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몽골

우리들의 젊은 날

by Baraka

한 달 동안 내리던 장마가 멈추었다. 7월이 되자 후덥지근한 무더위가 시작되었다. 1999년 7월 초 M단체에서 간사로 일하던 나는 몽골로 비전트립을 떠났다. 스탭인 나와 3명의 형제들이 동행을 했다. 한국에서 울란바토르까지 아시아나 비행기로 5시간이 안 걸렸다. 짧은 비행에 비해 티켓은 비쌌던 것으로 기억한다.

몽골 울란바토르는 한국의 7월의 날씨와 다르게 건조하고 시원했다. 끈적거림이 없는 날씨가 어찌나 상쾌했었는지 모른다. 입국 절차를 밟는 동안 공항 어딘가에서 몽골의 특유한 냄새났다. 오래된 치즈의 꼬릿 한 냄새라고는 할까?

우리는 시내에 있는 아파트에서 머물렀다. 그곳에는 두 명의 한국 싱글 여자분이 살고 있었다.


새로운 곳에서 아침을 맞이 하는 일은 참으로 설레다. 아침 6시 아파트 밖에서 청명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군가 아침잠을 깨우려고 노래를 부르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 소리가 어찌나 아름답게 들리던지 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졸린 눈을 비비며 창문을 열었다. 아파트 공터 한가운데에서 아마도 10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서 있었다. 소년 옆에는 우유통이 놓여 있었고 그에게 사람들이 한 명, 두 명 모여들기 시작했다. 소년의 입에서 흘러나왔던 소리는 노래가 아니라 우유를 사라는 외침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우유에 홍차 티백을 넣고 끓인 달달한 차와 빵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 비전팀은 2주 동안 어린이를 돕는 NGO 단체를 통해 봉사활동을 온 것이다.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한국에서부터 준비를 왔었기에 나름 의욕이 차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몽골인은 한국인과 비슷해 보였다. 그렇치만 얼굴 광대뼈가 튀어나와 있어서 어딘지 모르게 인상이 강해 보였고 볼은 붉었고 눈은 가늘었다. 남자들의 골격은 크고 다부져 보여 외적, 내적으로 아주 강해 보였다.

우린 아침에 NGO 사무실을 가기 위해 도로가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앞에 지나가는 버스 유리에는 분당 1112-1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그때쯤 몽골은 운전대 가 같은 한국의 오래된 차을 한창 수입을 하고 있었다. 도로 위에서 한국 버스가 번호 그대로 종횡무진하며 달리고 있어 이곳이 몽골인지 한국의 작은 도시인지 착각이 들었다. 7월 의 몽골은 겨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색깔은 회색에 가까웠다. 사람들의 옷 색깔 또한 밝은 색은 전혀 찾아보기 힘들 만큼 어두웠다. 회색도시에서 유독 사람들의 눈빛만큼은 칭기즈칸 후예답게 강렬하고 예리했다.

40대쯤 돼 보이는 부부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었다. 부부는 한국에서 온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우유와 설탕을 잔뜩 넣은 홍차를 대접했다. 우유는 집에서 기르는 양에서 막 짜 온 듯했다. 나는 비릿한 우유 냄새 때문에 차를 마실 수가 없었다. 부부가 정성스럽게 대접한 고마운 맘 때문에 정말이지 딱 한 모금만 마셨다. 집안에는 양인지 염소인지 동물 냄새가 가득 배어 있었다. 양고기에 감자가 들어간 수프는 죄송할 정도로 먹기 힘들었다. 나만 후각이 예민한 것인지 몰라 주위 사람들을 살폈다. 나와 함께 온 3명의 형제들의 표정은 무덤덤해 보였고 2명의 여자분들 또한 얼굴에서 불편함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날 나는 스스로를 많이 부끄러워했다.


러시아에서 지어 준 아파트는 중앙관리소에서 석탄으로 불을 집혀 난방을 공급하고 있었다. 7월의 아파트 안은 추웠다. 12달 중 가장 아름답고 기온이 따뜻하다는 7월에는 세계 경마대회가 울란바토르에서 열리는데 그때는 호텔은 외국 관광객으로 방을 잡을 수 없을 만큼 붐빈다고 했다.

울란바토르에서 5시간을 차로 달리면 해안가 다르항이라 는 제2의 도시가 나온다. 우리들은 달리는 차 안에서 지평선 끝까지 푸르른 들판을 보았다. 초원에는 크고 작은 들꽃이 별처럼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7월의 신부가 되고 싶을 만큼 아름다움에 숨이 막혔다. 8명을 태운 봉고차는 쭉쭉 다르항으로 달려 나갔고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하늘 한번 쳐다보기 힘든 만큼 바쁘게 살아온 나에게 자연은 평화로움이라는 선물을 안겨 주었다.

나의 나이 스물아홉, 결혼 생활을 꿈꾸던 나에게 몽골의 초원이 가슴을 설레게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빌었다. 언제가 몽골 초원에서 소박한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고 말이다.


선생님 부부는 몽골어를 탁월하게 잘하셨다. 두 분의 성격은 너무나 달랐다. 남편 분은 신사중 신사처럼 말하는 모습도 조용조용하고 침착하셨다. 일처리 또한 얼마나 찬찬하신지 모른다. 그러나 아내 된 사모님은 말투와 행동이 빨랐다. 두 분은 다름의 성격으로 많이 다투었다고 했다. 18 년을 살아온 두 분은 서로 용납과 이해로 살아가고 있었다.

두 자녀는 독일에서 선교사 자녀 학교를 다닌다고 했다. 둘째인 딸이 방학으로 몽골 부모님 집에 잠시 와 있었다. 사춘기가 막 시작된 소녀는 한국말이 어눌했고 수줍음이 많았다. 소녀의 엄마는 한국말과 몽골어를 잘했지만 영어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한창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J은 엄마 하 고 대화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엄마 또한 딸과의 관계를 힘들어했다. 이런 상황에 한국에서 온 4명의 사람들은 그 가정에 활력을 주었고 J 또한 우리와 동행을 하며 얼굴이 밝아졌다.

싱글 여자분들은 NGO에서 함께 일을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꼼꼼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고 한 사람은 적극적인 성격에 열정이 많았지만 고집이 셌다. 두 사람의 성격 또한 조 선생님 부부만큼 달랐다. 좋은 일을 위해 한국을 떠나 타국에서 좋은 일을 하며 둘은 서로의 다름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조금은 단조롭고 밋밋했던 몽골의 비전트립. 우리는 여유로움과 평화로움 속에서 각자 미래에 대한 한 부분을 옅은 색으로 스케치를 했었는지 모른다. 사람과 버스, 우유 소년, 푸른 하늘, 꽃이 핀 들판, 몽골의 어린아이들과 겔 그리고 J의 모습. 그 외 더 많은 것을 기대했다면 욕심이었을지도...

나는 2001년 11월 몽골을 다시 방문한다. 2년 전에 7월의 몽골 초원을 보며 사랑을 소망했던 나는 선교를 마음에 품고 있던 남자를 만났다. 우린 6개월이란 짧은 연애 끝에 결혼을 하고 7월이 아닌 겨울에 신혼여행을 몽골로 선택한 것이다.


지난해 나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 몽골에 함께 갔던 3명의 형제 중에 D라는 가장 어렸던 친구에 대한 소식이었다. 그가 몽골로 비전트립을 떠났던 나이는 스무 살이었다. D는 강원도 원주에서 신갈에 있는 칼빈대학교를 다니며 기숙사 생활을 했었다. 두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나고 흰 바지와 하얀 티 위에 남방을 걸쳐 입는 것을 좋아했던 D였다. 새내기의 산뜻함과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던 신학생이었다. 거기에다 예의가 바르고 동정심까지 많은 심성이 고운 청년이었다.

몇 해 전 원주 연세대에서 콘퍼런스가 있을 때 부인과 두 아이를 데리고 왔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는 성실하게 큰 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을 하고 있었다. 아침에 자전거로 교회로 출근하던 그는 그만 큰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었다. 나는 그가 목 아래로 전신마비가 되어 병원에서 욕창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가슴이 너무 아파 잠이 오질 않았다. 두 아이가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다닌다는 말에 더욱 마음이 괴로웠다.

지난 6월에 우리 가족은 3년 6개월 만에 한국을 방문했다. D를 만나 보고 싶었지만 코로나19로 문병 자체가 안되었다. 그의 아내와 통화를 몇 번 한 것이 고작이었다. 내년 6월이면 병원 치료가 끝난다고 한다. 다행히도 교회에서는 그에게 생활비를 지급하고 있었다.

비전트립을 갔던 나라 중에 어찌 보면 가장 밍밍하게 봉사활동을 했던 몽골. 함께 했던 사람들은 나의 기억 속에 잠시 묻혀있었다. D은 1년 6개월 동안 병원 생활을 하고 있지만 아직 카톡을 보내지 못하고 있다. 케냐에 살아가는 나는 오늘 많이도 D가 생각이 났다. 그를 그리워하며 나는 그의 아내와 아주 오랫동안 통화를 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 긍휼과 사랑이 그에게 임하여 그의 손가락과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길, 아니 벌떡 일어나 걷길 간절히 두 손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