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추억을 비우고 새들의 모이를 담은
아버지는 고등학교 시절 학교 야구 선수로 뛰셨다. (할아버지께서 그 아득한 옛날에 야구를 하셨다는 것이 손자들에겐 뜻밖의 얘기일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는 광목천으로 만든 당신의 고교시절 야구부 유니폼을 형제들에게 보여주셨다. 희미해진 기억이지만, 펼쳐 놓은 야구복 상의가 엄청나게 컸다. 누렇게 바랜 광목천 군데군데 얼룩이 있는 상의 등판에 검은색 천을 잘라 바느질로 붙인 번호가 크게 붙어 있었다.
햇살 비추던 마루에 펼쳐진 커다랗고 펑퍼짐한 야구복의 아련한 이미지를 떠올리며 생각해 본다.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어머니와 결혼하고 5명의 아들을 두실 때까지 다시 입으실 일 없었을 고교시절 야구복을 왜 그때까지 보관하고 계셨을까?
아버지의 광목 야구복은 그날 이후 몇 개의 걸레로 다듬어졌고, 집안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했다. 무명천 걸레도 귀하던 시절이었다.
돌아가시는 날까지 골격이 당당하셨던 아버지는 그 옛날 고교시절 듬직한 체구로 잘 치고 잘 뛰셨을 것이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몇 개의 트로피가 광목천 야구복을 입고 황토 빛 야구장에서 뛰시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추억이라는 감회로 모아지는 물건들, 그리움 혹은 미안함으로 좀처럼 버릴 수 없다가 끝내는 버려야 할 고물이 되는 물건들이 있다. 일상에 쓰일 곳은 없어 세월 속에서, 어두운 창고 안에서 나이 먹어가는 물건들은 결국 언젠가는 처분해야 할 때가 온다. 그럼에도 여전히 지금 그리고 앞으로 필요할 것인가 아닌가 판단조차 불필요한 그런 물건들도 버리지 못하고 어딘가에 잘 넣어두고 잊고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들을 위해 새를 기르셨다. 세 개의 새장 안에는 노랗고 파랗고 초록색 깃털의 작은 새들이 마루 끝에 놓여 노래했다. 새 모이는 주로 금색 기장(조)이었다. 새에게 물을 주고 모이를 주는 것은 어린 우리들 몫이었다.
나무 궤짝 안에 오랫동안 보관하셨던 몇 개의 트로피는 어느 날부터 새 모이 그릇이 되었다. 금색 은색의 주물로 만들어진 묵직한 트로피 몸통이 새장 앞에 묶여 늘어서고 그 안에 새 모이가 담겼다. 트로피 위의 덮개는 새를 위한 물그릇이 되었다. 세월 속에서도 번쩍이던 아버지의 야구 트로피가 새 모이그릇이 되었는데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고 폼나는 새모이 그릇이었을 것이다.
못쓰는 작은 그릇, 혹은 통조림 깡통이라도 새모이 그릇으로 쓸만한 것은 주변을 찾아보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영광의 트로피에 가득 담겨있었을 ‘젊은 날의 추억’을 비우고 새의 모이로 채우셨다.
걸레로 바뀐 아버지의 야구복, 작은 새들의 모이 그릇이 된 아버지의 트로피를 떠올리면 아버지께 그때를 기억하시는지, 왜 그러셨는지 여쭤보고 싶은데 이제 안 계신다. 연로하셨어도 기억이 총총하셨던 아버지 생전에 반주를 따라드리면서 한 번쯤 여쭈어 볼 기회는 수없이 많았다. 우리는 옛 얘기를 차분히 물어볼 여유도 없이 눈앞의 것만 바쁘게 쫓으며 살았다.
어쩔 수 없이 처분해야 할 때가 오기 전에 당신의 그 추억 어린 물건들이 일상에 쓰일 곳을 적절한 시점에 찾으셨을 것으로 짐작하면서도 왠지 그것 만이 다는 아닐 것이라는 상념이 이어진다.
어린 아들들 앞에 당신의 추억이 담긴 물건을 보여주시면서 커 나가는 다섯 아이들을 둔 현실 속의 아버지가, 삼십 대의 힘겨운 가장으로서 아마도 꿈 많았던 고교시절 추억과 이별하시려는 장면을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숙연해진다.
한편으론 ‘좀 더 보관하시지 않고’ 하는 마음도 없지 않다. 1940년대의 주물 트로피는 지금쯤은 보관해야 할 만한 귀한 골동품이 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