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에 나는 팀들 속에서 홀로 호텔 건너편에 있는 큰 몰로 향했다. 나를 제외한 모두는 중국식당으로 옮겨 갔다. 그때 한 명의 스태프가 등 뒤에서 뭐라 뭐라 이야기를 하며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기분 나쁜 얼굴로 뒤를 돌아보자 열댓 명의 남자들이 미묘한 웃음을 흘렸다.
단체 생활에서 홀로 개인 활동을 하는 내가 어느 선배의 눈에 가시처럼 보였는지 비양양 거렸다. 그의 태도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어떤 제스처도 취하지 못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대형 몰 푸드 코너 입구에서 김 선생님을 만났다. 몇 번이나 통화를 시도했지만 통화하기 힘들었는데 그는 약속 장소에 미리 나와 있었다. 김 선생님은 키가 작았지만 그의 모습에서 강직함이 느껴졌고 나이는 50세 중반쯤 돼 보였다. 처음 만난 그와 나는 오직 정선생님으로 만 연결된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운동장처럼 커다란 푸드 코너에서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희선이가 너무 성급한 결정을 했습니다.”
그는 정선생님을 나무라듯 말했다.
나는 김 선생님과 점식을 먹으며 정선생님이 그린 엽서와 두툼한 편지를 전달했다. 내가 보기엔 엽서는 그리 멋스럽거나 눈에 띄는 그림은 아니었지만 김 선생님에게는 의미 있는 엽서 일 것이다.
1980년 대 민주화 운동을 하던 김 선생님에게 대한민국은 수배령을 내렸다. 그는 급히 캐나다로 넘어왔다. 갓 대학을 졸업 한 약혼녀를 남겨 두고 말이다. 그의 약혼녀는 정선생님이었다. 그는 타국에서도 끊임없이 한인신문에 대한민국 독재 정부에 대한 비판의 글을 올렸다. 한국 정부는 캐나다에 있는 그를 찾아내야 만 했다. 결국 김 선생님은 캐나다의 깊은 숲 속으로 자신의 모습을 감추었지만 그녀의 남편이 될 것이라는 희망은 버리지 않았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 난 두 사람은 집안 어른들끼리 약속한 약혼을 했지만 자연스럽게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정 선생님은 김 선생님이 캐나다로 간 뒤 연락이 두절되자 성당에서 딸아이 넷이나 되는 홀아비를 소개받는다. 사랑이 아닌 봉사의 마음으로 결혼을 시작한 그녀는 어린 4명의 딸들을 위해 미술학원을 열었다. 무리하게 빚을 내어 운영하던 미술학원은 부도를 맞게 된다.
정 선생님의 남편은 그들 사이에 낳은 두 아들과 죽은 아내에게서 낳은 4명의 딸들을 놔두고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모든 빚은 정선생님이 감당해야 만 했다. 그녀는 6명의 아이들을 혼자서 어렵게 건사하다가 첫째 아이가 스므살이 되자 자신이 낳은 두 명의 어린아이들만 데리고 다세대 가구 방 한 칸짜리로 나와 버렸다. 그녀의 옆집에 살던 사람은 나였다.
우리는 9박 10일 동안 뜨거운 논쟁의 시간을 보내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꽃의 정원을 구경했다. 그 아름다운 정원도 치열하게 살아가는 젊은 스태프들을 위로할 수는 없었다.
2003년 4월의 밴쿠버는 지루하고 피곤한 여행과 밤마다의 논쟁 그리고 M단체 선배의 무례한 말 그 모든 것이 나에게 상흔으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추억으로 남아 있음은 정 선생님의 편지 그 미션을 완수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