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설과 추석 같은 명절에 대한 기억은 정말이지 말 그대로 풍성하다로 표현할 수 있다. 전이나 나물 같은 명절 음식은 널려있다는 말이 정확할 정도로 집안 구석구석에 준비되어 있었고, 오랜만에 만나는 사촌동생들은 언제나 나를 잘 따라서 우르르 동네를 몰려다니며 대장 노릇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여기에 친척 어른들도 만날 때마다 장손이니까, 초등학교 입학하니까, 이제 몇 학년이니까 등등 다양한 명분을 구실 삼아 두둑한 용돈을 쥐어주니 모든 것이 완벽한 3일의 연휴였다. 물론 용돈은 온전한 금액이 최종적으로 내 수중에 떨어질 때가 거의 없었지만.
용돈이고 뭐고 모르는 그것보다 더 어린 때에는 명절에나 입어볼 수 있는 한복이 그야말로 특별하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유치원에서 생일잔치 때 입는 옷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한복만 입으면 기분 좋아했었다. 물론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날마다 쑥쑥 자라나는 키로 인해서 몇 번 입어보진 못했다.
한복을 입고 지낸 명절 중에 유난히 선명하게 기억나는 때가 있다. 빨간색 저고리에 색동 복주머니를 차고 여기저기 새배를 하러 다녔던 기억. 그때의 설엔 눈도 한가득 내렸었다. 아버지가 어린 시절을 보낸 대구 옥포 쪽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러 갔던 것 같은데, 지금에야 옥포 근처까지 지하철이 들어가 있을 만큼 대구 도심과 접근성이 좋지만 당시엔 마을 여기저기 촌집이고, 마당 한쪽 외양간에서 소를 키우는 풍경이 자연스러운 시골이었다. 그날은 누군지도 모르는 어른들을 만나서 "내가 니 몇 촌 뭐다" 하는 간략한 설명을 듣고는 꾸벅 세배하고 옆집으로 가서 다시 인사드리는 걸 여러 번 반복했다. 그중엔 쪽진 하얀 머리에 비녀를 꽂고 한복을 입은 사극에서나 볼법한 할머니께도 새배드렸던 기억도 있다. 그렇게 아버지의 옛 동네를 다 돌고 나서는 집으로 오는 길목에 있는 두류공원에 들러 성당못에서 잉어 밥도 주고 눈사람도 만들고 사진도 찍고 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때 찍은 사진 때문에 다른 명절보다 더 기억 속에 잘 남아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이였던 나에게 명절은 절대적인 행복이었다. 하지만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다르게 느껴지긴 했다. 인생에 큰 굴곡 없이 무난하게 흘러간 터라 진학이나 취업 따위로 명절에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 아니었지만, 분명 변화가 많았다. 예전처럼 친척들이 많이 모이지도 않았고, 동생들도 어느새 사춘기랍시고 찾아와선 어색하게 존댓말을 하기 시작했으며, 명절 제사음식 따위로 할머니와 엄마나 숙모 사이에 언성이 높아질 때도 있었다. 엄하고 고집 센 할머니 밑에서 명절을 준비했을 숙모와 엄마에겐 명절은 즐겁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결혼하고 아내와 함께 명절을 보내게 된 후부터는 그 부담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명절 준비와 그로 인한 갈등은 상상을 초월했다. 벌써 10년은 더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숙모와 할머니 두 분이서 거의 모든 준비를 힘겹게 이끌어갔기에 할머니 연세도 있고 하니 제사를 간소화하거나 없앴으면 하는 마음이 다들 있겠거니 했는데, 내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직접적으로 하는 일이 없으니 아무 생각이 없으셨고, 할머니는 평생을 놓지 않고 해 오신 제사라는 일에 대한 일종의 강박이 있으신 것처럼 좀처럼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런 분위기 때문에 반강제적으로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고, 제사를 대하는 온도차가 다르기에 할머니를 만족시키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언성이 높아졌고 상처받는 것은 아내였다. 그렇게 명절이 다가올 때면 숨 막힐 듯 괴로웠고, 명절에 대구 본가에 내려가면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이었다. 코로나가 심해져서 내려가지 않았던 명절엔 오히려 코로나가 사랑스럽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이번 설은 아이가 태어나고 첫 번째 맞이하는 설이었다. 여전히 내려갈 때는 조마조마했고, 지낼 때는 가슴 조리며 지냈다. 그래도 고맙게도 아내가 많이 참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 처지를 많이 이해해준 덕에 큰 소동 없이 무난히 지날 수 있었다. 거기에 이제 막 기어 다니고, 어른들에게 안기려고 하고 방실방실 웃으며 재롱을 떠는 아들도 무거운 부담과 걱정을 씻어주는데 한몫했다. 할머니며 아버지, 고모에 사촌동생들까지 모두들 둘러싸고 예뻐해 주니 아빠 된 사람으로서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 아이로 인해서 웃을 일이 많아지니 분위기도 더 밝아졌다. 설 당일 아침엔 어른들께 세배하는 자리에서 아들도 이리 기며 저리 기며 세배 아닌 세배를 같이 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명절의 웃음소리. 어릴 적 느꼈던 명절에 대한 감정이 조금이나마 다시 느껴지는 것 같았다. 장난 삼아 아들에게 세뱃돈을 건네던 어른들을 재쳐두고 할머니께서 안방 한편에 고이 걸어 두었던 색동 복주머니를 가져오셔 선 아들의 허리춤에 채워주셨다. 그 오래전 설날 내가 차고 다녔던 복주머니 었다.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30년 가까운 세월을 새 주인을 주려고 할머니께서 가지고 계셨나 보다. 복주머니를 차고 여기저기 귀엽게 기어 다니던 아들은 금세 주머니에 용돈을 가득 채웠다.
지금도 여전히 다가 올 명절이 부담스럽다. 아내에겐 곧 부담스러운 명절 제사를 줄이겠다고 약속했다. 가족이 싫어하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 살아 있는 가족이 괴롭고 그것 때문에 화목해질 수가 없는데, 미안하지만 돌아가신 분을 신경 쓸 여력이 없다. 집안 어른들 생각은 여전히 나와 다를 수도 있겠지만, 다시 한번 어린 시절 내가 느꼈던 즐거운 명절 기분을 아들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다. 온 가족이 힘든 허례허식보다는 다 같이 모여서 화목하게 웃을 수 있는, 오랜만에 옛날 사진첩을 보고 추억에 잠길 수 있는, 귀여운 복주머니에 세뱃돈과 추억과 행복이 가득 찰 수 있는 그런 명절을 만들어가는 장손, 장남, 남편, 아빠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