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리 Oct 04. 2020

준비물은 최소한의 친절

정세랑, <보건교사 안은영>

* 소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어벤져스>의 쿠키영상을 좋아한다. 외계 생명체 군단을 이끌고 뉴욕을 침공한 악당 로키와 그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섯 히어로의 이야기. 엔딩 크레디트가 전부 올라가고 나오는 쿠키 영상에서는 어벤져스로서의 첫 전투를 끝낸 뒤 아직 복구가 되지 않은 식당에서 지친 모습으로 슈와마*를 먹는 그들을 볼 수 있다. 정의감이든 뭐든 어쨌거나 그들도 히어로 이전에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에 피식 웃게 된다. 아, 한 명은 신이구나.


출처: 나

    뉴욕을 떠나 이곳 한국에서 고군분투하는 또 한 명의 피곤한 히어로가 있다. 정세랑 작가의 장편 <보건교사 안은영> 속 안은영이 바로 그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일명 '젤리'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안은영. 가방에 쏙 들어가는 비비탄 총과 장난캄 칼로 남들 모르게 젤리를 처단하며 사람들을 구한다. 대학 병원을 떠나 보건교사로 새로 부임한 고등학교에서 특별한 기운을 지닌 한문교사 홍인표를 만나고, 그와 함께 학교에서 일어나는 기묘한 사건들을 해결해 나간다. 





"(…) 기도 확보하는 법, 구강 대 구강 인공호흡, 흉골 압박 심마사지를 가르쳤는데 설령 태반이 까먹고 일부가 기억한다 하더라도 그중 한 사람이 언젠가는 누군가를 구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 멀고 희미한 가능성을 헤아리는 일을 좋아했다. 멀미를 할 때 먼 곳을 바라보면 나아지는 것과 비슷한 셈이었다. (p. 112)"
"은영의 능력에 보상을 해 줄 만한 사람들은 대개 탐욕스러운 사람들이었다. (…) 은영은 다른 종류의 보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가, 어느새부터인가는 보상을 바라는 마음도 버렸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고 해서 자신의 친절함을 버리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은영의 일은 은영이 세상에게 보이는 친절에 가까웠다. (p. 117)" 


    매일매일 먹고사는 일은 지치고 혼란스러운 세상은 지긋지긋하기만 하다. 은영 또한 힘들다고 투정 부려도 결국 하루를 열심히 살아내는 한반도의 흔한 직장인일 뿐이다. (흐르는 눈물 먼저 좀 닦고.) 특별한 능력을 타고났지만 그렇다고 특별하기보다는 더 피곤한 삶을 사는 은영.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만 살아도 가끔은 손에 꼭 쥐고 있는 인생이라는 끈을 잠깐 내려두고 싶을 때가 있다. 자기 눈에만 보이는 또 다른 세상까지 견뎌야 하는 은영은 어떻게 자신의 끈을 놓치기는커녕 더 꽉 잡아두고 있는 걸까. 


    모서리를 작게 접어둔 페이지들을 펼쳐 보면 작게 '은영쌤 너무 착해요'라고 적어둔 내 글씨가 종종 발견된다. 나쁜 일이 계속 생기는 세상을 외면하지 못하는 최소한의 친절. 은영이 지닌 그 선한 규칙이 그가 사람들을 돕고 세상을 구할 수 있는 힘이다. 특별한 능력이 있다면 얼마든 나쁜 마음을 먹을 수 있다. 소설 속 메켄지처럼. 부와 명예를 다 이루고도 '선한 영향력'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나쁜 소식으로 신문의 사회 면을 장식하는 현실 세상 속 사람들처럼. 은영은 다르다. 그는 그저 최소한의 따뜻함을 버리지 않고, 자신의 행동이 먼 훗날 누군갈 구하기 바란다는 작은 가능성을 믿을 뿐이다. 보상 또한 바라지 않는다. 그 마음으로 은영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구했던가.


    친절 앞에 '최소한'이라던가 '작은'이라는 말만 있어도 세상을 돕기엔 충분하다. 물론 그 단어의 크기만큼 실천도 쉽다면 참 좋겠지만. 그럼에도 '최소한의 친절'이라는 말은 나도 누군가를 돕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꿈꿀 수 있게 한다. 죽겠다, 힘들다, 피곤하다를 입에 달고 사는, 우리와 다르지 않은 안은영처럼. (p. 112)




"어차피 언젠가는 지게 되어 있어요. 친절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을 어떻게 계속 이겨요.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것까지 친절함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괜찮아요. 져도 괜찮아요. (…) 나중에 다시 어떻게든 하면 될 거예요. (p. 265)"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다. 어디를 가든 이상한 사람은 일정한 수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옛날이라고 해서 나쁜 사람이 더 많았던 것도 아닐 테고, 미래라고 해서 좋은 사람들만 가득하지도 않을 거다.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은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처럼 늘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 잔혹한 세상은 나쁜 사람들이 친절한 사람들을 이긴다. '욕먹으면 오래 산다'라는 말을 방증하듯 나쁜 사람들은 떵떵거리며 잘 사는 와중에 하늘은 무심하게도 착한 사람부터 데려가듯이. 이 세상은 결국 바뀔 수 없는 걸까?


    이 세상은 결국 바뀔 수 있다고 믿는다. 친절이 쌓이고 쌓인다면. 친절한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을 이길 수 없다.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것까지 친절함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계속 진다는 것이 곧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다. 친절한 사람들은 계속, 계속 싸울 수 있다. 안되면 나중에 어떻게든 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부딪치고 또 부딪친다. 은영과 인표처럼. 그렇게 패배라는 조약돌이 차곡차곡 쌓이고 나면, '다른 것보다 위에 두는 가치도 없이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 특유의 탁함 (p. 209)'을 걸러내고 세상을 조금 더 깨끗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수많은 조약돌 중 내가 쌓은 하나가 있다면 참 좋겠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보건교사 안은영의 이야기는 273페이지로 끝이 난다. 다 읽고 난 책을 덮고 눈을 감아본다. "죽어!!"를 외치며 젤리를 열심히 무찌르는 은영 선생님을 상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로 새로 탄생한 <보건교사 안은영>에 김초엽 작가가 남긴 추천사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나는 정세랑이 그리는 세계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이상하고 신기한 일들이 자꾸 일어나는데, 세상이 무너지고 망해가는 와중에도 어딘가에는 나를 꼭 붙잡아 줄 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 세계에."** 정말 어딘가에 있었으면 좋겠다. 나를 꼭 붙잡아 줄 은영 선생님이. 





* 슈와마(정확하게는 샤와르마)는 얇은 빵 위에 고기와 야채, 소스 등을 넣어 돌돌 말아 싸 먹는 음식이다. 케밥과 비슷하다고. (출처: 어벤져스2 회식 화제… 1편 쿠키영상 속 '슈와마' 회식과 비교해보면?)

** 고재완, "'보건교사 안은영' 박찬욱부터 공효진까지…유명인 극찬 퍼레이드", 스포츠조선, 2020.09.23


인용문 출처: 정세랑, 보건교사 안은영, 민음사, 2015

헤더 출처: '보건교사 안은영' 정유미 "원작 감동 그대로 전하고 싶어" 

작가의 이전글 우리의 현실이 당신의 비극이 되지 않기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