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가 추석이었다. 추석 당일이 되자 압구정 거리도 한산했다. 평소 꽉 막혀 있던 도로가 뻥 뚫려 보기에도 시원했다. 거리에는 외국인 관광객과 정치인들이 여기저기 걸어둔 플래카드만 보였다. 하지만 아파트 단지에 들어오니 주차장은 여전히 빽빽했다. 다들 움직이지도 않는지 차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모습이 평소와 별다르지 않았다. 압구정 사람들은 고향도 가지 않는 걸까?
알고 보니 정말로 압구정 사람들은 고향에도 가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성당 교우와 추석 인사를 나누며 명절에 어디 가시냐 했더니 머리를 살짝 흔들며, “바로 옆이라서요.” 했다. 옆에 있는 것이 친정인지 시댁인지, 옆이라는 게 옆 동인지 옆 단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추석에 움직일 필요가 없는 건 분명해 보였다. 역시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같은 층 이웃은 같은 인사에 부모님은 이미 다 돌아가셨기 때문에 추석이라고 딱히 어디 갈 일이 없다고 대답했다. 평소 인사하며 지내는 아래층 이웃 역시 평소 명절엔 자식들이 다 집으로 오곤 하는데, 올해만 손녀가 태어나 아들이 오라고 해서 아들네로 간다고 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압구정은 오래된 동네다. 아파트도 오래되었다. 주민도 오래되었다. 압구정에 오래 산 주민들로서는 명절이란 고향을 방문하는 날이 아니라 방문을 받는 날이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다들 옆 동, 옆 단지에 모여 사는 것이 마치 어디 시골의 집성촌을 보는 듯했다. 새삼 압구정이 오래된 동네라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압구정은 언제나 뜨겁고 들썩거리는 강남의 중심지로 주로 인식되어 그렇지 실은 조선시대까지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동네다. 압구정은 조선 세조와 성종 대의 권신, 한명회가 지은 정자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성종이 한명회의 지나친 권력을 견제하자 한명회가 ‘남쪽으로 내려가 갈매기를 보며 한가로이 살겠다’고 하며 정자를 지었는데, 그게 바로 ‘압구정’이다. 압구정의 ‘압(鴨)’자는 오리를, ‘구(鷗)’자는 갈매기, 그리고 ‘정’자는 정자 정(亭)자다. 또 ‘압구정’은 한명회의 ‘호’이기도 하다.
압구정에서 갈매기를 볼 수 있다고 하면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 서해 바닷물이 압구정까지 들어오기 때문에 압구정에서는 정말 갈매기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요즘도 아침, 저녁나절에 아파트 단지 뒤 한강 변을 걷다 보면 오리가 떠 있고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가끔은 물이 빠진 모래펄에 갈매기나 다리와 부리가 긴 흰 새가 홀로 조용히 서 있기도 하다. 문득 ‘풍덩’하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 보면 물고기가 수면 위로 뛰어오른 참이다. 그러면 어느새 있는 줄도 몰랐던 은 물새가 물고기를 쫓아 재빠르게 물속으로 몸을 기울여 사라져 버린다. 번잡하고 화려한 서울 한가운데서 이런 풍경을 보고 있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 순간만큼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 옛날 조선시대 한명회가 바라보던 한강을 보고 있는 듯하다.
조선시대에도 한강의 빼어난 풍광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이름을 남긴 압구정은 현재에 들어와서도 그 ‘입지’ 덕분에 대한민국 부동산의 대장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압구정에 들어와 마음에 들지 않은 일투성이었지만, 이 시간의 흐름에도 변치 않는 풍경만은 순간이나마 마음의 평안을 준다. 어쩌면 그래서 한명회가 이곳에 정자를 지었는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압구정은 한명회의 몰락의 전초가 되기도 했다. 중국 사신이 왕의 연회 대신 ‘압구정이라는 정자가 있다던데 거기 가 보고 싶다’고 할 정도로 대단했던 압구정의 이름세 덕에 한명회는 성종의 눈 밖에 났고, 결국 권세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어쩐지 지금 현재 지나친 부동산 열풍으로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묶여 있는 압구정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압구정에 재건축 이슈는 언제나 뜨거운 감자다. 압구정 아파트의 재건축 조합들은 각기 지금의 낡은 아파트 대신 하늘을 찌를듯한 초고층 아파트를 지어 한강 변을 장식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다시 한번 압구정은 조선시대처럼 있는 자들의 과시 수단이 된 모양새다. 하지만 이 모든 인간사의 논란에도 갈매기와 오리는 유유히 수면에 떠서 바람을 바라보고 물고기를 잡는다. 압구정을 둘러싼 소음에 머리가 시끄러워지면 강변을 바라본다. 그러면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다. 압구정을 둘러싼 강물은 오늘도 유유히 흘러간다. 사람들이 그 주변을 어떻게 헤집어 놓던 저 강물과, 새와 물고기만은 우리가 간 이후에도 그대로이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