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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경 Feb 18. 2023

‘저항할 의무’를 잊고 있었다

2023. 02. 17. 초보 편집자의 일기

수요일 오후 1시, 외주 디자이너 선배에게 된통 닦였다. 유독 이번 작업에서 교정 과정에서 교체하거나 추가해야 할 텍스트 파일을 누락해서 뒤늦게 보내는 일이 잦았다. 그 때문에 작업이 지연되고 번거로워진 데다, 이번에는 그가 먼저 발견하고 나에게 질문했는데 내 설명이 일못의 그것이어서 폭발한 것 같았다. 나는 예상치 못한, 처음 겪어 보는 말들에 크게 당황했다. 타인의 문제 제기에 꽤 역치가 높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건 내가 겪어온 ‘타인들’의 특수성 때문일 뿐이었다.


“이제 그 정도 연차는 아니지 않나?”라는 말에 쿡 찔렸다. 다른 출판계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나는 대학 안 나오고 운동도 출판도 어떤 분야에도 이렇다할 전문성이 없는 애매한 존재라는 생각에 작아지곤 한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그래도 난 나이가 깡패니까!’하면서 계속 열심히하다 보면 나아질 거라고 무작정 낙관했다. 그런 마음이 완전히 까발겨진 것 같았다. 기본적인 실무도 똑바로 못하면서 무슨……. 우연의 일치인지 얼마 안 지나 목이 아프고 몸의 습한 부위에 두드러기가 나기 시작했다. 목요일 아침에는 몸살이 났다.


목요일 저녁 6시 반, 서점을 운영하는 회사 밖 선배를 찾아갔다. 책만 사고 나오려는데, 저녁밥을 사 주었다. 원래는 말할 생각이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풀어 놓아 버렸다. 그는 우선 업무 관계에의 실용적인 조언을 해 주고나서 덧붙였다. ‘당신도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서, 타인에게 존중을 요구할 의무가 있다. 뭣모르는 어린것이 아니라 1인분을 하는 사람으로서 정당하게 대접받을 권리가 있는 거다. 당신 마음속에 있는 말은 그런 말이었을 거다.’ 그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정당하게 요구할 것과 양해를 구할 것과 부탁할 것과 죄송할 것, 받아들일 것과 거부할 것의 기준이 마음속에 세워져 있어야 한다. 내가 선배라면 그걸 지적했을 거다’


생각해 보면 나는 유독 그 디자이너를 대할 때 긴장했고 한없이 저자세였다. 그분이 어떤 상황에서 화가 나는지 괜찮은지 예측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 생각해 보면 나는 사람들을 대할 때 그 사람의 기준이 어떤지 예측하고 눈치를 살펴 그에 맞춰 행동했다. 그러다보니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태도가 달라졌고, 어떤 사람들 앞에서는 아주 많이 위축됐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그 장소마다 사람마다 다르게 드러냈다. 때로는 내가 없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런 태도는 의외로 청소년 인권 운동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이어진다. 나는 청소년 인권 운동판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기준들을, 특히 표현 양식에 기입하면서 큰 혼란을 겪었다. 그중에서도 ‘나이에 따른 호칭 쓰지 않기, 나이에 상관없이 서로 존댓말 쓰기’라는 규칙이 너무 어려웠다. 단체 안에서는 몇 번 지적받다 보니 입에 붙었는데, 문제는 단체 밖이었다. 단체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만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반말을 하고 기특해하면 문제 제기를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문제 제기의 결과는 파국이었다. 지역의 다른 활동가들과 친해지기도 전에 관계가 단절되어 버렸다.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지만 방법을 몰랐다. 모든 게 내 탓인 것만 같았다. 


그 경험으로 나는 남들, 특히 나이 많은 사람들은 내 말을 의도한 것과 아주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걸 뼈아프게 알게 되었다. 일단 관계를 원만하게 만들어야 그 안에서의 존엄도 조정해 볼 수 있는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다 사람들을 대하는 내 기준이 없어지고 내가 누구인지조차 희미해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성소수자 인권 포럼에 다녀왔다.(자세한 후기는 다음 글에) 집에 와서 자료집의 글 몇 편을 읽고 트랜스젠더 인권 모임 조각보의 웹진에 실린 글 몇 편을 찾아 읽었다. 그러다 다음 글을 읽으면서 조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는 종종, 나와 나의 정체성이 어떤 줄다리기의 줄처럼 느껴지곤 했다. 다만 한 쪽에는 아무 힘도 없는 나의 자의식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있는 불공평한 줄다리기였다. 그 사이에서 찢기지 않으려면 많은 힘이 들었고 (...) 많은 활동들을 해 왔다. 그간 나도 조금은 달라졌을까. (...) 다른 한편으로 나는 여전하다. 나는 여전히 일주일 중 몇 날은 사람들을 피하고 나와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나의 모습이 지워지길 바라고, 소위 말하는 트랜스젠더 자긍심이라곤 눈곱 정도밖에 없다. (...) 그런 느낌이 들 때면 나는 사람들이 바라는, 그리고 나 또한 바라는 트랜스젠더 활동가의 모습은 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 어긋남, 혹은 실패가 이전처럼 괴로움과 자책의 감정만을 불러일으키진 않는다. 오히려 그 어긋남과 실패의 지점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트랜스젠더 활동이 존재하는 곳이다”(수엉, 〈그래야 멋져지니까요〉, 《조각보자기》 0호)     


성소수자가 겪는 차별에 대해서, 나는 지금까지 교양으로만 이해했던 것 같다. 그건 “성소수자는 이렇게 대해야 한다”같은 것에 가까웠다. 성소수자들은 상대가 자신의 정체성 표현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기에 항상 자신을 깎아 내고 숨겨야 한다는 그 아주 기초적인 문제가, 이제야 내가 느꼈던 감정과 겹쳐지며 다시 알아졌다. 그래서, 그들의 젠더 표현은 저항이 되는구나. 내가 앞으로 다해야 할 ‘저항의 의무’는 이런 것이고, 또 어려운 게 당연하구나.

    

아마 나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내가 바라는,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바라는 일관되고 올곧은 사람은 되지 못할 것이다. 이따금씩 무언가 어설프게 제기해 보고, 그러다 상처받아 골골거리고, 쟁점 앞에서 좌고우면하고 갈등 앞에서 눈치를 볼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자주 몸살이 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어제와 오늘을 떠올리면서 다시 용기를 낼 수 있으면 좋겠다. 인권 운동의 언어들은,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내가 그럴 수 있도록 돕기도 할 것이라는 걸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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