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 사는 이야기-'오래됨'의 의미
얼마 전에 쓰레드에 우리나라 부촌을 한눈에 알기 쉽게 정리해 둔 글이 올라왔다. 거기에는 한남, 청담, 반포, 압구정 등 서울 시내 각 부촌의 특징이 정리되어 있었다. 압구정 옆에 적혀 있는 적혀 있는 건 ‘오래된 부촌’이었다. 나는 그 두 단어가 압구정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압구정은 오래된 동네다. 비단 아파트만 낡아서 그런 게 아니다. 실제 역사도 오래되었다. 조선 시대부터 이미 경치 좋기로 소문이 나 세조 때의 세도가, 한명회가 은퇴 후 지내고자 정자를 지었다. ‘압구정’이란 이름은 거기에서 나왔다. ‘갈매기가 노니는 정자’라는 뜻이다. 그러니 압구정은 그 역사가 최소 600년은 되는 셈이다. 이런 배경은 압구정이라는 이름에 전통이라는 무게를 실어준다. 압구정이 ‘강남’의 시작, ‘찐 강남’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근거다.
물론 아파트도 낡았다. 압구정을 특징짓는 거대한 아파트촌의 건물들은 대부분 40년도 훌쩍 넘은 거다. 아파트 나이에 비하면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여기저기 배관이 삐걱거리고 녹물이 나온다. 그래도 요즘은 짓지도 않은 중층 높이에 성냥갑 디자인인 걸 보면 누구라도 누구라도 이 아파트 연식을 짐작하기 힘들지 않다.
주민의 나이도 많다. 길을 걷다 보면 학생보다는 노인을 더 많이 만난다. 만 세대가 넘는 가구에 초중고 학교 단지만 해도 3개나 끼고 있는 걸 보면 예전에는 이곳에서 아이들 목소리가 시끄러웠을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아이 보기가 귀해진 동네로 바뀌었다. 작년에 동네 지인 한 명이 딸이 둘째를 임신하여 주민센터에 다자녀 지원을 신청하러 갔던 이야기를 해 준 일이 있었다. 그런데 딸이 찾아갔더니 담당자가 다자녀 신청 자체를 처음 받아보는 거라 일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를 몰라 한참을 허둥대었다는 거다. 그만큼 요즘 둘째가 없고 이 동네에 아이가 없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들만 오래된 게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오래되었다.
압구정은 옛 동네다. 이건 오래 산 주민들이 많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압구정 사람들은 이사를 잘 가지 않는다고 했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위치가 좋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집값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사를 잘 가지 않는 건 사실인 것 같다. 우리 아파트만 해도 여기서 십 년, 이십 년 살았다는 사람이 많다. 이 동네에서 자식들 초, 중, 고를 보냈다. 혹은 나왔다는 사람도 많다. 심지어 대를 이어 사는 경우도 흔하다. 이 단지에 부모 세대, 저 단지에 자식 세대가 사는 식이다. 이렇게 모여 사는 모습은 마치 과거 농촌의 대가족과 같다. 요즘은 보기도 힘든 대가족 문화가 최첨단 21세기, 서울 한복판에서 살아나다니 역시 세상은 재미있다. 그래서 이 동네에서는 명절 때가 되어도 주차장이 비는 일이 없다. 오히려 더 붐빈다. 아들딸이 오히려 찾아오기 때문이다.
주민들끼리도 서로 알고 지낸다. 오래 살며 아이들 학교를 같이 보낸 사람들끼리는 서로의 사정을 속속들이 안다. 이것도 과거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신축과 가장 다른 점이기도 하다.
이 아파트에 오기 전 신축에 살 때는 몇 년을 살아도 이웃끼리 가벼운 인사 이상을 해 본 일이 없었다. 그때가 아이 교육이 끝났을 때라 더욱 그랬다. ‘같은 학교’나 ‘같은 학부모’라는 접합점이 사라지자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이웃을 만들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사람들이 오래 사니 같은 추억을 공유할 수 있다. 그들은 서로 인사를 하고 개를 산책시키고 같이 외출한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웃 간의 친밀감이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도시녀인 나는 이런 친밀감을 딱 한 번 느껴봤다. 10살부터 15살까지 5층 아파트에 살던 시절이었다. 그때 아파트는 계단식이어서 각 출입구당 두 세대가 나란히 있는 구조였다. 5층이었으니까 총 10세대였다. 이 중 한 세대만 빼고 9세대가 모두 친하게 지냈다. 다들 아이들 연령대가 비슷했고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때는 학교를 마치고 오면 아이들이 다 함께 아파트 앞 주차장에서 놀았다. 당시엔 차가 별로 없던 때라 주차장은 낮 동안 비어 있다시피 했다. 주차장에서 놀지 않을 때는 서로의 집에 가서 놀았다. 시험 때가 되면 같이 공부했고 성적표가 나올 때면 각자의 집에서 고성이 터져 나왔고 아이들은 눈치를 살피며 다녔다. 부모님들도 친해서 종종 함께 밤 외출을 하시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아이들은 한 집에 모여 놀았다. 어느 여름엔 전 세대가 모여 1박 2일 경주로 놀러 가기도 했다.
압구정에 산다는 건 시간을 거슬러 간다는 것과 같다. 압구정에 살게 되었을 때 마치 어린 시절로 되돌아온 것 같았다. 오래된 아파트, 서로 알고 지내는 주민들, 잊고 있던 5층 아파트의 추억이 생각났다. 이렇게 돌고 돌아 이 나이에 다시 그 시절로 되돌아갈 줄 상상이나 했을까? 이래서 인생이란 재미있는 거다.
솔직히 어른이 되어 접한 ‘과거’는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주차와 배관이 주는 실질적인 생활의 불편함은 컸고, 친밀함을 넘어 간혹 경계를 넘는 듯한 이웃의 행동은 때로 부담스러웠다. 그러면서도 어린 시절과는 달리 이런 차이들이 하나하나 느낀다는 것 자체가 나 자신이 이미 나이 먹었음을 말해 주는 것 같아 서글프기도 했다.
현재 압구정에서는 재건축 이슈가 한창이다. 재건축이 언제 끝날 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재건축 후 압구정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일 거라는 건 확실하다. 그때가 되면 지금은 부담스러운 이웃의 정도 그리워질 거다. 그러니 지금 누릴 수 있을 때 누려야겠다. 추억 속으로 사라지기 전에 시간을 붙잡아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