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아담과 하와도 카인과 아벨에게 물었을 것 같다
이 글을 올리는 2021년 2월 기준 42개월 된 아들과 23개월 된 딸을 키우고 있습니다.
에피소드들은 어제 얘기일 수도 있고 1년 전 얘기일 수도 있습니다. 때론 2년째 반복되는 얘기일 수도 있고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아이라면 여러 번 들어봤을 질문이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도 아마 들어봤을 거다. 성인이지만 아빠가 아닐 때는 그런 질문을 하는 이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정확히는 아이 곤란하게 왜 그런 질문을 할까 싶었다. 그런 나에게 지인은 명쾌한 이유를 전해줬다.
“재밌잖아.”
동감한다. 저 질문은 꽤 재밌다. 아이가 누굴 택하든지 재밌고 창의성이 묻어난 답변을 듣는 것도 흥미롭다. 종종 질문하는 어른을 한심하게 쳐다보는 아이의 눈망울도 사랑스럽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질문이 재미난 건 제삼자였을 때까지다. 질문을 듣는 아이가 내 아들딸이면 상황이 달라진다. 예전부터 ‘그런 질문 왜 하지’란 반감을 갖고 있었기에 내가 물어본 적은 별로 없다. 아내는 다르다. 애들에게 수시로 묻곤 한다. 아내가 듣고자 하는 답은 하나다.
“엄마”.
잘해야 본전인 듯한데 자꾸 왜 물을까 싶지만 엄마 마음은 또 그게 아니다,라고 추측한다. 최근까지 저 질문을 들었던 대상은 둘째 딸이다. 아내는 한때 첫째 아들에게도 종종 저 질문을 던졌다. 대답은 늘 엄마였다. 아주 잠깐 일주일 정도 아들이 “아빠”라고 한 적이 있긴 하다. 당시 아내의 반응은 놀라웠다. “아빠”라는 말에 울상을 지은 아내는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뭐하나 싶어 방문을 여니 이불속에서 눈이 시뻘게져 있었다. 난 의아함을 숨길 수 없었다.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아내는 “당신은 몰라, 열 달을 내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인데….”라며 울먹였다. ‘그럼 왜 굳이 물어봤어’란 질문이 목젖을 건드렸지만 이내 삼켰다. 잘 참았지 싶다.
그때뿐이었다. 아들은 명확하게 아빠보단 엄마에 큰 애정과 애착을 보였다. 그런 아들을 보면서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질문은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옆에서 봤을 때 모든 아이에게 저 질문의 답은 엄마인 게 마땅해 보였다. 남녀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 뭐 이런 성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아이는 엄마에게 끌리는 게 당연한 듯했다. 아빠에겐 넘사벽이다. 만약 "아빠가 더 좋다"라고 말하는 아이가 있다면 둘 중에 하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이상하거나 엄마가 이상하거나. 아빠는 변수가 아니었다.
앞선 문단에서 '생각한다'가 아니라 '생각했다'인 이유는 둘째 딸 때문이다. 아이는 엄마가 더 좋은 게 당연하고 딱히 질투 날 것도 없다고 믿어왔는데 둘째 딸은 놀랍게도 "아빠가 더 좋다"라고 얘기했다. 이번에도 주로 질문을 하는 사람은 엄마다. 대답이 "엄마"가 아니라 "아빠"이니 아내로서는 인정할 수 없었나 보다. 답을 바꾸기 위해 수시로 질문을 했다. 그래도 열에 아홉은 "아빠"였다. 이유는 사실 잘 모른다. 두 돌도 안 된 아이에게 이유를 묻는 것도 이상하다. 혹자는 내가 아들보다 딸을 편애하는 건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나 딱히 그런 건 아니다. 물론 "아빠는 저리 가요 오오~"하며 엄마에게 달려가는 아들 옆에, 부르지 않아도 내 무릎에 앉아 있는 딸이 있으면 부모도 사람인지라 맘이 더 쓰일 때가 있기는 하다.
그러던 중 문득 저 질문이 올바른 질문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아이에게 엄마인지 아빠인지 택일을 강요하는 게 정서상 안 좋을 것 같아서다. 다른 어른들이 재미 삼아 묻는 거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부모가 내 아이에게 묻는 건 자제해야겠다 마음먹었다. 아내에게도 내 생각을 전달했고 아내도 동의했다.
멋진 제안을 한 이면에는 바람 하나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질문에 대한 딸의 답은 "아빠"인 걸로, 질문을 멈추면 "아빠"라는 답이 가족왕조실록에 영원히 기록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이랄까.
아내는 요즘 새 질문에 빠져 있다. 딸에게 자꾸 묻는다. "오니(딸의 애칭. 이름이 '온'으로 끝남) 누구 딸이야?"
딸의 답은 영광스럽게도 "아빠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