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성소수자 인권 포럼 후기
1. <성소수자 없이 제대로 된 교육 없다> 세션 - ‘성소수자 학생 인권 보장을 위한 법‧제도 개선 과제’ 발표를 들으면서 내적 환성을 질렀다. 지금 바로 이런 이야기가 필요하구나! 우리나라는 정말 성소수자 학생 권리 보장에 있어 갈라파고스라는 걸 느끼는 한편, 이런 참고할만한 훌륭한 해외 사례가 있고 그걸 섬세하게 연구하는 활동가와 법조인들이 있다는 점에서 힘이 났다. 특히 기억에 남는 부분은 이런 것들.
- 1인 탈의실을 트랜스 학생이 쓰게 하는 게 아니라, 트랜스 학생과 함께 옷을 갈아입기를 원하지 않는 학생이 1인 탈의실을 사용할 수 있게 한다.
=> 지난해 어떤 원고들을 통해 성미산학교, 제천간디학교에서 모두의 화장실을 만드려 하거나 만든 과정을 들을 수 있었다. 만드는/만든 사람들의 가장 큰 걱정 중 하나는 1인 화장실을 이용하는 것이 곧 낙인과 수치심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성미산학교에서는 모든 화장실을 1인 화장실로 만드는 안이 제출되기도 했다고 들었다. 제 3자로서 나는 논의 과정에서 주장하는 사람이 유별난 사람, 과도한 요구를 해서 조직에 부담을 주는 사람처럼 여겨질 수 있을 것 같아 걱정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기본값을 전환하는 것은 생각해 보지 못했다. 간단한 규칙의 전환이지만, 이 조직과 공간이 누구를 지지하는지를 가장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상담 과정에서 커밍아웃한 학생을 대할 때의 태도, “너를 돕기 위해서 다른 단체를 찾아보거나 선생님들이 팀을 꾸릴수도 있는데, 너는 네 정체성을 누구에게까지 알리는 게 좋겠어?”
=> 상담자가 보호자 등에게 당사자의 동의 없이 정체성을 알려서는 안된다는 주장은 익숙했지만, 그랬을 때 어떻게 상담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을까. 상담자와 당사자의 일대일 관계에서 해결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을 텐데...라는 걱정을 했다. 그런데 당사자에게 이렇게 묻는 것은 생각해 보지 못했다. 간단하지만 이런 명확한 예시가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상담자/조력자들이 다른 상상을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정보가 대중적으로 더 알려져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보호자에게는 알려야 한다’라는 이상한 금칙 때문에 발목 잡혀 있는 것 같다.
매뉴얼은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어야 하기에 매 상황에 일률적으로 적용하기는 힘든 어떤 기지나 노하우는 담기기 힘들다. 이런 매뉴얼이 있는 현장이라면 매뉴얼에 담기지 못하는 수많은 사례와 논의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을 더 발굴해서 엮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일본조차도 2015년에 교육부에서 성소수자 학생 배려 매뉴얼을 배포했고 2020년에 한 지역(도쿄도 미나토구)에서 학교와 직장에서 성별에 따른 제복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조례가 제정된 바 있다. 대학에서 성소수자를 고려하는지를 조사했더니 절반 가량이 안 하고 있다는 것이 뉴스거리가 된다. 우리나라는 왜 그런 건 전혀 논의가 되지 않고 아직도 학생인권조례의 차별 금지 사유에 성적지향이 들어가느냐 마느냐를 가지고 싸우고 있어야 될까?
교육운동도 성소수자 학생들이 차별, 폭력을 당하면 안 된다 수준에서 멈춰 있지 말고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소수자 학생들이 차별받지 않아야한다는 것에는 모두 동의하지만, 이 문제를 충분히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로 다뤄 왔던가. 우리 안에서도 성소수자 학생은 말 그대로 소수의 문제, ‘나중에’ 다룰 문제로 여기지는 않았는지, 이미 다 안다고 착각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하게 된다.
2. <성소수자 난민의 동료가 되자> 세션은 - 정말 평소에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라서 들었다. 나는 성소수자 난민이 우리나라에 올 거라는 생각 자체를 못했다. 난민이라는 사람들이 처한 문제는 정말 복잡다단하구나, 그런데다 성소수자인 사람들은 난민 중에서도 얼마나 고립되는가, 약간 아득해졌다.
다른 언어를 쓰는, 그래서 아주 기초적인 수준의 소통밖에 주고받지 못하는 당사자를 어떻게 도울 것인가. 취약하고 고립된 당사자가 활동가에게 무한 의지하는 상황에서 줄 수 있는 도움은 한정적일 때 그 관계에서 느끼는 무력감, 책임감 등 복잡다단한 감정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 - 하는 문제가 마음에 남았다.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활동가의 진솔한 언어가 와 닿았다. 이런 구체적인 경험들이 기록되고 모여야만 무언가 실마리가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영어나 한국어를 공부하면 좋겠어요. 번역기로 소통할 수 있지만, 그건 사실 쉽지 않아요. 제가 아랍어를 배우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것보다는 H가 나 말고도 다른 조력자들과도 연결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남웅이 당사자 H에게 보낸 메일 중에서)
3. 집에 와서 <U=U가 상식인 세계> 세션의 글들을 읽었다. 안전을 바라보는 대안적이고 섬세한 시각을 접할 수 있었다. 어떤 부분을 인용해도 제대로 전달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안전’과 ‘고립’, ‘동의’와 ‘돌봄’ 이 키워드들이 나열되는 주제에 궁금함이 드는 분들은 자료집을 읽어 보시기를 추천한다.
“어떤 사람이 느끼는 행복은 자신이 파괴되면서 (...) 얻는 것일 수 있다. (...) 사후에 돌아보았을 때 동의를 철회하고 싶은 폭력적인 경험일 수 있다고 하여 그러한 욕구를 관계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그러한 상태를 ‘이용’하는 데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의식해야 (...) 이 사람이 더는 건강하지 않게 된다면 그때 나는 이 사람을 모른척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것인가?”(유성원)
“문제는 문제가 생겼을 때 이 문제가 고립된 삶을 자초하게 되는 구조에 있다. 이 구조를 직면하고, 욕망의 토대를 인정하지 않고 동의를 구하고 지키라는 것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사전 고지라는 장치가 이 모든 구조와 과정을 생략하게 하고, 사법적인 판단을 내리는 손쉬운 해결책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부디 피엘(HIV 감염인)의 삶, 피엘이 겪는 사회적 고통에서 해답을 구하자”(타리)
(U=U : 꾸준히 치료를 받아 바이러스가 미검출 상태로 억제된 HIV 감염인은 HIV 바이러스를 전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는 캠페인)
etc.
- 내가 관심을 두지 않는 사이 성소수자 인권 운동에서 이렇게 꾸준히 새로운 현장과 담론들을 개척하고 있었군, 하면서 신기했다. 새로운 담론만 있는 게 아니라, 동성혼같은 오래된 의제도 다시 점검하면서 ‘버릴 것은 버리고 지킬 것은 지키’려 하는 섬세한 에너지가 느껴져 더 믿음직스러웠다. 작년에 비해 주제가 훨씬 풍성해질 수 있었던 데는 어떤 배경이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모든 부문 운동들에 늘 관심을 가질 수는 없겠지만, 지인들을 업데이트하듯 의식적으로 업데이트가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다. 성소수자 인권 포럼은 그런 점에서 연례 행사로 기억할 만한 것 같다.
예전에 치이즈가 ‘청소년 인권 포럼을 여는 게 내 꿈이다’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게 떠올라서 마냥 ‘우와 성소수자 인권 포럼 좋아’라는 기쁜 마음으로 커서를 멈추기가 힘들다. 더 열악해서 더 느리고 좁은, 그래서 사람들을 업데이트하라고 불러모을 자리를 만들지 못하는 운동들에도 관심을 놓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우리 <오늘의 교육>에서는 올해 기조가 교육 운동 반성하기다.(엄청 긴 기조 내용 내맘대로 정리해 버리기 ㅋㅋ) 편집위원회 회의에서 진냥은 근 10년간 교육 운동에서 만든 담론이 거의 없다시피하다고 지적했다. 앞으로 우리도 정직하고 섬세한 반성을 잘 했으면, 더불어 이렇게 새로운 논의를 다양하게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 수어 통역과 문자 통역이 둘 다 이뤄지는 세션이 많았다. 그리고 상당히 원활하고 차분하게 진행돼서 감탄스러웠다. 발표자들이 통역을 고려해 느리게 또박또박 말하는데 그게 청인 입장에서도 더 듣기 수월한 것 같았다. 청각 장애 접근성은 항상 행사를 준비할 때마다 고민하는 문제인데, 이렇게까지 성의껏 준비하는 행사는 요근래 처음 봤다. 당장 4~5월에 있을 연속 강의를 장애 접근성 1도 없이 준비하고 있는 나는 한없이 작아질 뿐이다. 어떻게 몸으로 때울 수 있는 거라면 모르겠는데 비용 문제는 항상 늘 너무... 어렵다. ㅇ<-<
- 이런 류(운동 단체에서 하는 포럼)의 행사에서 이 정도의 참가비(+자료집 구입비)를 지불해 본 건 처음이었는데, 이례적인 경험이었다. 나는 이런 자리가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응원하는 마음과 함께, 무엇보다 내 일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참가비를 두고 고민하지 않았다. 사회과학 분야 출판을 한다는 건 업데이트되는 담론을 놓치지 말아야 하고 그런 담론을 만드는 사람들을 계속 알아가야 하는 일이니까. 그런데 내가 만약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 고민스러웠다. 출판을 업으로 삼는 입장에서는 이런 자리에 비용을 충분히 지불하는 문화가 만들어지는 게 더 좋다. 지식을 기획하고 생산하고 편집하는 과정이 그만큼 가치가 있다는 점이 합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중 운동을 지향하는 활동가들은 고민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설문지의 문항에 그런 고민이 묻어났다. 비용의 적절성을 묻는 문항에 나는 적절하다고 체크했다가 지우고 부담스럽다로 바꾸었는데, 아무래도 주변 사람 누군가에게 선뜻 같이 가자고 하기에는 꺼려지는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가격을 책정할 수밖에 없었던 주최측의 입장도 너무나 공감이 됐다. 점점 잘 돼서, 일정 규모 이상 동원할 거라고 기대할 수 있어서 비용이 낮아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잘 될 것 같다. 내용이 많이 알찼어서, 이번에 온 사람들은 다음해에 또 오고 소문도 낼 것 같다.
- 늦잠을 자는 바람에 오전 세션은 포기하고 다른 일을 했다. <상담실 밖에서 상담하기> 세션이었는데 자료집을 받아 보니 하필 그 세션이 글을 싣지 않는 세션이었다. 절망... 간략하게라도 좋으니 기록이나 후기가 풀렸으면 좋겠다. 누군가 후기를 나눠 줄 수 있다면 꼭 연락을 줬으면 좋겠다...!(젭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