 한다는 것이 상상이 안 갔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젯밤 비에 젖은 옷을 비닐봉지에 넣어 러시아 목욕탕을 점령해 버렸다. 한국의 시골 동네에서나 있을 법한 목욕탕은 작았다. 온탕은 없었고 수도꼭지는 벽에 붙어 있었다. 뜨거운 김이 목욕탕에 한가득 올라왔다. 우리들은 열심히 구석구석에 앉아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그리고 봉지에서 옷가지들을 꺼내 빨래까지 했다. 열 명의 여자들이 빨래를 하는 모습을 보던 현지 아줌마가 뭐라 뭐라 우리에게 말을 한다. 빨래를 왜 하냐는 말 일 것이다. 그래도 멈추지를 않자 결국 책임자 아줌마까지 들어왔다. 우리들은 대충 옷을 헹구고 부끄럽게 목욕탕을 나왔다. 우리들을 질책하는 아줌마들의 눈길이 등 뒤로 느껴졌다. 이제 또다시 동네에 소문이 퍼질 것이다. 한국에서 온 무식한 젊은 여자들이 목욕탕에서 빨래를 하고 갔다고 말이다.
이틀 밤을 센터에서 보냈다. 뒤뜰에는 빨래들이 주렁주렁 널려 있었다. 청년들은 2층 교회당에서 공연을 연습하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웃음과 노랫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나와 선배는 1층 부엌과 뒤뜰을 오가며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계속 박 선생님께 연락을 시도했다. 그러나 박 선생님의 집 전화는 울림으로 끝나 버렸다.
갑자기 센터 뒷문을 열고 한국인 한 무리가 들어왔다. 그런데 웬일인가? 내가 그리 찾던 박 선생님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처음에는 박 선생님이 우리의 소식을 듣고 온 줄 알았다. 그러나, 박 선생님은 우연히 그곳에 들린 것이다. 한국에서 온 손님들을 데리고 말이다. 나는 "박 선생님 저희가 오는 날을 잊으셨어요? 분명히 저는 그저께 온다고 했는데" "아이고, 내가 정신이 없었네. 나는 내일 팀이 오는 줄 알았어. 미안해" 라며 그는 내일 아침에 나호드카로 이동하자가 했다. 너무나 쿨하게 말이다. 오늘은 한국에서 오신 손님들을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으로 모셔다 드려야 한다고 말이다.
다행이다. 박 선생님을 이제라도 만날 수 있어서 말이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쫘악` 풀렸다.
센터에서 궂은일을 도맡은 30대 후반의 남자분. 그는 북한에서 러시아로 벌목하러 왔던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일이 끝났지만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급히 한국인 선생님이 운영하는 센타로 숨어 버렸다. 아직도 북한 공안들은 이 사람을 찾아다닌다고 한다. 그는 외출도 삼가고 센터에서만 생활하고 있었다.
자유를 향해 북한에서 탈출한 그. 그러나 그는 센터 밖으로 자유롭게 나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 또한 그가 바라던 진정한 자유는 아닐 것이다. 그는 센터 안에서 만 생활하기에는 너무 젊었다.
하얀 미니 버스를 타고 나호드카로 이동을 했다. 연해주에 도착한 지 삼일밖에 안 되었는데 한 달이 훌쩍 지난 것 같았다. 나호드카 도시는 해안가였다. 하얀 돛이 달린 배들이 동네 항구에 묶여 있었다. 갈매기들이 돛대 위에서 춤을 추며 '꺄약꺄약' 소리를 내고 있었고 동네는 한없이 한가로워 보였다.
우리들은 박 선생님이 운영하는 깔끔한 센터 안으로 들어갔다. 2층 교육관 안에는 의자가 치워져 있었고 매트리스가 깔려 있었다. 1층에는 식당이 있었다.
우리를 위해 점심으로 한국 비빔밥이 준비되어 있었다. 물론 김치와 된장국도 말이다. 그동안 박 선생님에 대한 서운했던 마음이 한국음식 앞에 눈 녹듯이 녹아내렸다. 사람의 기본 욕구가 채워진다는 것은 이토록 중요한가 보다.
러시아는 초. 중. 고 기숙사 학교가 많은데 대부분의 아이들은 방학 중에도 집에 거의 가지 않았다. 많은 부모들이 대도시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나 있어서 방학중에는 아이들을 학교 밖에 있는 사설 숙소로 보냈다. 한국의 환경에서는 있을 수 없는 삶의 방식이다.
우리 팀은 그동안 준비해 온 태권무와 부채춤, 스킷드라마, 춤과 노래를 야외 공연장에서 선보였다. 알록달록한 풍선으로는 왕관과 칼, 강아지를 만들었고 한국 과자와 사탕을 예쁘게 포장해서는 선물로 주었다. 우리는 한국 노래를 부르며 함께 손을 잡고 높은 하늘을 향해 맘껏 즐거워했다. 그늘져 보이던 황금 머리카락의 아이들 얼굴에 환한 웃음이 가득했다.
고려인이 모여 산다는 동네를 방문했다. 마을은 밝은 피부의 사람들과는 반대인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를 갖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건조하고 강한 햇볕에서 살아온 탓일까? 어딘지 모르게 피부가 꽤 죄 죄 보였다. 막 사춘기가 시작된 남자아이의 눈동자가 불안해 보인다.
연해주의 고려인도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들처럼 고려인끼리만 결혼을 한다고 한다. 이곳 고려인 젊은 부부들도 대도시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나 있었다. 조부모 밑에서 자라는 카레이스키 4세들.
아, 내 가슴이 왜 이리 먹먹하단 말인가?
머리카락이 온통 희고 얼굴에 주름이 가득 한 체구가 작으신 할머니가 나의 손을 조심히 잡으신다. 그리고 조용히 물으신다. "아가씨, 조선은 안녕합네까? " "아~조선요?" 그분에게는 아직도 대한민국은 조선이었다. 그녀의 부모님 손을 잡고 떠나 온 땅 조선. 가슴 한쪽이 또다시 시렸다. "아가씨, 조선으로 언제 돌아갑네까?" 그녀가 묻는 조선의 안부. 그녀는 어린 시절 조선을 떠나 온 후 다시는 조선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녀가 말하는 그녀의 조선은 남쪽이 아닌 북쪽일 것이다. "할머니, 조선은 안녕합네다." 내 눈에 눈물이 고인다.
연해주에서 돌아온 여름 내내 무슨 이유인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증상이 생겼다. 한약방에 가서 침을 맞고 약을 먹었지만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하고 답답했다. 지금 생각하니 아마도 공황장애의 증상 중 하나였던 것 같다. 가끔 내가 사는 이곳에서도 이 증상이 종종 나타난다.
2020년 4월 연해주 나호드카 시골 동네에 살던 조선의 여인 그녀는 이미 그 땅에 잠들어 있을 것이다.
그녀가 한 평생을 연해주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았던 것처럼 나 역시 케냐에서 그녀의 무게만큼은 아니지만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가끔은 부모 형제가 있는 한국이 그립다. 나는 조선의 할머니처럼 한국에 갈 수 없는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갑자기 찾아온 코로나 바이러스로 케냐에 사는 나는 한국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2020년 4월 6일은 한국대사관과 에티하드 항공사의 요청으로 케냐 정부에서 특별기를 띄웠다.
오늘은 두 딸들이 묻는다. 막내는 "엄마, 우리 언제 한국 가? 한국 안 간 지 2년이 넘었잖아, 한국 가고 싶어. 전복이랑 낙지도 먹고 싶어." 둘째가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엄마! 나는 순두부찌개가 먹고 싶어. 케냐에 코로나 바이러스 심해지면 한국 전세기 타고 갈 거야?" 나는 "으~응. 글쎄" 라며 짧은 대답만 남겼다.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뿐 아니라 케냐 대학교와 초. 중. 고 국공립 학교가 모두 문을 닫았다. 우리의 일도 멈추었다. 저녁 7시부터는 통행금지인 케냐 시골 동네는 더욱 한적하다. 외출은 마트에 가는 날인 2주에 1번씩만 겨우 간다. 아이들은 6주째 집콕이다.
나는 문득 코로나 19 바이러스 시기에 19년 전 나의 손을 살며시 잡아주셨던 연해주의 조선의 할머니가 떠 올랐다. 그녀의 따스한 손길과 미소가 무척이나 그리운 날이다. 그리고 그녀가 묻던 "조선은 안녕합네까"라는 목소리가 내 귓가에 여전히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