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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앞에서 다시 쓰는 버킷리스트

화려한 여행 대신 그림과 글에 나의 삶을 담고싶다

by 봉순이


"당신의 버킷리스트는?"


질문지를 받아든 순간, 펜을 든 손이 멈췄다.

서른 살 때라면 A4 용지 뒷면까지 빼곡히 채웠을 텐데.


동남아, 유럽, 미서부… 지도 위에 핀을 꽂으며 '언젠가는 꼭' 떠나리라 꿈꾸던 여행지들, 그리고 한국에서는 해볼 수 없는 액티비티들을 적어 내려가며 혼자 신나해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해외로 나가는 것만이 삶을 넓히는 유일한 길이라 믿었다. 그래서 서른 살, 한국을 벗어나야만 인생이 더 커진다고 확신했던 나는 잘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네팔로 봉사활동을 떠났다. 그 무모함과 열기 속에 서른을 보냈고, 마흔은 결혼이라는 또 다른 여행으로 흘러갔다.


그러는 사이 들끓던 마음도 조금씩 잦아들고, 삶을 바라보는 시선도 차분해졌다. 그리고 이제 오십을 향해 걸어가는 지금, "당신의 버킷리스트는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다시 떠올려본다.



매주 월요일, 수채화에서 피어나는 삶의 색

매주 월요일, 나는 구갈동 주민센터에서 수채화를 배운다. 큰 기대 없이 등록했던 이 수업에 어느덧 9개월째 출석 도장을 찍고 있다.


어르신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다 보면 늘 놀라운 순간을 마주한다. 그림은 주름 같다. 한 장의 종이에 그분들의 삶이 고요하게 스며 있다. 나이 듦과 살아냄이 색과 선으로 번져 나오는 그림들을 볼 때마다 마음 한쪽이 환해진다.


선생님의 그림 앞에서 다시 던진 질문

얼마 전, 우리를 가르치는 안준섭 선생님이 안국역 근처 서머셋호텔에서 개인전 '풍경을 듣고'를 연다는 소식을 들었다(10월 23일~2026년 2월 23일까지). 아직 그림을 배운 지 9개월밖에 안 된 초보 수강생이었지만 선생님의 전시는 놓칠 수 없다는 마음에 전시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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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3~2026.2.23 종로구 서머셋 팰리스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안준섭 화백의 개인전 ‘풍경을 딛고’ 전시 작품. © 안준섭 화백



호텔 벽면에 걸린 그림들 앞에서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분명 풍경이었다. 하늘과 땅, 나무와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제 형태를 잃고 색의 덩어리로 부서져 있었다. 보라색 마젠타가 녹색과 부딪치고, 분홍빛 하늘 아래 노란 붓질이 흔들렸다.


어떤 그림은 두껍게 쌓인 물감 층 사이로 시간이 느껴졌고, 어떤 그림은 색의 조각들이 흩어져 있으면서도 묘하게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이건 풍경화가 아니었다. 풍경을 '본' 사람의 감정이 그대로 색이 되어 번진 것이었다.


그것은 그림이 아니라 시(詩)에 가까웠다. 감수성 깊은 시인이 낯섦과 아름다움의 경계에서 조용히 시를 낭독해 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차오르는 걸 느꼈다. 나는 스스로에게 조용히 물었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그 답은 생각보다 분명했다.


"나의 삶을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다."


전시를 보고 돌아온 뒤, 마음 한편이 들뜨면서도 답답했다. 나만의 방식으로 살고 싶다는 건 알겠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브런치와 블로그에 꾸준히 글을 올리지만 팔로워 수는 늘지 않는다. 하루 종일 무언가를 하고 있는데도 손에 잡히는 성과는 없고,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라는 불안이 밀려오기도 한다.


다음 수업 시간, 나는 선생님께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개인전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그림 아이디어는 어떻게 떠올리세요? 번쩍 계시처럼 오는 건가요?"


선생님은 잠시 붓을 놓으시더니,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그냥 매일 화실 가서 앉아 있어요. 번뜩이는 건 오지 않아요. 그저 하면서, 오래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렇게 만드는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속에서 무언가 '툭' 하고 떨어졌다. 예술에도 로또는 없다. 결국 매일 끈질기게 자기 고독을 견디며 그 안에서 자기만의 색을 찾아야 한다. 나는 고통은 견디려 하지 않고 열매만 보고 부러워하고 있었다.



나의 2막을 위한 새로운 버킷리스트


예전엔 세상을 넓히기 위해 '밖으로' 떠났다면 지금은 내 안의 세계를 넓히는 것이 더 큰 여행임을 깨달았다. 그림을 그리는 일, 글을 쓰는 일, 작은 일상마저도 나만의 관점으로 담아보는 일. 그것이 내 인생 2막의 새로운 버킷리스트가 되었다.


주민센터에서 만나는 어르신들처럼, 자신의 삶을 '작품처럼' 다루는 사람들에게는 담백하지만 강한 빛이 흐른다. 나도 그 빛을 조금이나마 품고 싶다. 그래서 요즘은 그동안 그려온 수채화를 액자에 하나씩 넣어 정리하고 있다. 조만간 온라인에서 작은 개인전도 열어볼 생각이다. 서툴지만, 그 안에는 분명히 '내가 살아온 흔적'이 있다.


나는 이렇게 버킷리스트를 다시 쓴다.


하루에 한 장, 내 마음을 담아 그림 그려보기

하루에 한 편, 짧은 시라도 써보기

하루에 조금씩, 좋은 문장과 책을 읽어보기

하루에 하나씩, 나를 빛나게 하는 작은 실천을 쌓아보기


이런 작은 실천들이 모여 내 인생 2막을 만들어갈 것이다. 예전에는 비행기 티켓이 나를 넓혔다면, 이제는 사소한 하루의 감정들이 나를 다시 살아가게 한다. 버킷리스트의 방향이 '밖에서 안으로' 옮겨온 지금, 나는 비로소 나의 세계를 걷기 시작한 것 같다.


내일은 또 무엇을 그릴까. 그 생각만으로도 나는 여전히 '여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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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자에 담아보니 더 완성도가 높아보인다. © 황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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