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렇지 않게 적어 내렸다가 쓱 지울 수 있는 연필이나 웹상의 글쓰기와 달리, 만년필을 이용한 글쓰기는 긴장감이 가득하다. 마치 사귄 지 며칠 안 된 애인에게 애절한 편지를 쓰는 사람과 같이 필체부터 내용까지, 임전태세로 글을 쓰게 한다. 쓴 다음 지울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볼펜이나 연필보다 몇 배는 비싼 도구로 쓰다 보니 왠지 모르게 달필로 적어내려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이 든다.
'글쟁이라면 만년필 한 자루는 있어야지!'
주변의 말 한마디에 아주 팔랑귀가 되어 구입한, 나의 만년필에 대한 첫인상이다. 그리고 이렇게 비싼 필기구가 생각 의외로 필기감이 불편하다니! 그렇게 나의 첫 만년필은 서랍 어딘가의 허수 공간에서 천천히 잊혀지는 듯했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글을 다루는 게 내 직업이 될 줄은. '셰프는 절대로 집에서 요리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글 쓰는 걸 직업으로 삼고나니 집에서 키보드로 원고를 쓰는 것으론 만족할 수 없었다. 왠지 일의 연장선인 것처럼 느껴져서일까? 기분을 새롭게 하기 위해 피카소, 헤밍웨이가 썼다고 하던 몰스킨까지 큰 맘먹고 마련했다. 좋은 노트엔 왠지 좋은 펜을 써야 할 것만 같은 기분. '죄수번호 15,500번, 해방이다!' 잊혔던 만년필은 오랜만에 빛을 봤다.
장롱면허인 사람이 오랜만에 운전대를 잡았다고 그 실력이 나아질리는 없는 법. 오랜만에 잡은 만년필을 불편한 도구였다. 다행인 점은 그 당시 나는 수집하고 싶은 문장들을 가진 책들 사이에 파묻혀 있었고, 그래도 작심삼일이라고... 갓 뽑은 따끈따끈한 몰스킨이 있었다. 변화를 알아차린 것은 만년필을 두 달쯤 썼을 때였다. 눈앞에 놓인 것은 공부할 때 자주 사용하던 볼펜과 어느새 손때가 묻기 시작한 만년필. 별 생각도 없이 만년필을 집어, 책에서 문장을 하나하나 옮겨 적으며 도둑질한다.
'음... 오늘의 도둑질도 아주 알차군!'
문장 도둑은 만족스럽게 수첩을 덮고는 이변을 알아차렸다. 이제는 의식하지 않아도 만년필을 편안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처음 만년필을 들 때의 중압감 역시 익숙함에 묻혀 사라진 뒤였다. '이제야 나도 만년필에 익숙해졌나 봐!' 입문이 성공적이었음을 깨달았으니,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자 더 비싸고 좋은 만년필을 찾아 인터넷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더 비싼 웃돈을 주고 산 만년필로 콧바람까지 불며 노트에 글을 써 내렸지만, '아니 이게 웬걸! 똑같이 불편하잖아! 이 브랜드가 문제가 있는 걸까?' 이런 시시콜콜한 얘기를 만년필 애호가인 동료 작가에게 털어놓자 의외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만년필은 팁이 쇠로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주인에 맞게 길들이는 시간이 필요해요. 글을 계속해서 쓰고, 팁이 닳고 닳았을 때 자기에게 딱 맞는 상태가 되는 거죠. 그래서 저도 처음 산 만년필에 애정을 주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려요. 하지만 그게 바로 만년필의 매력이죠
새로 산 만년필에게는 미안하지만 계속 쓰던 만년필을 다시 손에 들었다. 잉크는 뚝뚝 끊기지 않고, 딱 필요한 만큼 매끄럽게 종이 위를 덧칠한다. 감각을 손가락에 집중시켜봐도 딱히 느껴지는 불편함은 없다. '이 만년필은 정말로 내 것이 되었구나'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고 보니 클라이언트에게 멋 부린다고 이 만년필을 건넸을 때 오히려 불편하다고 한 소리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만년필뿐만이 아니다. 애정과 시간을 듬뿍 주고받고 나서야 새것이 넘볼 수 없는 가치를 지니는 것들이 있다. 13년을 보내 구석구석 가족들의 냄새가 묻은 고향집, 어느새 내 발에 딱 맞게 된 가죽 구두, 옆에서 시답잖은 이야기만 하고 있어도 편안한 10년 지기 친구들, 그리고 닳고 닳은 만년필. 눈이 번쩍번쩍할 정도로 새로운 것도 좋지만, 만년필을 쓰다 이렇게 닳고 닳은 것들의 대단함을 떠올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