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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하경 Feb 23. 2024

경로를 재탐색하였습니다.

후일담

한 분야에 뼈를 묻을 예정이었는데


저는 디자인과를 졸업한 20대의 3D모델러였습니다.


부모님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미대에 입학했던 만큼, 아티스트로서의 미래를 멋지게 빚어나가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소질도 없는 주제에 예체능의 길로 들어서겠다며 스스로 고생길을 자처하던 시기에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이것이었습니다.


꿈이랑 목표는 언제든 바뀔 수 있어.

지금 네가 공부에 올인하면 선택지가 넓어지지만, 그 시간을 그림에 쪼개어 쓰는 순간 선택지가 확 좁아진다고.


이러한 논리로 쏟아지는 반대를 막아내며 가고 싶은 길로 가보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과정에서 저는 '내 꿈이 바뀔 리는 없다.'는 확신을 남에게도 스스로에게도 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고집대로 걸어온 길 안에서도 '거봐 내가 이 분야에서 잘 해낼 수 있다고 했지?'라는 것을 남들에게 드러내 인정받고 싶어 했습니다.


결국 모두가 안 될 거라던 미대입시에 합격을 하고, 입학해 장학금을 받고, 졸업해서는 관련 직종 프리랜서로서 나름대로 괜찮게 살아낸 하루하루가, 제게는 누군가가 판검사 의사의 꿈을 이룬 것보다도 더 큰 자부심이었습니다.




우연히 들어선 길


그런데 그렇게 가상공간을 디자인하는 컨셉아티스트로서, 그리고 그것을 구현하는 3D모델러로서, 평탄하게 커리어를 이어가던 중 갑자기 조직관리의 길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마음의 준비를 한 채 커리어를 전환한 것도 아니고


충동적으로 벌여놓은 일을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과


'일단 1년만 해보고 아닌 것 같으면 다시 모델러로 돌아가면 되지 않겠느냐.'는 꼬임에 넘어가 들어선 길이었기에


큰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고, 또 바깥으로부터도 이 분야에서 많은 인정을 받았음에도,


항상 내가 있을 길은 아트 분야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항상 책임진 일을 빨리 마무리하고 이 일에서 손을 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치열하게 업무를 진행했습니다.


그 때문에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래 있던 길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고사하게 되기도 하고, 더 길게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됐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바로 발을 빼서 돌아 나왔습니다.




내 꿈이 바뀐 것 같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는 이미 제게 너무나 새로운 경험을 주었고, 새로운 경험을 통해 저는 짧은 시간에 많은 성장을 했고, 과정에서는 전에 느껴본 없는 새로운 기쁨과 감동을 제게 주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느낀 기쁨의 종류는 제가 그림을 그리고 모델링을 할 때와 완전히 달랐고, 기쁨의 크기는 훨씬 더 컸기 때문에


사실 매니징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경로의 재탐색을 시작하고 이 업을 내가 앞으로 평생 할 업으로 생각하고 일에 더 집중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지금은 듭니다.


하지만 제가 많은 시간과 비용을 매몰시키고, 또 수많은 반대를 이기며 지켜온 저의 신념과, 진득이 앉아 대화를 나누고 그를 설득할 새도 없이 의무감만으로 내 안의 나를 달래 가며 서둘러 걸어온 탓에


이제는 제가 어떤 방향으로 성장하고 싶은지, 무엇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인지, 평생 굳게 믿고 있었던 나의 커리어 계획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건지 이미 제 안에서 많은 것들이 모호해져 버렸습니다.


심정적으로 모든 것을 쏟아붓던 길을 멈추어 선 데서 오는 공허함으로 한동안 힘들어하기도 했습니다.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그것이 꼭 일을 관두고까지 해야 할 일이냐 싶을 수도 있지만 잠시 멈추어 뭉뚝하게 쌓여버린 수많은 저의 생각들, 묵은 신념들, 그래서 지금 나아가고 싶은 방향 등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처음부터 이직 없는 퇴사를 결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휴직, 전환 배치, 대학원 진학, 프리랜서, 텀을 둔 이직 등 다양한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번에도 우연히 처음 보는 단어들을 마주쳤습니다.

극초기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 앤틀러 코리아 2기 배치 모집

'팀 빌딩', '엑셀러레이터'...... '예비창업자' 홍보 문구에 등장하는 단어들을 곱씹어보았습니다.


기존의 경험을 토대로 이번에는 더 능숙하고 깔끔하게 해보고 싶었던 '신규 조직 세팅'


혼자서는 하기 힘든 일에 조언을 줄 '엑셀러레이터'


이 길로 완전히 들어서기 전에 신규조직 세팅을 위해 스스로를 그라인딩 하는 것이 정말 나와 맞는지 핏을 확인할 수 있는 기간을 존중해 주는 '예비'


그리고 제가 기쁨을 느꼈던, 맨땅에서 비전과 신념으로 사람들을 모으고, 함께 목표를 달성해 나가는 일의 끝판왕인 '창업'


프리랜서일 때는 정말 '업무'자체를 혼자 해왔고


팀장일 때는 업무는 함께하지만 '매니징' 및 '세팅' 자체를 혼자 해왔다면


이곳에서는 업무와 매니징, 세팅을 모두 함께하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들었습니다.


매니징 쪽에서 경험이 있는 훌륭한 분들과 풀타임으로 함께 한다면 


다시 한번 세상에서 제가 제일 바보인 것 같은 느낌에서 시작해 또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이에 저는 배울 많은 상사를 만난 행운, 그리고 명도 빠짐없이 역량적으로 인격적으로 훌륭한 팀원들을 매니징 하게 행운을 한꺼번에 만난 천운을 접고 새로운 가시밭길로 들어서기 위해 퇴사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내가 제일 바보네?


감사하게도 앤틀러 코리아로부터 합격 통보를 받은 후, 동기분들과 아주 자세한 자기소개서를 작성하여 주고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프로그램 안팎으로 많은 커피챗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동기분들 중에는 저와 같은 나이에 이름난 스타트업의 C레벨을 역임했던 친구, 아이템도 없이 사람만으로 큰 하우스로부터 투자를 받은 동생, 이름 있는 대학의 최연소 교수님, 코스닥 상장사 임원이셨던 분, 세계적인 기업 본사에서 일하셨던 분들 등 스펙만으로도 기가 눌리는 분들이 가득했습니다.


국내 대기업에서 일하셨다거나 국내 좋은 대학을 졸업하신 분들도 자신은 별 것 없다는 식으로 머쓱해하며 자기소개를 하시는 통에


"저는 유니콘 기업에서 팀장을 맡아 1년 반 만에 성과를 230% 개선하였고..."라고 말하는 저의 자기소개는 


오히려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제가 엊그제 벨트 없이 데드 80kg을 들어서 1RM을 올린 게 아주 기분 좋다고 이야기한 것보다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지 않은 모양이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연락을 하고 지내는, 이제는 정말 친해진 2기 창업자들도 제 데드 1RM은 기억해도 제 뼈와 살을 갈아 넣어 쌓은 전 기업에서의 성과와 경력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 정도로 저의 프로필은 그곳에서 평균 이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이디어를 짜기 위해 만나 스프린트를 돌 때도 비즈니스에 대한 기본 지식부터 경력이 쌓였을 때 알 수 있는 넓은 시야까지, 저는 갖지 못한 공동창업자로서 매력적인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게 프로그램 주가 끝나고 녹초가 되어 집에 들어가 부모님과 통화를 나눌 때 저는 와하하 웃으며 어머니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엄마, 여기서 내가 제일 바보예요!

나는 손해 볼 일이 없어! 근묵자흑만 해도 성공이에요!"


그렇게 저는 성공은 몰라도 성장은 보장된 듯한 가시밭길로 한 발을 성공적으로 들여놓으며 다음 스테이지로 발을 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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