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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bari Oct 28. 2024

영혼의 집

제17회 동서문학 맥심상

  아주 가끔씩 꿈속에 나오는 집이 두 곳이 있다. 꿈속의 집은 현실 세계와 거의 다를 바가 없을 정도로 선명하다. 첫 번째 집은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이 듬뿍 담긴 곳이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 집을 꼭대기 집이라고 불렀다.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던 산 바로 아래에 우리 집이 있었. 집은 흙과 짚으로 반죽해서 만든 황토 벽돌로 지었고 지붕은 짚을 엮어서 만들었다. 방은 부엌을 가운데로 두고 부모님과 함께 내가 사용하던 안방 그리고 세 오빠들이 잠을 자던 작은 방 2개뿐이었다. 안방은 창호지를 붙인 문이었는데 방문을 열면 곧바로 야외가 한 눈으로 보이는 마루가 나왔. 세찬 비바람이 불고 거친 눈보라가 몰아치면 방문 바로 앞까지 빗물과 눈발이 들이닥치곤 했. 재래식 화장실 앞엔 키는 작지만 아기 주먹만 하게 열리는 살구나무와 뒤쪽엔 맛 좋은 포도나무가 한 그루씩 있었다. 작은 도랑 건너편으로 토끼를 키웠던 것도 어슴푸레 기억이 난다.   


  부모님은 과수원과 논밭을 일구며 살아가시는 농사꾼이셨는데 아버지는 한여름이면 구멍이 숭숭 뚫린 러닝셔츠와 색이 다 바란 바지를 입으셨고 흰 고무신을 즐겨 신으셨다. 아버지는 31자녀 중에 종종 막내인 나를 데리고 눈이 착한 황소 두 마리를 앞세워 풀 섶이 무성한 무덤가 옆에 말뚝을 박아 놓고 소가 풀을 뜯는 동안에 담배를 피우시는 걸 좋아하셨다. 담배 한 대를 천천히 태우시면서 저 멀리 보이는 철도 위로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지극히 바라보시곤 했다. 담이 없던 마당엔 플라타스 나무가 양쪽으로 서 있었는데 빨랫줄을 매달아 놓아서 1년 365일 내내 옷이 널려 있었다. 겨울엔 따스한 물로 빨래 한 옷을 줄에 널으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면서 금방 얼어붙었다. 바람이 불기라도 하면 옷들끼리 부딪치면서 '따닥따닥' 소리를 냈다. 가을엔 빨래 줄 한 구석에 아버지가 독사 껍데기를 벗겨서 말리곤 했는데 길쭉한  빨간색 살덩이가 마르면 효자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혹시라도 농사철에 가족들이나 이웃에 사는 분들이 일을 하다가 담이 들면 바싹 말려놓은 독사를 기꺼이 내놓으셨다. 신기한 것은 담에 걸린 사람들이 소주에 곱게 간 독사 가루를 섞어 마시면 금세 효과가 있었다.

  작은 뜰엔 봄이면 솜사탕처럼 알록달록한 매화와 앙증맞은 앵두꽃이 피었고 집 뒤에는 병아리 입모양의 감나무와 하늘 위로 높이 뻗어 오른 향나무가 장독대를 멋스럽게 장식을 해 주었다. 마당 건너편에 있던 이웃집 할머니의 과수원엔 봄이면 분홍색 복숭아꽃이 아름들이 피었고 우물가 위엔 고소한 꽃향기를 뿜어내는 밤나무와 그 옆으로 야생 산딸기가 무성하게 자랐다. 사계절 내내 사방팔방 볼거리와 먹거리가 지천이던 산아래 집은 안방 문을 활짝 열어 놓기라도 하면 무릉도원이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어느 해에 동네 가운데로 집을 사신 부모님은 내가 초등학교 6학년 3월쯤, 학교 간 사이에 이사를 해놓으셨다. 나는 전에 살았던 집보다 훨씬 편리하고 좋은 집으로 이사를 왔지만 소박하다 못해 초라해 보기까지 한 꼭대기 집을 그리워했다. 계절이 여러 차례 바뀌고 그 동네를 떠나 온지도 몇십 년이 지났지만 꼭대기집은 꿈속으로 나를 찾아왔다. 누군가가 진정 무릉도원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열두 해를 살았던 곳, 꼭대기집이라고 말하리라. 그곳에서 찍은 사진은 한 장도 없지만 아직도 내 머릿속엔 필름보다 더 선명한 추억들이 소중하게 남아있다. 이제는 아주 가끔씩 꿈속에 나오는 유년기 시절의 산아래 집은 TV도 늦게 들여놓고 가마솥에 밥을 짓고 그 어떤 장난감 하나 없었지만 아마도 신이 나에게 준 가장 특별한 놀이터였다.


  추억이 깃든 두 번째 집은 케냐 룬다 84호이다. 우리 가족은 2007 618에 케냐 나이로비에 도착한다. 4년을 지내는 동안 1년에 한 번꼴로 이사를 네 번씩이나 했고 그 와중에 셋째를 보건소에서 출산한. 경제상황이 늘 불안정하던 우리 가족은, 다행히도 지금은 케냐 45개의 부족 중에서 가장 큰 꾸유 사람들이 사는 나이로비 인근의 동네에 자리를 잡았. 현지인 사이먼이라는 나이로비 대학 졸업생아버지의 배려로 무상으로 빌려준 땅에 집을 짓고 살고 있지만 케냐살이 17년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집은 룬다 84호이다.  케냐는 치안이 좋지 않다 보니 외국인들은 무엇보다 주거지를 안전한 곳으로 정해야 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경제적으로 녹록지 않았기에 사무실과 살림을 함께 할 수 있는 주거공간을  찾아야 만했다. 때마침 케냐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지인이 자신들이 살던 집을 적극적으로 추천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겉보기에도 오래된 집은 지은 지 70년이나 되었지만 땅 면적이 천 평이나 되는 정원은 내가, 유년기에 담 없이 살았던 고향집 같아서 마음에 꼭 들었지만 도시 남자인 남편은 넓은 땅이  부담스럽다면서 이사가 길 몇 번이나 망설였다.


  룬다 84호에 살던 지인은 내추럴한 것을 좋아했던지 정원이 마치 정글처럼 어수선했다. 내 눈엔 그 모습이 사춘기 아들의 덥수룩한 머리를 깎다 만 것처럼 어수선하고 저녁엔 스산하기까지 했다. 집 위쪽으로는 잔디가 심겨 있었고 정원과 집 사이의 공간은 자가용이 족히 다섯 대가 넘게 주차될 만큼 넓었다. 시멘트가 깔려 있던 주차 공간의 바닥은 거의  벗겨져서 돌들이 울퉁불퉁 튀어 올라와 있었던 터라 누군가라도 넘어지면 무르팍이 금세 깨질 지경이었다. 희한하게도 지대가 낮은 곳에 자릴 잡은 집은 장마철이면 처마 밑 낮은 수로에서 물이 넘쳐서 거실로 이어지는 문지방까지 차오르곤 했다. 차가 두 대나 들어갈 수 있는 차고의 천정은 원목이 튼튼히 박혀 있었다. 천장이 꽤나 맘에 들었던 차고는 사무실로 꾸며서 사용했다.

  케냐는 세입자가 나무 하나라도 자르려면 주인에게 반드시 허락을 받아야 한. 주인이 흔쾌히 나에게 마음대로 정원을 관리하라고 했었기에 대청소를 해나갔다. 그때쯤 나는 셋째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배가 꽤 나온 상태에서 길버트라는 현지 청년과 함께 팡카(낫 종류)정원용 가위를 들고 다니면서 정신없이 뻗어나가는 나뭇가지를 자르고 담쟁이넝쿨을 뜯어내고 꽃이 잘 피지 않는 가시가 많은 화초를 뿌리째 뽑아버렸다. 윗 정원 질서 없이 심어진 꽃나무를 정리하고 나니 축구와 배드민트를 할 만큼이나 공간이 넓었다. 거실 창 너머로 내다보이는 잔디밭은 휑해 보였지만 한눈에 정원이 들어오니 그제 마음이 편안했다.     


  우리 부부에게는 자녀가 다. 첫째 아이는 30개월 그리고 둘째 아이는 5개월이 안되어서 케냐에 왔다. 둘째 아이는 엄마인 나의 품에 안겨서 18시간의 비행 끝에 나이로비에 도착을 했고  셋째 아이는 그 이듬해 케냐 보건소에서 태어난다. 내가 셋째를 낳고 몸조리를 한 곳은 룬다 84호이다. 창밖 너머에  탐스럽게 핀 주황색 꽃을 보면서 많이도 눈물을 흘렸다. 아기를 낳고 흘리는 눈물은 산후우울증이라고 했던가. 그때쯤 나는 사람에 대한 배신감과 상실감으로 마음이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었다. 룬다 84호는 순진했던 우리 부부에게 사람공부를 철저히 시켜준 곳인 셈이다. 그뿐 아니라 세 아이들 모두가 정원을 누비다가 이마가 찢어진 곳이고 잔디 위에 사방팔방으로 번식하는 벼룩으로 온 가족이 밤새 손톱으로 팔다리를 긁어서 피범벅이 된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집안의 모든 구조를 생생히 기억한다. 거실과 방으로 이어진 복도가 길고 넓었는데 그 공간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바닥은 나무 조각이 붙여져 있었고 높은 천장엔 서까래처럼 나무가 놓여 있었서 그 공간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하얀 페인트가 칠해진 천장 사이에 갈색의 나무들이 선명하게 드러난 것을 볼 때면 이상스럽게 안정감이 생겼다. 그것은 아마도 힘들고 어려운 타국살이에서 내가 유일하게 한국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던 공간이었는지 모른다. 임신 중에도 이사할 곳이 마땅치 않은 한 가족이 4개월을 머물다 간 곳이고 주위에 사는 한인들을 위해서 몸바사 해안도시에 생선을 대신 주문 해주고 받아준 곳이기도 하다. 밤새 버스를 타고 나이로비에  꽁꽁 얼린 생선이 도착한 날은 하루 종일 한인들의 차가 우리 집을 들락거리곤 했다. 또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현지인 정원사 길버트와 도우미 메리가 우리 식구들과 한 식탁에서 점심을 먹었던 곳이기도 하다. 우리 아이들이 한국말로 현지인인 길버트를 삼촌이라고 부르고 메리를 이모라고 불렀다. 룬다 84호에서 도우미로 일하던 메리는 오후에 컴퓨터 학원을 보내고 길버트는 운전면허 학원을 보냈었다. 그네들이 조금은 더 나은 곳에서 직장생활을 했으면 하바람우리 부부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가끔씩 꿈속에 룬다 84호가 나오면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         


  한국을 떠나 온 지 17년이나 되었지만 나의 숨결과 영혼이 깃든 고향의 산 아래 집과 케냐살이를 하면서 꼬박 두 해를 살았던 룬다 84호가 여전히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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