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남는 시간이 있으면 주로 혼자 지내면서 내가 하고 싶은걸 했다. 결과가 별로 좋지 않더라도 '내가 한 일인데 뭐 어쩌겠어'하며 짧고 간단한 후회로 훌훌 털어버리는 참 단순하고 개인적인 삶을 살았다. 지난날의 생활 습관은 그 강력한 관성으로 인해 결혼을 하고 30대에 들어선 지금도 여전하다. 이와 같은 성격 탓에 나는 손님을 맞는 일이 참 어려웠다. 손님을 맞으려면 우선 준비해야 할 일이 많다. 내 기준에 맞는 청결도를 유지하던 집도 티끌 하나 없이 청소해야 하고, 라면으로 충분한 나의 식사를 그럴듯한 음식 대체해야 하며, 컴퓨터나 스마트 폰으로 신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나의 시간을 적당한 놀거리나 구경거리로 채울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고 손님들이 도착하면 시시콜콜한 이야기에 참여해야 하고, 최악의 경우 실제 기분과 다르게 '즐거운 척'을 해야 할 경우도 종종 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나에겐 너무나도 피곤하고, 행여 나의 행동과 결정이 타인에게 어떤 나쁜 영향이라도 줄까 불안감과 책임감을 느낀다.
특히 멀리 이사 오게 되면서 이런 걱정은 더욱 커졌다. 단양은 원래 살았던 대구나 부산과 제법 멀기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도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다. 그런 상황을 잘 알기에 초대했다면 제대로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이 더 생긴다. 그렇게 오기도 힘들고, 맞이하기도 조심스러워 신혼집 집들이는 흐지부지되었다. 손님이 오지 않는 것이 참 편하지만 , 와야 할 타이밍에 막상 없으면 섭섭한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이런 인기 없는 시골집도 초대하지 않는데 늘 찾아주는 손님이 딱 하나 있긴 하다. 멀리 외국에서 굉장히 먼길을 오가는 손님이지만 크게 부담스럽지도 않다. 경상도에서 오는 손님도 부담스러워하면서 어찌 그럴 수 있냐고 물으신다면, 사람이 아니라 말씀드릴 수 있겠다. 날이 따뜻해지면, 온 동네가 여기저기 새소리로 가득한데 그중 제비는 집집마다 처마 밑에 둥지를 튼다. 봄이면 어릴 적에 들은 동화처럼 불쑥 찾아와 소란 스래 여름을 보내고, 날씨가 쌀쌀해지기 전에 소리 없이 훌쩍 떠나버린다. 우리 집도 그들의 선택을 받은 집 중에 하나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엽고, 어릴 적 듣던 흥부놀부 이야기가 생각나기도 해서 입주 준비를 하던 때에 앞으로도 쭉 함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제비 가족도 올해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리 집 처마 밑에는 보이지 않았다. 아주 멀리 강남까지 인기 없는 집이라고 소문이 났나 보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 부부가 단양의 조용한 집을 찾아오겠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친구 A는 대학교 동기라는 참 가벼운 사이로 처음 만났지만, 어쩌다 보니 1년 후엔 같은 부대에 입대했고, 그러다 보니 2년 동안 힘들 때 서로 위로하고 의지했으며, 오랫동안 잘 알고 보니 20여 년의 가족사며 성격도 비슷한 그런 특별한 친구이다. 그리고 그만큼 오래 내 친구의 옆 지켜온 그의 연인 T는 멀리 슬로베니아에서 A를 만나 여러 나라를 오가며 연애를 하다 쾌적한 유럽의 생활을 뒤로하고 미세먼지와 지옥철이 있는 서울에 이르기까지 함께 있어준 오랜 연인이자 현시점 그의 아내이다. 그만큼 나에게도 그녀 또한 특별한 친구이다. 그 친구 부부가 최근 운전에 능숙해진 기념으로 서울에서 단양까지 1박 2일 봄 휴가를 오기로 했다. 몇 년간 친구 모임에서 왕래도 있었고, 몇 해 전 제주도 여행도 같이 간 터라 아내도 두 팔 벌려 반겼다.
그렇게 오랜만에 손님맞이 준비에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딱히 더러운 건 아니었으나 깨끗하지도 않았던 집을 청소하고, 푹신하게 깔고 누울 수 있는 손님 이불도 준비했다. 마지막으로, 단양에 살고 있지만 단양을 잘 모르기에 유명한 관광지를 산책 겸 며칠간 사전 답사했다. 일주일 정도의 준비를 마치고 친구 부부가 방문하는 당일 아침 식재료를 사러 나갔다. 아내는 '요리의 진가를 알아볼 젊고 특별한' 손님을 맞을 때 매우 스타일리시한 요리를 내는데, 나에게는 이름도 생소한 밀푀유 나베가 그중 하나이다. 소고기와 각종 채소, 버섯을 겹겹이 쌓아 끓여서 먹는 전골요리인데, 그 어원이 너무 궁금해서 글 쓰기 전에 인터넷에 찾아보니 밀푀유는 '천 겹의'라는 프랑스 말이고, 나베는 잘 알다시피 냄비의 일본말이다. 듣기는 여러 번 들었는데 정확한 이름과 그 어원이 뭔지는 오늘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일본 전통 요리인줄 알았는데 어원을 뜯어보니 국적이 참 애매한 것이 전통 요리는 아닌가 보다. 여하튼 그날 아침, 먼저 정육점에서 샤부샤부용 소고기를 주문했다. 한우로 달라고 하지는 않았는데, 한우로 내어주셨다. 가격은 좀 비쌌지만 '더 맛있겠지 뭐' 하며 그냥 먹기로 했다. 그리곤 옆에 있는 채소 가게로 발걸음을 옮겨 깻잎과 배추를 샀다. 배추는 우리 텃밭에서 기르지 않았고, 깻잎은 올해 유난히 잘 안 커서 따서 먹을 수준이 아니었다. 귀찮은 천성 탓에 의도치 않게 무농약, 무비료 재배하는 우리 텃밭의 채소는 아쉽게도 선보이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간단하게 장보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뜨거운 해가 조금씩 식어가던 오후, 친구 부부는 그런 때 즘 단양에 도착했다. 친구는 서울에서 마카롱을 가져왔다. 오랜만에 보는 아기자기한 도시의 맛과 멋. 아내는 얼른 집에서 보온병에 커피를 담았고 넷은 미리 찾아 놓은 비밀스러운 작은 공원으로 향했다. 남한강이 보이는 경치 좋은 공원이지만, 관광객이 찾을만한 장소는 아니었기에 조용하고, 편안한 공원이다. 가볍게 마카롱과 커피를 마시면서 안부인사와 간단한 대화를 마쳤다. 그리곤 직접 강가에 내려가 보고 싶다는 친구의 말에 우리 부부도 단양으로 이사 오고 처음 강변에 내려가 보았다. 덩치에 비해 겁 많은 성격의 우리 부부는 풀숲에서 뱀 같은 짐승이라도 나올까 조마조마했지만, 호기심도 많은 편이기에 결국 강변에 따라 내려와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는 해가 질 무렵 불이 켜지는 단양강 잔도를 함께 걸었다. 도저히 배가 고파서 안 될 때까지 구경을 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는데 지나고 보니 저녁을 대접하는 입장에서 참 좋은 전략이란 생각이 든다.
아내는 그날 아침, 시장에서 구입한 채소를 꺼내어 적당한 크기로 잘랐다. 이미 구입할 때부터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져 있던 소고기와 함께 냄비 안에서 쌈을 싸듯 차곡차곡 중심부터 포개 담았다. 푸른 채소와 갈색의 버섯, 그리고 붉은 소고기가 겹겹이 쌓여 한송이 큰 꽃이 되어 냄비를 가득 채웠다. 마지막엔 꽃 봉오리 가운데에는 귀엽게 X자로 칼집을 낸 표고버섯을 올려 마무리 지었다. 잘 꾸며진 전골냄비를 런치 매트이며, 수저까지 평소보다 더 신경 쓴 식탁 위에 올렸다. 준비한 버너를 켜기 전 끓여두었던 아내의 특제 육수를 채소 꽃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붓고 불을 켰다. 몇 분 후 금방 끓어 오른 전골냄비 속에 잘 익은 소고기와 채소를 건저 먹었다. 건더기는 매우 부드러워 먹기 편했다. 육수도 전골 요리의 내용물이 우러나 더 진해져 떠먹는 맛이 있었다. 아내는 의도한 대로 맛도, 멋도, 손님의 관심도 끄는 성공적인 요리를 만들었다.
우리 식탁 위의 밀푀유 나베는 전골요리답게 세차게 끓어올랐다가 다급히 놀란 우리의 손에 약불 위에서 천천히 온도를 유지하며 맛을 키웠다. 식탁 위의 대화도 가벼운 와인 한잔과 함께 왁자지껄 끓어올랐다가 지난 시절 우리의 이야기라든지 앞으로의 이야기처럼 차분하고 따뜻한 이야기를 오랫동안 주고받았다. 식사를 마치고 각자 좀 휴식을 취한 다음 새벽에 아무도 없는 깜깜한 보발재 고개를 찾아 같이 별구경을 했다. 우리말 소리가 없었다면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별 빛이 없었다면 빛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 공간에서 아내와 나의 친구들에 대한 존재와 감사함을 느끼고, 별을 바라보며 혼자 마음속에 소박한 꿈을 헤아렸다.
다음날 아침에 봄비가 다시 추적추적 내렸다. 친구 부부는 우리 집에서 큰 우산을 하나 빌려 어제 본 우리 동네를 산책하러 나갔다. 나와 아내는 소파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추적추적 기분 좋게 내리는 봄비 아래 우산 하나를 바쳐 들고 한적한 시골길을 천천히 걸어 나가는 연인의 모습과 창 모퉁이 한편에 어느새 조용히 다시 자리 잡은 제비 부부가 보였다. 그리고 그 유리창에 희미하게 비치는 우리 부부의 모습도 보였다. 옅은 미소를 띠며 싱긋이 웃고 있는 내 표정이 어느새 부지런하고 사람 좋아하는 사랑스러운 아내의 모습을 조금씩 닮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