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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whoneymind May 17. 2024

믿어준다는 것

쨍한 햇빛에 함께 빛나던 금빛깔 속눈썹, 그리고 촘촘한 속눈썹 사이 반짝거리던 촉촉한 털코이즈 색 눈동자. 유난히 다른 일학년 아이들보다 하얗고 키가 크고 말랐던 좐(John:가명). 삼년전 가을, 내가 한 학교에 파견되어 애프터스쿨 프로그램 디렉터 포지션을 맡았을 적 알게 된 아이의 이름이다.


아무 학생들과도 대화를 하지 않고, 아무 선생님들의 말도 듣지 않던 일곱 살짜리 이 아이는 모두가 빨리 줄을 서서 학교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하교시간, 혼자 엉금엉금 책상 아래로 기어들어가 몸을 숨겼다.


클래스 선생님도, 어씨스탄트 선생님도 모두 감당하기 힘들어했던, 아니 웬만하면 피하고 싶어 했던 이 아이는 아버지가 직접 반으로 찾아와 "좐, 빨리 나와, 나가자"라고 말할 때까지 발 한자국도 꼼짝하지 않기가 일 수였다. 그렇게 일 년 동안 여러모로 소통이 힘들었던 이 아이를 더 깊게 알게 된 계기는 바로 애프터스쿨 반 선생님이 아이에 관한 사건 보고서(Incident Report)를 제출해 내가 일대일로 아이와 이야기를 하게 된 날부터이다.


나는 그 아이를 오피스 룸 조용한 곳으로 불렀다. 잘못했다고 호통치거나 판단하려는 게 아닌, 대화를 하고자 불러냈다. 그 아이에게 무슨 캐릭터를 좋아하는지, 오늘 하루 즐거운 일 혹은 화나는 일이 있었는지, 그 아이의 감정상태는 어떤지 물어보았다. 그 아이에 관한 것을 진심으로 궁금해하며, 조금씩 더 알아가려 노력했다. 처음에는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던 좐은 내가 매일매일 그 아이의 반으로 찾아가 만나며 시간을 보낸 후 조금씩 조금씩 대화의 창을 열기 시작하였다.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드려 꾸준히 아이에게 다가간 것, 그리고 그 아이에게 수치심을 주거나 창피한 감정을 주지 않으려 노력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관계가 발전할수록 알게 된 것은, 좐은 매일같이 학교 교장실로 불려 가는 일이 워낙 잦아 자신에게 부정적인 프래임을 씌우고 있었고, 항상 트러블메이커라고 어른들에게 듣고 자란 자신을 "bad child"라고 칭하고 있었다. 아이는 줄 곧 그 레이블을 벗어날 수 없다 생각했고 자신이 정말 "bad child"라고 믿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좐의 사건보고서가 들어오는 날. 나는 바로 그 아이의 잘못을 지적하기보다 먼저 그의 불안을 가라앉힐 수 있는(또 불려 와서 혼난다는 마음에 나오는 감정) 부드러운 플레이도를 손에 쥐어 주었다. 그 아이는 조물딱 조물딱 자신만의 작품을 만드는데 집중했고, 만지작만지작 거리며 자신의 불안도를 감소시키고 마음을 진정시키는 듯 보였다.


잘못했던 것은 바로 짚기는 짚어보되 그 아이의 감정자체는 이해하고 수용하려 했던 대화방식, 본인이 판단할 수 있도록 다시 그 상황이 오면 어떻게 행동할지 생각을 해볼 수 있도록 질문했던 대화방식이 정말 힘이 컸던 걸까.  나와 신뢰를 쌓은 후 좐은 줄곧 자신의 행동을 바꿔보려 좀 더 참아보도록 노력하는 기세를 보이거나, 잘못을 인정하며 본인의 힘듦을 솔직히 털어놓는 날이 많아졌다. 이런 시간이 오기까지 대략 2년이 넘는 시간이 걸린 걸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그게 아이라고 할지언정) 신뢰를 쌓아가고 그 관계를 향상해 가는 데에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배울 수 있었다.


나는 마침내 회사 내에서 팀을 옮기게 되었다. 판데믹 속 감사하게도 많은 기부자들 덕 우리 회사의 규모가 커져 멘탈헬스팀을 만들어 내었고, 그토록 원하던 미술심리치료사 자리가 만들어져 나는 내가 사랑하는 직업, 내 본업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기쁨도 잠시, 나는 좐이 마음에 걸렸다. ‘이제야 마음을 연 아이인데, 또 이렇게 관계가 종료된다니...’


나는 그 아이에게 애프터스쿨을 떠나기 한 달 전부터 내가 떠날 시기에 대해 귀띔을 주기 시작했다. 갑자기 떠나는 것을 알게 되면 충격이 될 수 있기에, 예상이 가능하도록 도와주려 한 것. 건강하게 클로징을 경험하고 그것을 새롭게 정의할 수 있게끔 도우려고 의도적으로 시간을 두고 지속해서 알려주었다. 그리고 간간히 거기에 대해 올라오는 감정에 대해 체크하였다 (그 당시 나는 디렉터 포지션이었기에 그 아이와 심리치료 세션을 진행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알고 있는 심리치료 대화스킬을 적용할 수 있던 것은 큰 도움이 되었다!)


마지막 날 아이는 나에게 줄 것이 있다며 쫄래쫄래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는 그 작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어 작디작은 손가락을 피고서는 레고사람을 건네었다. 그 아이의 손바닥에 있던 레고는 강인한 여자의 형상을 띄고 있지만 활짝 웃고 있는 얼굴이었고, 손에는 크고 단단해 보이는 무전기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는 입술을 열었다. “It's a special gift for you (너를 위한 특별한 선물이야). I usually give a gift to someone special (나는 보통 내가 특별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선물을 주곤 해)." 그리고는 덧붙였다. 완성된 레고를 고른 게 아니라 본인이 직접 얼굴과 몸통, 액세서리를 고르며 커스터마이즈 한 레고(Customized Rego)라고 말이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아이는 예쁜 털코이즈 색의 눈으로 나를 꼼꼼히 관찰하고 있었고 나에게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저 본인의 말을 들어주는 어른이 아닌, 이 프로그램을 관리하느라 무전기를 들고 복도를 뛰어다니며 학교의 다양한 스태프들과 소통하느라 바쁘고 정신없던 나의 모습을 다 눈에 담고 있었다.


아이들은 똑똑하고 위대하다. 그들은 다 알고 있고, 다 느끼고 있다. 누가 자신을 진심으로 생각해 주는지, 누가 자신에게 용기를 주는지, 그리고 그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지 말이다.


대학원에서 미술심리치료를 배울 적 교수님들이 항상 강조하셨던 '신뢰가 있는 관계'의 중요함을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한 아이가 잘못되었다며 비난을 주고 욕해도, 그 아이에게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사랑을 주고 판단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충분히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과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것. 그렇게 모두에게 성장해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


비록 조금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말이다.






2년 전의 추억—브런치 서랍 속 넣어놓고 끝맺음 짓지 못했던 글. 드디어 완성시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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