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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라소라빵 Feb 26. 2023

영화 <바빌론>이 던지는 질문, 영화 아직 좋아하시나요

OTT가 범람하는 시대에도 영화는 제 가치를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영화를 무너트린 것이 넷플리스 같은 OTT서비스도, 사람을 모일 수 없게 한 코로나 바이러스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볼 콘텐츠가 너무 많아서.


시간이 너무 없어서  유튜브에서 10분짜리 스토리 압축 영상을 1.5배속으로 돌려보는 현대인들에게, 그리고 영화 말고도 즐길거리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 영화는 제 가치를 지킬 수 있을까? 영화 <바빌론>은 그에 대한 자문자답을 3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 동안, 겨우 100년이 되는 할리우드의 역사를 압축시켜 관객에게 전달한다. 영화계가 가진 추함과 매력을 되도록 가감 없이 드러내면서. 그리고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도 영화를 좋아하시나요?'

꽤나 유명하고 출중한 배우와 감독이 모인 영화임에도 상영관을 찾기 어려웠다. 그마저도 심야시간에 대부분의 좌석이 텅텅 비어 큰 대야에 콩나물 심은 듯 자리를 잡은 사람들과 함께 <바빌론>을 감상했다. 그 적은 사람마저도 막차시간이 다가오자 중간중간 영화관을 떠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리를 떠난 이들의 입장도 공감이 간다. 바빌론은 할리우드와 영화의 역사, 그리고 그 시간이 쌓아온 방대한 레퍼런스를 모른다면 제대로 즐길 수 없는 영화이었기 때문이다. (바빌론은 무성영화가 주를 이룬 1920년대부터 유성영화가 도입된 1930년대를 거쳐 컬러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가 개봉된 1954년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반대로 영화에 대한 자전적인 이야기를 풀어주는 영화  <원스 어폰 어 탐인 인 할리우드>나 <놉>을 재미있게 보았다면 이 영화는 정말 각별한 작품으로 다가가겠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이 영화를 추천하기는 망설여진다. 그러나 영화를 사랑하는 이라면, 나는 이 영화가 아직 상영관에 걸려있을 때 영화관에서 관람하기를 추천하고 싶다. 그리고 이 영화를 감상하는 데 도움이 될 3가지 길라잡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Part1. 영화에 대한 노스탤지어

인생보다 훨씬 대단한 게 있어(영화 속에는)
-매니-

영화의 타이틀이 소개되기까지 무려 30분 동안 광란의 파티 장면이 상영된다. 할리우드의 화려함과 문란함이 집약된 그곳에서 할리우드 관계자들은 도덕과 이성이 마비된 채 술과 마약을 즐기는 것은 물론이요, 성적인 쾌락마저 절제 없이 추구하여 마치 성경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를 두 눈으로 목도하는 듯하다. 그리고 성경에 의하면, 죄악과 타락을 상징하는 두 도시와 버금가는 곳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바빌론'이다.


요한 묵시록에선 묵시록의 짐승과 함께 진홍색 옷을 입은 '바빌론의 대탕녀'가 역겹고 더러운 것이 가득 담긴 금잔을 들고 찾아온다고 묘사하곤 한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바빌론'처럼 1927년의 할리우드는 방탕하며 구제할 도리가 없는 곳처럼 그려지며, 바빌론의 대탕녀처럼 진홍색 드레스를 입은 배우지망생 '넬리(마고로비 역)'가 파티장을 찾아오면서 분위기는 한층 더 무르익는다.



상스럽고, 추잡해서 나도 모르게 눈을 피하게 되지만, 살짝 실눈 뜨고 보게 되는 쾌락의 향연들.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그려낸 듯한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할리우드의 역사를 꿰고 있다면 지극히 의도적인 연출로 느껴진다. 그 혼란스러움, 그럼에도 무의식적으로 쫓게 되는 스포트라이트의 뜨거운 열기는 초창기 할리우드의 분위기와 많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1920년대 당시 할리우드는 열악한 촬영 환경은 물론이요, 스태프와 배우에 대한 폭언과 폭력이 난무했지만 그럼에도 영화를 너무 사랑한 이들, 혹은 스타가 되고 싶어 하는 배우지망생들이 몰려왔다. 동시에 당시 영화가 오페라나 연극에 비해 '비천하고, 저급한' 하층민들의 오락 취급을 받았다는 것 또한 사실이고. 딱 저 시대를 살았던 상류층들에겐 할리우드는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바빌론에 걸맞은 향락과 퇴폐의 도시로 비치지 않았을까? 자신들은 이해할 수 없는 저질스럽고, 저급한 영상을 찍어내는.


그러나 성경 밖에서 바빌론은 인류 4대 문명 중 하나가 발생한 장소이자,  로마보다 앞서 '세계의 수도' 역할을 했던 도시이다. 작품의 제목부터  영화를 저급한 하층 문화로 바라보던 시선을 극복하고, 당당히 하나의 예술로 인정받게 한 역사와, 그 주축이 된 할리우드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이 녹아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할리우드의 추악한 면을 굳이 덮으려고 하지 않는다. 추악함을 덮으려고 하는 건 지난 일들이 부끄럽기 때문이다. 자부심이 있다면 다소 부끄러운 일들도 '그때는 그럴 법했다'며 웃어넘길 수 있는 파란만장한 청춘 이야기가 된다. 당시 엑스트라들은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촬영을 보조했음에도 제대로 임금을 지급받지 못했고, 배우들은 인체에 해로운 석면을 눈 오는 장면을 연출한답시고 뒤집어써가며 연기했으며, 제작자들은 제멋대로인 배우들과 감독들을 견뎌야만 했지만, 영화를 세계적인 산업이자 예술로 만들었다는 자부심을 공유한다. 때문에 당시 할리우드는 가까이서 보면 웃어넘길 수 없는 비극적인 문제들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눈부신 시절들이 지닌 노스탤지어가 가치가 없다고 단언하지도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초반부는 세상만사를 겪은 선대가, 독한 위스키에 조금 얼큰하게 취해 담배를 코 앞에서 피워대며 들려주는 흥미로운 옛날이야기 같기도 하다.


 '정말요?  할리우드에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럼. 그때 감독이 햇빛이 사라지고 있다고 스태프들에게 얼마나 성을 내던지... 배우란 놈은 술에 절어서 구토감을 참아가며 연기를 시작하는 데, 그래도 당대 최고의 스타라고 연기를  시작하니 완전 딴 사람 같더구나. 감독이 컷을 외치는 순간, 다 함께 바라보는 영화 세트장의 어스름은 정말로 아름다웠단다.'


분명 선대는 젊은 시절 그곳에서 못 볼꼴 다보 았겠지만, 그럼에도 그의 인생에서 가장 화려하고도 빛나는 청춘 시절이다.  청춘은 조금 시간이 지나 그 색이 바래더라도 찬란함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청춘은 필연적으로 끝을 맞이해야만 한다. 영원한 청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언젠가 앨범 한편에 기록되어 점차 색이 바래가기를 기다리거나, 젊은 이들에게 흥미로운 콘텐츠로 소비되기를 바라며 기다려야 한다. <바빌론>에서, 그리고 실제 영화 역사에서 유성영화가 등장하면서 무성영화가 맞이한 말로 역시 그러하다.


Part2. 무성영화, 그리고 지금 극장. 저물어가는 시대의 아이콘

Did you Miss the Silent?

유성영화가 도입되면서 시작되는 Part2와 가장 비슷한 영화는 <사랑은 비를 타고>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사랑은 비를 타고>는 유성영화 쪽 스타가 주인공이라면, <바빌론>은 유성영화로 인해 저물가는 무성영화 배우들이 주인공이라는 것.


<사랑은 비를 타고>의 한 장면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는 유성영화에 막 입문한 여배우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반대로 무성영화의 스타인 라이벌 여배우는 주인공의 성공을 질투해 괴롭히지만 유성영화에 어울리지 않는 꽥꽥거리는 목소리로 관객에게 조롱받고, 유쾌한 웃음을 선사하는 감초 역할로 등장한다. 하지만 <바빌론>에서는 그 역할이 서로 뒤바뀌었다. 주인공은 무성영화 측의 인간들이다. 영화에서 잭 콘래드가 관객들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장면 역시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 해당 장면을 반대로 오마쥬한 장면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잭 콘레드(브래드 피트)는 자신의 성공에 안주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는 유성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반응을 시찰하기 위해 뉴욕에 매니저를 보낼 정도로 시대의 흐름을 읽었고, 자신 스스로도 눈부신 재능에 기대던 과거와 달리 발음을 교정하고, 하지 않던 연기연습할 정도로 (나름)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준비와 노력을 쌓아왔다. 그러나 비극적 이게도, 한 분야에 탁월한 사람들은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 보다 변화에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법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선보여야 하는 유성영화에서, 그의 목소리 연기는 관객의 기대치에 미치치 못했다.


'무성영화 시대가 그립나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아니요, 시대를 거스르면 안 되죠.'라고 답했지만 그것이 본심은 아니었을 것이다. 시대가 변하지 않아 자신이 잘하고, 사랑했던 무성영화를 계속할 수 있는 편이 분명 행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색 바랜 앨범은 미래를 열기 위한 도움은 주지 못한다. 때로 추억으로 꺼내보거나, '그때가 좋았지'라고 회포를 푸는 만 도움이 될까?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럴 땐 오히려 그 추억을 불태워버리는 게 생존에 도움이 된다. 우리도 헤어진 연인을 정말로 잊지 못할 때,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다 정리하고, 불태우곤 하지 않는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때론 추억과 향수를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그러지 못했다는 점에서 잭 콘레드의 패망은 이미 결정된 운명이었다.


무성영화로 스타덤에 오른 넬리 리로이(마고 로비) 역시 유성영화에 입문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작중 유일하게 남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인다. 파티 장면에서의 자유분방함을 생각해 본다면, 그녀에겐 유성영화에 적응하기 위한 나름의 노력이었을 것이다. 손을 덜덜 떨면서 본 적 없는 대본과 셀 수 없을 만큼 씨름하느라(무성 영화시기엔 대본은 나중에 자막으로 입혀지는 것이라 배우들이 따로 대사를 외울 필요가 없었다. 어떤 상황에서 연기하는 것인지 알면 될 뿐) 대본 위에 빼곡히 적힌 검은 문자들은 이리저리 번지고, 닳아 있다.


그러나 그녀를 최고의 무성영화 스타로 만들었던 재능과 대담함, 즉흥 연기가 가져다준 생생함은 이번엔 그녀의 생존을 방해한다. 다소 무질서했던 무성영화 세트장의 모습과는 달리, 유성영화의 소리는 규칙과 질서가 지배한다. 스태프들은 숨소리와 발소리까지 죽여야 하고, 손목시계의 시침 움직이는 소리마저 사운드 엔지니어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든다. 필름 돌아가는 소리가 시끄러웠던 카메라와 감독은 이제 찜통 같은 상자 안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촬영해야 하는 판국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넬리의 강점은 오히려 약점으로 변해버린다.


마이크 녹음이 도입되면서 생긴 테이핑 마크(배우가 멈춰야 할 자리에 표시를 해놓는 것. 지금이야 기다란 붐 마이크가 배우를 따라다니지만 당시 마이크는 성능이 안 좋아 대사를 녹음하기 위해선 특정 자리에서 대사를 했어야 했다.)를 번번이 놓치고, 목소리 또한 관객들이 듣기에 옥이 굴러가는 듯한 좋은 소리가 아니라 찍는 영화는 번번이 관객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 그들이 너무나도 무성영화에 뛰어난 면모를 보여, 구시대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점도 적응 실패에 한 몫했을 것이다. 이미 박힌 이미지를 바꾸는 것이 새로운 걸 보여주는 것보다 어려운 법이다. 물에서 벗어난 물고기처럼 무성영화 측 인물들에게 유성영화는 숨 막히기만 하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한다고 한들, 그들 입장에선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진화란 상황에 맞게 적응하고 변화하는 개념으로 종종 화자 되곤 하지만 실제로 진화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한 종이 살아남은 이유는 이들이 변화와 적응에 특출 나게 잘 적응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기준에 부합하는 종들만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즉 새로운 기준(New Normal)이 도래한 시대에선 생존이 곧 진화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의 집중력, 필름이 지닌 한계로 대략 2시간 전후로 설정된 영화의 상영시간은 분명 관객과 제작자를 고려해 굳어진 기준이었지만, 지금 와서는 영화의 생존을 저해하는 하나의 요소일지도 모른다. 15분짜리 유튜브 영상조차 길다고 느끼고, 드라마 한 편 제 시간에 챙겨보기 힘들 정도로 너무나 바쁘고, 정신없는 현대인들에게 2시간짜리 영화는 이제 너무 길다고 느껴지니까.(하지만 이 영화는 3시간짜리다.) 무성영화의 시대가 저물고 유성영화에 적응하기 위해 분투하는 스타들의 모습은 잭과 넬리의 문제만이 아니라, OTT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온갖 방법을 궁리하는 현대 영화계의 모습과 겹쳐져 관객에게 소환된다.


반면 매니 토레스(디에고 칼바)는 앞의 두 인물과 달리 시대의 변화에도 생존에 성공한 유일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생존은 그가 오히려 '무성영화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하고 지레 짐작한다. 그는 본래 매니저 역할에 강점이 있었던 인물이다. 영화 초반, 술과 마약을 과다복용해서 실신한 여배우를 몰래 빼오기 위해 코끼리를 활용하고, 막힌 도로를 뚫고 카메라를 가져오기 위해 구급차를 활용할 정도로 임기응변과 위기대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실수를 2번이나 저지르기도 했지만) 때문에 그의 재능은 무성영화 시기엔 빛을 내지 못해 일일 아르바이트나, 매니저 역할에 그쳤지만, 임기응변과 필요한 자원을 종합해야 하는 급변의 시기에 그는 임원의 자리까지 꿰찰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그 역시 유성영화에 완벽하게 적응하지는 못한다. 못했다기보다는 충분히 할 수 있었음에도 '하기 싫었지' 않았을까? '세상에 큰 의미를 남기고 싶다.' 그런 포부에서 영화를 동경한 매니지만, 그 역시 무의식의 영역에선 '유성영화보다는 무성영화에 애정을 가지고 있었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작중에선 넬리에 대한 사랑으로 치환되기는 하지만, 그는 충분히 유성영화로 성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음에도 번번이 넬리(무성영화)의 뒤처리를 하느라 그의 능력을 더욱 살릴 수 있는 기회를 번번이 놓쳤다. 다른 이들은 적응하지 못한 역겨운 상류층들의 시선(혹은 영화에 대한 대중의 기대와 시선) 또한 아무렇지 않게 견뎌냈지만, 그들의 기대와 달리 무성영화의 아이콘(넬리)을 끝까지 고집하느라 자신의 재능을 살릴 기회를 날렸다. 하지만 어쩔 수는 없는 일이다. 그가 영화를 좋아하게 된 계기도, 더욱 사랑하게 된 계기도 넬리(무성영화)에 있었으니.


  영화 마지막에서는 매니는 심지어 '큰 의미를 남기고 싶다.'는 자신의 포부와 반대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에요'라고 목숨을 구걸하며 LA에서 쫓겨나게 된다. 유성영화에 어느 정도 적응하여 생존했던 그마저도 무성영화에 대한 노스탤지어로 인해 더 이상 LA와 할리우드에 머물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바빌론>의 세 주인공들은 그 유형은 서로 다를지라도 무성영화가 어떻게 할리우드에서 퇴출되게 되었는지, 그 과정과 유형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살아있는 증언자들인 셈이다.



Part3. 지금도 영화 좋아하세요?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당신의 시대가 끝난 거예요. 이유가 없어요. 더 이상 궁금증을 가지지 마세요-엘리노어-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영화가 던지는 질문과 마주해 보자.


"영화, 지금도 좋아하시나요?"


아마 여기에 단적으로 'No'라고 외치는 사람은 드물거라 생각하지만, 단적으로 우리가 요즘 극장에 가는 횟수가 얼마나 될까? 2019년까지 1인당 1년 극장관람 횟수는 약 4회 정도였지만, 팬데믹이 찾아온 2020년엔 1회 정도로 급격하게 감소하였다. 코로나가 조금 정리된 지금은 조금 늘었을지는 모르지만, 예전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 한 편 보러 가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가 아니게 되어버렸다.(티켓 가격이든, 시간적 여유든) 때문에 할리우드 감독이나 배우들이 영화를 찍지 않고 넷플릭스나 아마존 프라임 같은 OTT 플랫폼의 독점 시리즈를 촬영하러 건너가는 풍경도 이제는 희귀한 사례가 아니다. 심지어 이제 영화는 유튜브나 틱톡 같은 플랫폼과 소비자의 시간을 두고 경쟁하게 되었다. 이렇게 영화의 생존과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바빌론>은 여러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설령 영화계가 무너지더라고, 우리가 사랑하고 열광했던 영화의 매력에 대해 뜨거운 웅변을 토해낸다.


'내가 하는 일은 수백만 명에게 의미가 있어. 내 부모님은 연극을 볼 돈이 없어서 싸구려 극장만 다녔어. 그리고 그거 알아? 거기엔 아름다움이 있어. 저 화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의미가 있어. 상아탑에 있는 너희한테는 아닐 수 있어. 하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그건 의미가 있어.'

-잭 콘레드-

'아픈 거 알아요. 하지만 100년 후에, 당신과 나 둘 다 죽고 나면 누군가가 당신의 영화를 보는 순간, 당신은 다시 살아나는 거예요'
-엘리노어-


분명 의미 있고,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던 일이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면 아무리 많은 이들이 열광했던 작품이라도, 예전 같은 열기를 찾을 수 없다. 이미 한 번 경험한건 익숙해지고, 사람들은 언제나 새로움을 원하니까. 때문에 스타는 시대를 타고 난다.  


'나의 시대가 저물어간다.'


OTT와 유튜브에 지분을 넘겨주고 있는 영화와 할리우드. 그 신화와 영광을 직접 써 내린 감독들과 배우들. 잭 콘레드처럼 자신의 성공과 신화를 뒤로하고, 새로운 젊은 이들에게 바턴을 넘겨주는 일은 괴로울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시대의 아이콘들이 지닌 숙명과도 같은 일이다. 영광스러운 시대는 뒤로하고, 젊은 이들의 새로운 양분이 되는 것. 1954년, LA에서 쫓겨나고 약 20년 만에 극장을 찾은 매니도 처음엔 스크린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한다. 그가 알고 있던 영화는 흑백 유성 영화를 지나, 컬러 영화가 되어 있었다. 자신이 알던 모습은 흔적조차 없고, 새로운 모습은 낯설기까지 하다.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자신의 영광스러운 시절, 그때 함께 시대를 쌓아나갔던 그리운 얼굴들. 눈물이 앞을 가려 스크린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고, 좌절감에 차마 고개조차 들 수 없다.


그때 매니가 아는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온다. 'Singing in the rain~, Singing in the rain~' 1930년대쯤, 넬리와 잭 콘레드를 비롯한 무성영화 스타들이 함께 모여 찍은 단편 영화에서 사용된 노래. 잭 콘레드는 당시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조금 우습게 여겼다. 노스탤지어가 이끄는 대로 비로소 고개를 들어 스크린과 마주 보는 매니. 그제야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주변 관객들의 한껏 상기된 표정들. 영화가 클라이맥스에 달하자 덩달아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거나, 뜨거운 입맞춤을 나누는 커플들. 그렇다. 매니의 시대, 무성영화가 빛나던 할리우드는 이제 과거의 아이콘 정도로만 남았고, 그 시간이 쌓아온 양분조차 매니만이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가 되었지만 분명 관객들에게 '의미 있는' 시간을 선사하고 있었다. '세상에 큰 의미를 남기고 싶다.' 매니의 바람은 비록 자신이 젊었을 적 소망했던 것과 다른 방향이긴 하지만, 분명히 세상에 족적을 남기고 있었다.


이어서 <바빌론>은 마지막 장면에서  할리우드와 영화의 역사를 짧게 축약해서 펼쳐놓는다. 전부 지나간 시대의 아이콘들. 그러나 현대의 콘텐츠들 속에, 아는 사람만 아는 정도로 녹아내려 모르는 사이에 반복되고, 오마쥬 되며, 그때마다 다시 부활하는 과거의 영광들. 영화에 처음으로 특수 효과가 도입된 <달나라 여행>, 각종 합성 기술을 선보인 <안달루시아의 개>, CG의 위력을 알린 <쥬라기 공원>, CG를 한층 발전시키며 애니메트로닉스와 스톱 모션기술을 사장시키며 영화계의 판도를 바꾼 <터미네이터 2>, CG영화의 최정점인 <아바타>까지, 영화가 쌓아온 발전의 역사들. 우리가 좋아하는 영화는 이미 여러번 변화를 거쳤다.


마지막으로 영화는 카메라를 매니를 머리 위로, 그리고 저 극장 위로 올려 영화관에 앉아 있는 관객들의 정수리를 비춰준다. 마치 관객들에게 '역시 영화 좋아하시죠?'라고 묻는 듯, 3시간이라는 대장정을 거쳐 이 호불호가 극명한 영화의 객석을 마지막까지 지킨 영화팬들에 대해 감사 인사를 남기듯.



컬러 영화가 유행하는 시대에, 관객은 흑백 영화를 찾지 않고, 유성 영화가 표준인 시대에 굳이 무성영화를 찾아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관객이 더 이상 영화관을 예전만큼 찾지 않는다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일지도 모른다. 물론 저마다의 노력은 있겠지만 그 노력이 영화의 수명을 연장시킬지, 아니면 잭 콘레드처럼 '이제 미래는 너의 것이야'라고 말하며 새로운 콘텐츠에 자리를 넘기고  쿨하게 퇴장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우리가 사랑한 영화는 분명 어디선가 어떤 이의 양분이 되어 새로운 포맷으로 탄생하고, 또 누군가와 울고 웃고, 열광시키고, 함께하고 있지 않을까? 그 유산을 온전히 이어받은 새로운 무언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 행운에 감사함을 표하며 인연을 이어가면 되는 일이고.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괜찮다. 그때는 우리도 독한 위스키 한잔에 노스탤지어를 목 너머로 넘기며 들려주면 되니까. '굉장한 일이 있었단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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