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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동성 Jun 18. 2021

개나 소나 쓰는 글, 개나 소 같은 글


이십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종이책을 손에 잘 쥐지 않게 되었다. 고등학교 삼학년 때까지도 2~3일에 한번씩 책 두 권을 빌려가서 사서 선생님께 공부 안 하냐는 쓸데없는 잔소리를(다시 생각해도 그건 정말 오지랖이다) 듣던 나인데 말이다. 대학을 가면 책을 잘 읽지 않게 된다는 말이 그냥 하는 말인 줄로만 알았다. 학교 책읽기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정해진 책만 읽는, 딱 그 정도.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인터넷으로 만난 지인 분과 함께 주 1회 영미문학을 읽고 북리뷰를 하게 되었다. 이건 꾸준히 해서 벌써 2년여가 된 것 같지만, 역시 종이책의 형태는 아니다. 인터넷에서 단편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거든. 그리고 요즘도 종이책 대신 리디북스에서 e북을 읽는다.


그렇지만 역시 책의 참맛은 종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책장을 넘길 때의 사각이는 소리, 오래 된 책은 오래 된 대로 새 책은 새것인 대로 다르게 나는 책 냄새. 7~80년대에 발간된 오래된 책에서 가끔 ‘~읍니다’ 나 ‘설겆이’ 같은, 지금은 수정된 표현들을 인쇄된 활자로 마주칠 때는 그 시절의 끝자락을 살짝 엿본 기분이 들기도 한다. 협소한 자취방에서 지내는 탓에 공간 문제로 종이책을 택할 순 없으나 여전히 서점은 좋아한다는 뜻이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듯, 서점이 보이면 발걸음이 절로 그리 향한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서점 특유의 향이 나를 반긴다. 눈은 자연스레 신간 코너와 베스트셀러 코너를 향하게 되어 있다.


별다른 계획이 없고 시간만 허락해 준다면야 한 권 집어들고 앉는다. 자리가 없을 때는 바닥에라도 털썩 앉아 표지를 넘긴다. 내가 좋아하는 서점의 풍경 중 하나가 이거다. 의자가 없으면 바닥에 앉아 책장에 등을 기댄 채 독서를 하는 사람들. 이런 풍경을 서점 말고 또 어디서 쉽게 접할 수 있단 말인가? 남들 눈치 안 보고 숨어 읽기도 딱 좋다. 높게 솟은 책장 사이로 요리조리 파고들다보면 사람들이 쉽게 다니지 않는 구석진 곳을 발견하게 되니까. 굴 파는 햄스터마냥 그런 자리마다 꼭 엉덩이 붙이고 앉은 사람들이 있다. 나도 햄스터 반열에 합류. 독서 속도가 빠른 편이라 두세시간이면 한 권을 뚝딱 읽는다. 한참 책에 빠져 있다가 고개를 들면 사위가 조용한 가운데 내가 몰입해 있던 다른 세상에서 빠져나온 위화감이 들곤 한다. 묘하게 신체와 정신 사이에 유리감이 느껴지는데, 어쩌면 그게 중독적이라서 책을 읽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애정이 있는 대상이라 그런가, 나는 책에 있어서 제법 꼰대같은 편이다(겨우 이십 대 중반이 꼰대 운운하고 있으니 조금 우스울 수도 있겠다). 그림책이나 시집도 아닌데 글보다 공백이 더 많은 책, 빈 수레가 요란한 책을 볼 때마다 ‘나무야 미안해’ 를 기어코 외치고 만다. 솔직히 말하면 최근의 베스트셀러 코너를 보면 한숨만 나올 때가 많다. 펼쳐 보면 대체 뭘 위한 건지 모르겠는 책들이 있다. 예를 들자면 ‘어피치, 마음에도 엉덩이가 필요해’ 같은 류의 것들... 때로는 출판사의 상업적인 태도가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서 성질을 돋우기도 한다. 피너츠 원작만화를 일부 떼와 약 오십페이지씩 묶은 것을 한 권에 만삼천원 가량 받고 파는 것을 보았을 때 그랬다. 최소 삼백페이지는 되는 피너츠 완전판 양장을 한 권에 만칠천원이면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거든. 게다가, 이제는 출판시장도 SNS와 유튜브 스타를 먼저 찾는 추세이다. 보증수표이며 돈이 될 테니까. 그리고 그런 책들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오며 수도 없이 갈아치워진다. 회전률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진 것 같다. 출판 시장마저 ‘패스트 패션’ 처럼 ‘패스트 북’ 이 된 것 같았고, 나는 그런 흐름이 못마땅했다. 그러니 이 정도면 나를 ‘젊은 꼰대’ 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이 우월감으로 흘러가지 않게 끊임없이 자기검열을 하는 편이긴 하다. 그래서 이런 책들이 베스트셀러 매대를 점령하는 현상에 대해 내가 생각해 낸,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이 있었다. 나같이 독서가 취미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이런 진입장벽 낮고 쉽게 읽히는 책들에 더 손이 갈 테고, 그걸로 독서에 재미를 들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런’ 책들도 충분히 의미 있는 게 아닌가? ‘어피치, 마음에도 엉덩이가 필요해’ 에서 감동을 얻는 사람이 있다면 ‘어피치, 마음에도 엉덩이가 필요해’ 는 제 할 일은 다 한 것이다. 이 생각을 하니 조금 덜 짜증이 나긴 했지만, 내 안의 꼰대정신과 타고난 반골기질이 자꾸만 고개를 불쑥불쑥 들었다. 아무리 자본이 가장 큰 권력인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지만, 출판 시장이 이래서야 되는가? 개별 책이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가지는 의미와는 별개로, 이런 식으로 빠르게 갈아치워지며 양산형 책이 쏟아져 나오는 시장이 정상적인가? 다른 건 몰라도 책은 그래서는 안된다. 그런 책을 읽고 마음의 양식을 얻는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없지만, 그런 책만을 쏟아내는 시장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여전히 나는 서점에 가면 혼자 속으로 꿍얼거렸다. ‘이게 뭐야!’




그러던 중 하루는 친한 친구와 함께 지나가다 서점을 들렀다. 지혜롭고 똑똑한 친구라 내가 늘 많은 걸 배워가는 친구였다. 나같이 책을 좋아하기 때문에 나와 얘기가 통할 거라고 생각하고, ‘젊은 꼰대’ 답게 ‘개나 소나 글 쓰는 것 같다’ 며 투덜댔다. 이 말을 들은 친구는 대답했다. “개나 소나 글 써야 맞는 거지. 하지만 개나 소 같은 글을 쓰면 안 되는 거지.”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뒤통수 한 대 맞은 듯 정신이 멍해졌다. 그렇지, 개나 소나 글 써도 되는구나. 사실 그래야 맞는 거구나. 그게 올바른 세상이겠구나.


글 쓰는데는 자격이 없다. 당장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것도 글이다. 그런데 나는 출판시장을 비판한다는 핑계로 ‘개나 소나 글 쓴다’ 며 투덜대고 있는 거였다. 개나 소나 글 쓸 수 있는 세상이 궁극적으로 출판업계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 아니던가? ‘개나 소나 쓰는 글’과 ‘개나 소같은 글’ 은 엄연히 다르다. 오히려 아무나 글을 쓸 수 있어야 더 다양하고 풍부한 내용의 책들을 만나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얼마나 바보같은 소릴 하고 있었는지! 반면 ‘개나 소같은 글’ 은 지양대상이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글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지에 대한 책임감이 있다면, 글을 아무렇게나 쓰면 안 된다. 일차원적인 예를 들어 보자. 틀린 정보를 맞는 것처럼 알고도 적은 글은 ‘개나 소 같은’ 글이다. 그걸 보고 틀린 정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딘가에는 생기기 마련이니까. 그러니 우리는 ‘개나 소 같은’ 글은 지양하되, ‘글 쓰는 개나 소’ 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내가 브런치를 택한 이유도 글 쓰는 개나 소로 가득한 공간이기 때문이 아니던가? 다들 개나 소라는 말에 불쾌해 말라, 우리는 모두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니까. 그러니 이 자리의 ‘젊은 꼰대’ 는 오늘부로 글 쓰는 소가 되었음을 공공연히 발표하겠다(개가 아니라 소인 건 그냥 내 별자리와 띠가 모두 소라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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