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목장 방
우리는 모두 기억 한편에 잔상으로 남아 있는 추억의 장소가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가족들과 함께 했던 공간, 얼굴이 가물한 어린 시절 친구와 뛰놀았던 공간, 나만의 비밀 아지트, 학교의 뒤뜰 등등.
그곳이 현재에 존재할 수도, 기억에만 남아있는 장소일 수도 있다.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다가 추억에 잠기고 잠들기 전 다시 한번 떠오르기도 한다.
나에게 추억의 장소를 하나 꼽으라면 아빠의 목장 방이 떠오른다.
어릴 적 아빠는 젖소목장을 운영하셨는데 소들이 울고 있는 목장 옆에는 회색천으로 둘러싸인 (외관상으론 귀신의 집 같은) 낡은 창고 하나가 있었다.
그곳에 들어서면 여름에도 차가운 기운이 얼기설여 있었고 퀴퀴한 창고 냄새와 사료 냄새가 섞인 묘한 냄새가 훅 하고 코를 찔렀다.
그 안에는 평생 열리지 않았을 것 같은 굳게 닫힌 두꺼운 철문 하나가 있었는데 그곳은 아빠가 만들어 놓은 작은 방이었다.
사람 손이 많이 가고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목장일을 하면 거의 목장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빠에게 그 방은 중간의 남는 시간을 달래고 일이 끝나고 고된 몸을 잠깐 뉘어 보니 아침일 때도 있던 그런 공간이었다.
백번도 넘게 목장에 가봤지만 그 창고는 무서은 마음에 절대 가지 않던 곳이었다.
어느 날 아빠를 따라 용기 내어 들어가 보니 작은 방이 있었고
그 방은 아빠의 역사와 땀방울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아니, 이런 곳을 평생 말도 하지 않았다니. 묘한 배신감마저 들었다.
여기저기 잡지들이 나뒹굴고 바닥에 흙과 발자국이 가득했으며 짚으로 만든 깔개와 남색의 꽃무늬 이불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여러 옷가지와 라디오도 있었고 침대 위엔 세월이 느껴지는 낡은 기타가 있었다.
아빠는 양희은의 노래를 독학했다며 소리가 다 나가버린 기타를 쳐주곤 했다.
소들이 코러스를 넣어주고 아빠는 멋쩍은 듯 웃으며 마무리를 하고 자! 이제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 하며 같이 그 방을 나갔다.
여기저기 거미줄도 있었고 당장 쥐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았지만 그 신기한 공간에 매료되어 자고 갈 거라고 떼쓰는 나를 끌고 집으로 가기도 했다.
무언가를 추억할 수 있다는 것은 큰 행복이다.
추억을 공유한 사람과의 관계를 더욱 소중히 만들고 괜찮은 인생이다.라고 생각하며 꺼져가는 따뜻함을 되살리기도 한다.
다른 이들의 추억을 듣는 것도 좋아하는 일 중 하나인데, 각자의 추억, 그 순간을 열심히 기억해내며 행복한 얼굴로 신나게 설명하는 모습을 볼 때면 함께 행복해 지곤 한다.
만약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을 뽑아보라면 그 방에 들러 아빠의 기타 연주를 다시 한번 듣고 싶다.
그 낡은 기타는 더욱 낡은 채로 안방 구석에서 숨 쉬고 있는데
소리도 안나는 그 기타를 버리지 않은 것을 보면 아빠의 젊은 시절과 모든 과정을 함께한 친구라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그 방에 정을 붙였듯, 아빠도 기타에 정을 붙인 거겠지.
기타와 몇 마리의 소들이 남은 작은 목장만이 그곳의 증인이고 냄새도 촉감도 공기도 모두 느껴지지만 실체는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나와 아빠의 기억 속에만 있기에 그곳이 더욱 특별하고 의미 있게 느껴진다.
몇십 년이 지나도 그 공간은 여전히 그리울 것이다.
기록은 남아있지 않기에 잊고 작은 낙서와 글로 그곳을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